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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MIU404 / 이부시마 / Pinball Machine2025-09-08 14:34


개 노래 연작




01 검은 개



이부키 아이의 문서 작성 과정에 단계가 하나 추가되었다. 단계는 두 분류로 나뉜다. 간단한 메모, 보고, 문서라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성해서 마무리한다. 간단한 범위를 넘길 경우엔 시마 카즈미가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이부키 아이가 마무리한다. 이부키 아이라고 모든 문서를 엉망진창으로 작성하는 건 아닌데, 특히나 날려 썼던 보고서 하나가 잘못 걸려 된통 혼난 이래 이런 방식이 자리잡았다. 나이 다 먹은 어른이 되어가지고, 그것도 경시청에서, 혼이 뭐냐 하겠지만 그건 정말 혼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희게 질려 나와서는 이부키 아이가 소근거렸다. 우와, 시마. 학교 때로 돌아간 줄 알았어. 반성의 여지라고는 없었다. 시마 카즈미는 그냥 이부키 아이 옆구리를 쳐버렸다. 시마 카즈미도 된통 혼나고 나온 참이다. 순전히 파트너란 이유에서. 연대책임이었다. 시마 카즈미가 검사하는 것도 연대책임의 연장선이다. 그래서 이부키 아이도 순순히 문서를 넘겼다. 혼난 직후라 나름 신경은 썼다. 시마 카즈미는 나름 신경 썼다는 그 보고서를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아주 오래. 초침이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심판의 순간이 멀어서 이부키 아이가 조바심을 냈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빨간 펜이 죽죽 그어질 줄 알고 긴장했지만 시마 카즈미가 그 정도로 야멸차진 않았다. 이부키 아이의 예상을 넘어서서 야멸찼다. 포기같은 한숨이었다. 


“역시 처음부터 다시….”

“아니, 아니, 아니, 아니지!”


이부키 아이는 그런 한숨을 아주 잘 안다. 첨삭은커녕 영영 빠꾸다. 말이 완전히 완성되어 시마 카즈미의 입에서 떨어지거든 진짜로 그렇게 해야할까봐 중간에 잘라버리고 끼어들어 버틴다. 잘 봐봐. 분명히 건질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야. 시마 카즈미가 보기엔 대충 일시와 장소, 이름 빼고는 없었다. 그거 하난 똑바르니 됐다.


“그건 시마쨩의 기준에서고.”


급박해진 이부키 아이가 아예 새로운 시각을 들이밀었다. 들어보니 일견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다. 아무도 이부키 아이에게 평균 이상의 문장력과 구성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새로 온 대장도 마찬가지다. 혼난 것은 순전히 걸린 보고서가 낮은 기대치보다도 훨씬 밑돌았을 뿐으로, 요컨대 최악을 면하면 된다. 그럴듯하다. 흔들리는 눈빛을 이부키 아이가 파고들었다. 눈썹을 비껴 내리고 코를 울렸다. 그렇지? 전면 파기는 면했다. 대신 참조할 만한 근거를 추가하고 의미 없는 동의어의 반복을 삭제하고 쓸데없는 사견을 들어낸 후 빈 공간을 차가운 사실관계로 채웠다. 겨우 구색을 갖췄다. 수정본을 손에 든 이부키 아이가 말했다.


“이건 거의 다시 쓴 거 아냐?”


일시, 장소, 이름을 제외해도 살린 부분이 더 많았으므로 시마 카즈미는 어디까지나 수정이라고 했다. 시마 카즈미가 납득했듯 이부키 아이도 납득했다. 그리고 윗선에서도 납득했다. 만족이 아니라 납득이다. 뭐, 이 정도면…, 의 느낌으로. 이부키 아이는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예쓰! 예쓰! 예쓰! 그리하여 이날의 보고서가 기준점이 되었다. 이 수준만 맞춰주면 된다는 적절한 예시가 된 것이다. 양식이 있으면 쉽기에 이부키 아이는 곧잘 따라했다. 시마 카즈미가 손댈 일은 거의 사라졌다. 형식상 훑어보는 것으로 단계는 정착했다. 이마저도 아예 사라질 수 있었으나 검사받는 빈도수가 줄까 하면서도 이런 일에만 숙련된 이부키 아이가 금세 요령을 부리는 바람에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엉망진창이었던 문제의 보고서가 어쩌다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부키 아이의 긴장은 오래가지 않는다. 수준이 훅 떨어져 최악에 가까워질 때마다 시마 카즈미가 건져 올려 채찍질해야했다. 이번은 괜찮을 줄 알았지. 이부키 아이는 매번 똑같은 변명을 내놨다. 전혀 안 괜찮다. 그 어쩌다 한 번에 불호령이 떨어졌던 건 아주 잊어버렸다. 시마 카즈미의 검사란 이 최저치를 솎아내는 일이다.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고 나서야 시마 카즈미는 깨달았다. 이부키 아이의 문서 작성이 전혀 늘지 않은 이유를. 그의 말마따나 모두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대책임의 연장선이니 첨삭에 대가는 없다. 그럼에도 이부키 아이는 가끔 시마 카즈미에게 캔음료 따위를 찔러줬다. 너무 사소해서 부담스럽지 않고 거절하기도 뭐한, 딱 그런 정도의 답례였다. 특히 시마 카즈미가 별 말 없이 대충 보고 돌려주는 날에는 백 퍼센트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확실하게 답례가 돌아왔다. 첨삭이 없을 때야말로 대가는 필요 없는데, 그건 그 나름의 성취감을 대신한 축배였음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받은 즉시 그 앞에서 함께 마셔왔다. 동시에 캔을 땄다. 대개는 캔커피였지만 차나 주스일 때도 있었고 탄산음료일 때도 있었다. 이상한 신제품 음료를 들고 오기도 했다. 화려한 패키지는 정말 수상했지만 어쨌든 이것 또한 마셨다. 무얼 마시든 딸깍 캔 따는 소리를 들으면 이부키 아이는 소리 없이 바람만 빼며 히죽 웃었다. 양 입술 끝을 길게 끌어당겼다. 어지간히도 기쁜가 보다 하다가 익숙해졌다. 종내는 이부키 아이의 웃음에 캔 따는 소리가 덧씌워졌다. 딸깍. 모든 웃음소리가 딸깍거리는 쇳소리로 들렸다. 


그동안 이부키 아이의 머릿속에서 시마 카즈미의 취향은 점점 확고해져갔다. 원래 지명이라면 있었다. 시마 카즈미는 어설프게 ‘아무거나’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정확한 브랜드와 정확한 맛과 정확한 가격을 띤 구체적인 제품이 존재했다. 적당한 가격대에 자판기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며 그럭저럭 무난한 맛을 자랑하는 제품이었다. 차라리 ‘아무거나’가 나았다. 어떻게 봐도 대외용이다. 남에게 부탁할 때 선뜻 말하기로는 모자랄 데 없는. 그리고 이게 이부키 아이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부키 아이는 우리가 남이야? 하고 생각했다. 적어도 체면치레하는 사이는 아닐 텐데. 기분이 상해 따져 물으려다가 곧바로 극복해냈다. 좋아, 대외용으로 말해준다면 진짜는 내가 찾아내야지. 자판기 앞에서 팔짱을 꼈다. 서너 가지 기계 안에 음료 종류가 많아서 마음에 들었다. 이걸 전부 시험해 보리라. 처음의 지명을 기본으로 하되, 이후는 이부키 마음대로 섞어버렸다. 탄산과 커피와 이온음료와 주스 등을 자유롭게 오갔다. 신제품이 들어오면 꼭꼭 뽑았다. 초동수사는 넓게 보라 했다. 시마 카즈미는 캔을 받으면서 어쩌다 한 번씩은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지만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다. 얻어먹으면서 불편한 소리 하기는 또 싫은 것이다. 정말로 괴팍한 것을 사왔을 때에만 한소리를 했다. 예를 들면 어린이용 과일향 무설탕 음료라던가.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가 백 퍼센트 음료로 보답하는 보고서의 통계를 내고 있었는데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의 음료 취향 통계를 내고 있었다. 뭐, 둘 다 원하는 결과를 보기는 했다. 이부키 아이의 통계가 훨씬 단순했다. 별, 동그라미, 세모, 엑스를 그리는 식이다. 엑스가 제일 많았다. 기어이 한소리를 하거나 눈썹을 찌푸리거나 마시는 속도가 더딘 것들은 전부 엑스였다. 엑스는 바로 제해버리면 되니까 쉬웠다. 덕분에 범위를 많이 좁혔다. 동그라미는 그럭저럭 반응이 좋은 것들이다. 시마 카즈미의 지명이었던 커피가 의외로 한복판에 있었다. 맛과 느낌이 비슷한 종류를 쭉 나열하면 동그라미다. 이런 맛을 좋아하는 구나. 일종의 안내선이 되었다. 선 안쪽으로 골라내면 대체적으로 동그라미가 맞았다. 가장 애매한 건 세모였는데 뭐 여타할 반응을 보이지 않아 일괄 보류상태다.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포기하지 않고 확실해질 때까지 들이미는 게 이부키 아이 스타일이기도 해서 숫자는 여간해서 줄지 않는다. 아직 뽑아보지 못한 미지의 음료 또한 세모의 영역에 있다. 

별은 아직 못 찾았다. 무엇이 별이 될지 기준이 될 만한 지표조차 없다. 동그라미 말고, 좀 더 핑- 하고 오는 그거 있잖아. 이부키 아이가 설명하자면 그거다. 별을 찾으면 이 수사는 끝이 날 것이다. 이부키 아이는 최대한 천천히 진행하고 싶었다. 단순히 별을 찾는 것만이 목적이 되지 않도록. 물론 이 과정에서 이미 처음의 목적에서는 크게 빗나가버렸지만. 문서를 봐 준 데에 대한 답례였었다. 아무렴 어떠랴. 탈선은 늘 있는 일이라 별일 축에도 안 들었다. 그보다는 이쪽이 더 재밌기도 했다. 지갑에 동전이 부쩍 늘어났다. 넘쳐서 닫히지 않을 지경이 되어 주머니에도 몇 개 찔러 넣었다. 동전이 부딪혀 분주소에선 내내 쩔꺽거리는 소리를 내고 다녔다. 분주소 내의 누구든 이부키 아이가 다가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러다 뛸 때는 동전 몇 개 흘리기도 하고. 달려온 길을 되짚어 동전을 찾는 수색에 시마 카즈미도 동원되었다. 허리를 굽히고 길을 살피며 시마 카즈미는 개에게 방울을 단 격이라고 했다. 불평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었다. 방울을 다는 건 고양이지. 이부키 아이가 정정했다. 하지만 이부키 아이는 어느 모로 보나 개였으므로 최종적으로는 개에게 방울을 단 격이 되었다. 결국 삼백엔은 영영 잃어버렸다. 삼백엔이면 음료를 두 개는 뽑겠다.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그럼에도 주머니엔 계속 동전이 들어갔다. 발걸음마다 쩔꺽거리며. 


주머니에 방울을 단 이부키 아이가 자판기 앞에 섰다. 허연 전등 아래 줄지어 선 음료들을 보다가 엉뚱한 생각만 아래로 툭 떨어져 버렸다. 철컹 소리라도 나는 것 같아 내려다 봤는데 음료 배출구는 당연히 텅 비어 있었다. 빨간 램프들만 눌러줄 손끝을 기다리며 반짝거렸다. 동그랗고 빨간 불을 쭉 둘러보았다. 오늘은 단 것 말고. 우롱차로 해야겠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철컹 철컹 떨어지는 소리가 서로 부딪혀 공간을 뒤흔들었다. 캔은 두 개를 뽑으니까 철컹, 철컹이다. 이부키 아이의 것이라고 해서 다른 걸 뽑지는 않는다. 늘 같은 것으로 두 개다. 차가운 캔을 잡는데 아까 떨어뜨린 생각도 덩달아 같이 잡혔다. 물방울처럼 동글동글하게 맺혀 있었다. 버린 생각이 아니었다. 캔의 표면을 따라 더듬거렸다. 물방울 알갱이 하나를 훔치며 이건 오늘 처음 뽑았다고 생각했다. 두 개째를 훔치며 하지만 차 종류는 대부분 동그라미 안쪽이었다고 생각했고 세 개째에는 이부키 아이는 이걸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같은 우롱차 중에선 약간 비싼 편이라 이부키 아이도 먹어본 적이 없지만 이부키 아이의 혓바닥 위에서 우롱차는 전부 같은 맛을 낸다. 그리고 네 개째에 현재 시마 카즈미와 제 관계가 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뽑는 자판기의 음료들은 모두 축배의 성질을 띠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흐름의 자화자찬이었다. 괜찮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짧은 기간 별일이야 다 있었지만 이부키 아이 경찰 인생에 어디 이만한 파트너십을 구축해 보았겠는가. 이것 또한 캔음료처럼 동그라미로 분류해 마땅하다. 그러다 다섯 개째를 훔쳤다. 손바닥 온도에 미지근해졌다. 이부키 아이의 등급제에서 동그라미는 최상이 아니다. 그는 별을 찾고 싶었다. 물론 동그라미도 좋다. 하지만 별이 가장 좋았다. 주머니가 비었다. 캔 두 개를 양쪽에 하나씩 쑤셔 넣었다. 불룩하다. 무겁게 출렁거렸다. 이부키 아이는 방울 소리 없이 사뿐사뿐 걸어 돌아갔다. 시마. 이번엔 내가 뭘 뽑아왔는지 봐봐.




캔맥주를 따면서도 이부키 아이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마 카즈미는 저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테이블에 앉은 건 시마 카즈미 혼자다. 여긴 그의 집이고 그는 목욕 후에 깔끔하게 맥주 한 캔 때리려는 중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으로서 이 자리에 이부키 아이가 있으면 큰일 난다. 그럼에도 이부키 아이는 함께 웃는다. 이건 시마 카즈미의 뇌리에 저장된 이부키 아이의 환청이다. 쇳소리를 내면서 걷고 쇳소리로 웃는, 도합 백육십엔 동전 모양 방울을 단 개의 환청. 알루미늄 캔의 환청은 거듭되다가 급기야 유령 같은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개는 짤깍거리면서 시마 카즈미를 따라오고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와 온 방을 돌아다닌 끝에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시마 카즈미가 맥주캔을 딸 때마다 웃는다. 아마 통조림 깡통을 따도 환청은 웃었을 텐데 차마 그것까지는 시험해 보지 못했다. 정말로 그랬다간 왠지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맥주를 병맥주로 바꿔버려야지. 오프너로 병뚜껑을 따면 개의 환청도 사라질 것이다. 시마 카즈미는 자주 벼르지만 계획 또한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그는 매번 캔맥주를 산다. 바코드 소리와 더불어 딸깍이고 짤랑거리는 환청을 끌고 온다. 어쩔 수가 없다는 듯한 태도로 캔맥주를 사는 것부터 이미 이부키 아이의 환청에게 한 수 접어주고 있다는 걸 안다. 

어디까지나 집안에서 애지중지 키우며 그가 들어오거든 반기는 애완견이 아닌 밖으로부터 시마 카즈미를 따라 들어오는 개였다. 들개라는 이미지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쓰다듬어 주기라도 해야 할까. 손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로지른다. 실제가 있었어도 좋았겠다. 생각하려다 손만 빠르게 내저었다. 너무 나갔다. 시마 카즈미가 느끼는 바를 말했더라면 이부키 아이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을 것이다. 시마야말로 그렇게 웃잖아. 딸깍, 하고선. 도사리고 있던 기포를 얕게 터트리는 식으로. 


물론 시마 카즈미는 그에 대해 입도 벙긋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가 집에 소리로만 이루어진 개를 끌고 들어간다는 걸 몰랐다. 개는 둘 사이의 화제의 접시에 오르지 못한 채 분주소나 집에서만 딸깍이며 짖는다. 이부키 아이는 불확실한 별을 찾느라 알루미늄 캔뚜껑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자판기 속의 별은 이제 찾을락 말락 한다. 그건 그간의 동그라미가 아닌 아직 시험해 보지 않은 세모의 영역에 있다. 동그라미 사이의 교집합들을 묶으면 대강의 취향 파악이 가능한데 이부키 아이가 아직 뽑지 않은 세모들 중에 몇 개 있었다. 자판기 네 대분의 분량을 사지선다까지 줄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제품들보다 상대적으로 비쌌다. 동기까지 딱 맞아떨어진다. 퍼펙트. 이부키 아이는 삐딱하게 서서 박수를 쳤다. 이부키 아이가 또 해냈다. 지금의 수사는 만점을 받아야 마땅하다. 수사는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나날이라고 함은 비단 자판기가 처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부키 아이의 사적 수사는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은 뭐였더라. 노래였던가. 보통 범위가 넓은 게 아니었었다. 


동시에 네 번째에도 착수했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다. 우롱차 표면을 쓸며 생각 다섯 개를 훔쳐내던 그 밤에. 보통은 별, 동그라미, 세모, 엑스로 이루어진 등급제에서 단 하나의 별을 찾는 수사다. 네 번째는 조금 다르다. 이부키 아이와 시마 카즈미의 현재 썩 괜찮기만 한 관계, 즉 동그라미를 별로 만들기 위함이다. 별의 존재는 확실했으나 상상하는 모양이 불확실했다. 이부키 아이가 그리는 목표치는 매번 흔들거렸다. 모서리가 다섯 갠지, 여섯 갠지, 신뢰인지, 좋은 동료인지, 넘어서면 그것은 우정인지. 시마 그 녀석 좋은 녀석이지, 보다 높은 위치가 어딘지, 그는 거기서 무엇까지 해도 되는지. 시마 카즈미가 체면 계산 않고 서슴없이 좋아하는 음료를 말해줄 것인지. 어깨를 치다 손을 거둘 때 손톱이 귀 뒤를 스치거든 서둘러 거둬들이지 않아도 되는지.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들. 별의 외곽을 그리는 경계선은 어딘지. 어디까지 가면 과연 도달했다 만족할지. 별표를 그릴 수 있을지. 핑- 이 영 안 온다. 약간 헤매고 있다. 헤맬 때는 묻는다. 자고로 질문이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저기 시마쨩. 우리 사이가 여기서 더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레벨로 스텝 업,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봐.” 


시마 카즈미는 대놓고 난색을 표했다. 그는 매일 제 집에 따라 들어오는 알루미늄 소리의 개를 떠올렸다. 되레 찔려 자연히 예민해지고 날이 섰다. 


“여기서 뭘 더? 됐어.” 


아이쨩이 살짝 상처받을 정도로 단칼이었으나 시마 카즈미도 현재 그들 사이가 과하게 괜찮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부키 아이는 노련하게 언어가 아닌 뉘앙스에서 추진력을 얻었다. 상처는 자가수복했다. 여전히 복구가 빠르다. 그는 튼튼하니까. 원하는 말만 건져 삼키고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시마도 괜찮다고 생각할 줄 알았어.” 

“지금 얘기 어디에 그런 면이 있었어? 그냥 기수 파트너로서 무난하다, 정도지.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데서 약간의 성장을 이루어낸 거고.”

“난 다 알아. 그리고 이제 ‘무난하다’로는 부족하네~”

“뭘 안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런 일에 진취적일 필요는 없어.”

“진취적?”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이룩한다는.”

“적극적. 맘에 들어.”


핸들을 두드렸다. 기분 같아선 클락션 두드리겠는데 기수 차니 참는다. 답이 나온 건 아니지만 묻기를 잘했다. 일단 채용했다. 여러 번 되뇐다. 진취적, 진취적. 그래, 진취적으로. 불이 잘못 붙었다. 지금 한 얘기 다 버리고 꼴랑 그것만 채용? 시마 카즈미는 대화의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온몸을 축 늘어뜨렸다. 늘어진 몸에선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지친 의사가 비죽 흘러나왔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이부키 아이 귓바퀴가 번뜩 선다. 시마 카즈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이부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그거다. 맘껏 해라. 좋을 대로 왜곡되었군. 시마 카즈미는 더욱 깊은 포기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로 한다. 그전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찌그러뜨렸다. 햇빛이 눈이 부셔서 그런지. 노랗게 창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그러했던지. 와르르르르. 떨어지고 굴러간다. 여러 번 깜박거린다. 지금은 포기를 하고 있다. 이부키 아이의 방종에 대해. 포기의 순간이 이렇게 찬란해서는 안 된다. 이부키 아이가 거쳐 왔던 숱한 부서들은 절대 이런 예쁜 광경을 보며 이부키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끝에 그러면 뭐 어때, 하는 생각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시마 카즈미의 포기는 방임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 방임에는 저마저 끌려가게 되어 있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꿔야 한다. 동조다. 두 번 바꾸고 나니 그네들의 포기에선 저만치 멀어졌다. 멀어진 곳에서야 개가 다가와 까맣고 축축한 코를 손끝에 들이민다. 환청은 익숙하다.


“이부키. 혹시 지금 주머니에 동전 들었어?”

“설마 시마쨩…. 나한테 삥 뜯으려고? 경찰아저씨, 도와줘요!”

“네가 경찰이야.”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모른다. 환청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싶어 시마 카즈미는 이번에야말로 끙, 하고 드러누웠다. 이부키 아이가 깔깔 웃는다. 딸깍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남은 건 4지선다. 기회는 무한대. 지갑과 주머니엔 동전이 가득하다. 넣을 수 있는 코인이 이렇게나 많다면 암만 바보라도 실패할 수 없다. 게다가 운까지 좋은 편이었다. 이부키 아이는 4지선다 중 두 번째에서 별표의 순간을 맞닥뜨리고 만다. 조금 높은 가격대의 따듯한 캔. 체온과 흡사한 온기를 건네자 시마 카즈미의 눈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그마한 놀라움을 딛고 미세한 기쁨이 자르르 퍼져나간다. 캔의 온기가 옮아간 듯하다. 주변의 공기가 부드러워진다. 좋아하는 음료를 받은 직접적 기쁨이 아니라 랜덤으로 굴러 나오는 이부키 아이 발 깜짝 선물에서 뜻밖에 좋아하는 게 나온 기쁨이다. 그리고 찰나에 가깝게 갈무리했다. 수렴하고 수렴해서 점만큼 작아지더니 도로 눈으로 돌아갔다. 티가 거의 나지 않아서 이부키 아이처럼 집요하게 보지 않는 이상 못 알아차렸을 테다. 드디어 이부키 아이는 별표를 쳤다. 핑- 하고 오는 거, 바로 이거다. 캔은 두 개를 뽑았으니 이부키 아이의 손에도 하나 있다. 제 몫의 캔을 냉큼 땄다. 모든 캔 따는 소리가 똑같으련만 유독 경쾌하게 들렸다. 별표라서 그렇다. 별표는 유일하고 특별하니까.


“시마쨩 그거 좋아하지.”

“어? 딱히. 왜?”


시마 카즈미는 시침을 뚝 뗀다. 모르쇠하고 마신다. 


“아니. 나도 좋아서.”


이부키 아이는 계속 웃는다. 깡통 안으로 희열을 왕왕 뱉는다. 이부키 아이! 잘했어! 소리는 시마 카즈미가 듣는 알루미늄의 환청과 비슷해진다. 목구멍에 파도처럼 꿀떡꿀떡 넘어가는데 맛은 솔직히 모르겠다. 이부키 아이가 느끼기엔 여타 동그라미들과 다를 것 없다. 그는 이런 짙고 깔끔한 맛을 선호하지 않는다. 복잡한 맛을 좋아한다. 여러 가지 향과 감미료와 단맛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맛을 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좋은 척한다. 선호하지 않다 뿐이지 엑스까지는 아니고 맛과는 상관없이 좋은 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것들이 중첩되어서야 깨닫는다. 중첩은 메아리치고 깡통 속에서 흔들려 부딪히다가 이부키 아이의 머리를 때린다. 핑- 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온다. 훨씬 묵직하다. 뎅, 에 가깝다. 종이 울린다. 깡통 속에서도 깊은 진동이 숨어 있었다. 울려서 가마 바로 아래가 간지러웠다. 이부키 아이는 혓바닥을 내밀어 마지막 방울까지 빨아먹었다.


세 번째 수사와 네 번째 수사의 엔딩은 동시에 왔다. 진취적으로 목표 삼을 그림이 뚜렷해졌다. 아니 반대다. 뚜렷한 그림 자체가 없었다. 자꾸만 별의 모양을 찾고 그림을 그리려고 해서 헤맸던 거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은 그 모양이 없다. 이부키 아이는 A4용지 위에 별을 그린다. 손을 한 번도 떼지 않고 그릴 수 있다. 꺾고, 꺾고, 꺾고, 꺾어서. 꼭짓점에서 잠시 멈춘다. 시마 카즈미는 그저 어깨너머 저 낙서가 이부키 아이가 야심차게 쓰겠다던 보고서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꾹 누르고 나면 그 다음은 자유롭게 활보한다. 마구잡이로 긋는 선이 그가 그린 별을 모두 덮어씌운다. 집어삼킨다. 윤곽선을 전부 무너뜨리고 싶었다. 엉망으로 만들고 규칙을 어지럽혀서 유일한 예외가 되고 싶었다. 선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종이가 긁혀 찢어진다. 찢어져 벌어진 사이로 귀를 기울인다. 아무 거리낌 없이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종이가 밤처럼 새카매지고 이부키 아이는 뭐라고 부를지 겨우 정한다. 시마 카즈미가 묻는다. 보고서라 부르진 않을 거지? 내내 시마 카즈미가 이부키 아이더러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했었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단어와 정의의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안에서 겨우 골라내야 했다.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하나를 꼽는다. 꼽으면서도 고개를 흔든다. 확신은 부족하다. 그래도 이게 제일 가까울 것이라 믿는다. 비록 확신이 부족해도 용기는 있다. 퇴근하는 시마 카즈미의 다리를 붙들고 매달릴 정도로는 있다.


“시마. 나도 데려가줘.” 

“아? 어디에?”

“이 세상 끝까지.”

“너랑 왜 이 세상 끝까지 가.”

“사랑하니까!”


이부키 아이에게 이 세상 끝은 시마 카즈미의 집이다. 갑자기 인생에 크고 길고 새카맣고 무거운 추를 달게 된 시마 카즈미가 경악을 한다. 환장하겠다. 이유를 물으니 이부키 아이는 기꺼이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는 감정과 단어들 중에 최상급은 사랑이었다. 그래서였다. 붙인다면 당연히 최고를 붙여야만 했다. 이부키 아이가 느끼기에 비록 그동안의 ‘뀨~’가 붙는 사랑과는 많이 다를지언정. 그래서 데려가 달라고 했다. 종이 하나를 새카맣게 덮은 끝의 결론이다. 시마 카즈미는 역대 최저치의 엉망진창인 보고서를 받아버렸다. 연대책임의 이름하에 시마 카즈미에겐 첨삭할 권리가 있다. 초침이 한 바퀴 돈다. 조금 더 넘는다. 그동안 이부키 아이는 움츠리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다. 매달린 손에 힘을 준다. 무릎에 정수리를 비빈다.

이부키 아이가 숙이고 있던 목을 쳐들어 올려다봄으로써 아슬아슬하게 결론이 난다. 길 잃은 개의 눈빛. 시마 카즈미는 그가 초침이 한 바퀴 넘게 돌 동안 다듬었던 첨삭을 죄 놓쳐버렸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길을 잃는 경찰이란 없다. 그것이 기동 수사대라면 더욱 그렇다. 형사면서, 그게 뭐야. 세상에 길 잃은 개 앞에 야멸찬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시마 카즈미는 아니다. 이미 이부키 아이의 웃음소리가 이부키 아이보다 먼저 왔었다. 









02 개가 말하네 



이부키 아이가 안경을 두고 갔다. 예의 그 멋내기 안경이었다. 혹은 선글라스, 절충해서 색안경. 없어졌다며 온갖 유난을 떨다가 낙담하던 모습이 벌써 지난주다. 그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때때로 소리 지르며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더랬다.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콘솔 박스에 무릎을 쾅쾅 박았다. 매우 아끼던 것이라고 했다. 사실 시마 카즈미로선 이부키 아이가 잃어버렸다던 안경과 쓰고 있는 안경과의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안경테 모양이 달랐던가, 안경알 색이 달랐던가. 이부키 아이는 장담컨대 전부 다르다고 했다. 전부 다르기 때문에 전부 아꼈다고 했다. 틀린 그림 찾기를 잘 해 봤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라 시마 카즈미는 괴로워하는 이부키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 덕분에 이부키 아이는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상실감을 누렸다.

그것 봐라. 틀린 그림 찾기와 진상은 전혀 관계가 없지. 그 안경이 여기에 있다. 시마 카즈미의 안경일 리는 없으니 이부키 아이의 안경이 맞았다. 안경은 시마 카즈미가 출근 준비를 하던 중 신발장 위에서 발견했다. 매일 몇 번이고 더듬거리며 지나왔을 위치였다. 그 자리가 늘 제자리였던 양 안경은 뻔뻔하게 놓여 있었다. 이부키 아이 본인이 곱게 접어 올려두고선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그렇게 아꼈다면서 시마 카즈미의 집에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선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았고. 찾고 나니 안경알 색은 흐린 파란색이었다. 곱게 놓인 그대로 말아 쥐어 주머니에 넣었다. 장난으로라도 써 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네가 두고 갔으니 찾으러 오라는 말은 더더욱 할 수가 없어서 시마 카즈미가 직접 가져다주어야 했다.


“이부키. 네 거야.”  

“내 안경!”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다 싶어 승차와 동시에 옆자리에 넘겨주었다. 제 안경을 알아보자마자 이부키 아이는 와락 달려들었다. 어찌나 반겼는지 열손가락이 다 벌어졌다. 숫제 상봉이라 할 만 했다. 허나 반가운 마음은 잠시뿐이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안경알부터 살폈다. 어디 시마 카즈미가 모를 흠집이라도 났을까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감정하는 금은방 주인을 흉내내는 중이었다. 백 번을 돌려 봐라, 그리 얌전히 놓여있던 안경 부러지기라도 했을라고. 한참 봐서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이부키 아이가 물어보았다. 


“왜 시마가 가지고 있었어?”

“…훔쳤다. 왜.”


순간 할 만한 대답이 마땅치 않아서 시마 카즈미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네가 우리 집에 두고 갔어. 라고 하려니 앞니 뒤쪽이 영 걸근거리는 게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부키 아이가 눈치 없이 더 캐물어 본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홧병이라고 하리라. 다행히 이부키 아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더니 이미 쓴 안경 위에 안경을 하나 더 걸치는 걸로 넉살좋게 받아넘겼다. 연기 축에도 못 들 놀라는 척이었다.


“어머, 도둑이야.”


이부키 아이가 너무 잘 받아넘기는 바람에 오히려 중간에 벌어졌던 침묵이 도드라졌다. 안경이 두 겹. 까맣고 파랗게 겹쳐져 탁한 어둠이 깊었다. 이부키 아이의 침묵은 그런 류의 교집합이었다. 절대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어색함 말이다. 벌어진 간극이 잠시나마 그가 집중해서 생각했음을 말해주는 듯해서 더욱 그랬다. 마침 오전 9시 정각이었다. 시마 카즈미는 억지로 시동을 걸었다. 옆에서 허겁지겁 무전기를 드는 모습을 흘려 넘겼다. 

이부키 아이의 이 성실함은 약 삼십분 정도 지속되었다. 직선 도로를 달리며 저들과는 거리가 한참 먼 무전을 넘기고 나니 금세 산만해졌다. 안경을 흔들어댔다. 역시 아침에 주지 말 걸 그랬다. 장난감 선물을 생일보다 이르게 아이 손에 넘긴 부모의 후회와 비슷한 감정을 맛본다. 이부키 아이는 손에 남는 안경을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접었다가 폈다가 돌렸다가 불었다가. 다시 접었다가 폈다가 돌렸다가 붙였다가. 반복.


“두 개가 되서 어쩐다.” 

“다다익선이잖아. 좋을 대로 하고 다니던가.” 

“그거 좋은 생각.” 


이부키 아이라는 인간의 시스템은 단순하면서도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로 꽉 차있고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 있어서 꼭 농담으로 들어라 싶은 기획안이 흔쾌히 낙점되기 일쑤다. 그래서 하루 온종일 이부키 아이는 안경 두 개를 달고 다녔다. 하나는 쓰고 하나는 옷에 달거나 했는데 옷에 매다는 축이 차라리 양반이었다. 그보다 더한 경우는 머리에 얹거나 안경 위에 안경을 얹는 기묘한 행색이었다. 색안경은 전혀 도움 되지 않을 흐린 날씨에 안경만 둘. 광대는 이부키 아이였지만 벌칙은 동행하는 시마 카즈미에게로 죄 쏟아졌다. 솔직히 창피했다. 이부키 아이가 영원히 차에서 내리지 않았으면 했다. 이부키 아이의 이런 꼴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게 아니라 이런 꼴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같이 쓸래? 라고 했던 상냥한 권유는 시마 카즈미가 극구 사양했다. 이부키 아이 혼자 안경 두 개를 쓴다면 광대 하나에 창피한 사람 하나로 끝나지만 공평하게 시마 카즈미까지 색안경을 나누어 쓰면 광대만 둘이 되고 만다. 404에 이상한 별명이 생기고도 남을 것이다. 거기까지 막 나가고 싶진 않은데. 솔직하게는 같이 걸쳤다가 커플템으로라도 보일까봐 싫은 게 더 컸다. 됐습니다. 가벼운 권유에 강경한 거절이다. 이부키 아이는 아쉬워했지만 집요하게 나서서 강권하지는 않았다. 정수리를 슬쩍 긁고는 말았다. 그도 여기서 무언가 크게 잘못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걸 생각했음이다. 정말로 귀찮게 됐다. 굳이 입에 올려야 한다는 것 자체로 짜증이 났다. 


“이부키. 너 그렇게 하나하나 생각하지 마. 안 어울려.”

“생각 안 하거든요.”


입 안 가득 빵을 물고 있어서 한참 저 밑에서 우물거리는 목소리였다. 먹는지 말을 하는지 성의 없이 뭉개는 방법이 상당히 마음에 들어 시마 카즈미는 바로 따라했다. 이부키 아이가 흉내 내지 말라 했지만 벤치마킹이란 방패로 거뜬히 막아냈다. 그래서 유치한 대화는 몹시 성기고 어물어물하게 연신 빵을 허겁지겁 씹어 삼키며 이어졌다. 크림과 말이 뒤섞이고 함께 넘어가 입이 꽉 틀어 막혔다. 대체로 그 모냥을 말하자면 별스럽고 쫌스럽고 궁상맞았다.  


“완전 심경 복잡한 거 다 보이거든요.”

“시마가 무신경한 바보라서 그런 거거든요.”

“피차 거긴 무신경하기로 했으면서.”


기어이 협약을 입에 올리고 만다. 크림 범벅으로 미끌거리는 봉지를 구겼다.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더니 미처 닿지도 못하고 앞에서 툭 떨어졌다. 주우러 가는 시마 카즈미를 보며 이부키 아이가 깔깔거렸다. 신나게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인생 참 즐거워서 좋겠다. 하지만 그쪽이 훨씬 어울렸기에 시마 카즈미는 당면한 손가락질을 감내했다.

이부키 아이가 안경을 잃어버린 지는 일주일 됐다. 이부키 아이와 시마 카즈미가 헤어진 지는 삼일 됐다. 잃어버린 안경은 일주일 만에 찾았다. 헤어진 후의 파트너 사이에서 거리 감각을 되찾기까진 며칠이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의 소지품을 제 집에 두고서도 일주일이나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제 집에서 이부키 아이의 소지품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차마 말하지 못한다. 이부키 아이는 가벼운 마음으로 권유하거나 더 캐물어도 괜찮을 만한 안전거리를 잃어버렸다. 언젠가는 다들 멀쩡해질 테지만 그 조정은 더디다. 이부키 아이의 안경 두 개가 부딪혀 덜걱거린다. 자르륵. 웃음소리를 닮았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안 해야 한다. 시마 카즈미는 핸들에 이마박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간 후에 이부키 아이 핸들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 버티는 걸 봐버렸다. 아, 한심하게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키쿄 유즈루의 말이 맞았다. 형사는 연애대상으로서 만날 것이 영 못 되고 본인이 형사라면 더욱 그렇다. 시마 카즈미는 그간 사내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봐서 몰랐다.(핑계다. 키쿄 유즈루라고 뭐 해봐서 알았을까.) 사내연애의 많은 장단점을 포괄해서 총평하자면 엿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엿 같은 부분을 말하자면 헤어진 후였다. 고작 한 달의 연애로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그래, 그들은 꼴랑 한 달 사귀었다. 한 달로 퍽이나 인생사 개똥철학 통달했다 싶지만 짧고 굵은 연애였다. 얼마나 굵었느냐, 폭풍 같았던 연애가 지나가자 둘의 간격 안에는 순 폐허만 남았다. 그야말로 풍비박산이다. 풍비박산의 폐허를 쓸고 닦고 새 지붕을 세워야 한다. 그 전에 일단 바리케이트를 둘러야겠다. KEEP OUT. 출입금지. 

연애를 한 계기를 꼽자면 그 숫자만 양 손가락으로 세도 모자라고 태산에 쌓을 만큼 허다했는데 막상 헤어진 계기를 꼽아보려니 손이 멈췄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 둘은 사귀나 안 사귀나 이런 사이였다. 엔간해서는 지는 걸 싫어하고 말꼬리 하나를 질질 늘어뜨리고 사슬처럼 꼬리에 단어를 물고 물어 손가락질 하다가 이윽고 퉤, 퉤, 너랑 안 논다, 따위의 저열한 언어로 가속을 더하는. 퇴근과 비번, 휴일이 종을 치는 제한시간이 사라졌을 뿐이다. 길어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했더니 글쎄 종점이 이별이더라. 종점입니다. 더 연애하지 않을 사람은 이만 내리셔야 합니다. 쫓겨나는 것처럼 내려야 했다. 실제로는 이부키 아이만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당시 콜로세움이 시마 카즈미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홱 열린 문으로 찬바람만 서늘하게 들어왔다. 꼭 그렇게 웃더라. 소리도 없는 웃음으로. 시마 카즈미는 생각했다. 

이부키 아이의 성질머리는 열전도율이 너무 높았고 시마 카즈미는 남의 성질 긁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그가 또 성질 차가운 것도 아니라. 한 마디로 끼리끼리 만났다. 헤어져, 를 먼저 입에 담는 건 9할 정도가 시마 카즈미였다. 하지만 곧바로 아 그래? 헤어져! 하나도 안 아쉽거든요. 하고 받아치는 건 이부키 아이이기 때문에 잘잘못을 가리는 저울은 균형을 맞추고 판사는 공정한 망치를 내려친다. 쌍방과실. 사귄지 한 달 찍던 그 날 분노의 표출 수단으로만 남용하던 어깃장은 기가 막히게 실현되었다. 말 바꾸기 없기다. 진짜 헤어지든가. 맘대로 해. 나중에 울고불고 빌지나 마. 웃기고 있네. 언어는 기가 막히게 퇴행해서 7살 유아도 안 쓸 만한 유치한 욕을 있는 대로 내뱉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분을 삭인 다음다음날 아침 분주소에서 만나고 마는 것이다. 시마 카즈미는 사내 연애의 엿 같음을 바로 이 날 체감했다. 동시에 이부키 아이의 얼굴에서도 낭패가 짙게 서렸다. 와우. 이 순간에 대해선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음이다. 멍청이들이었다. 둘 다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 일의 시발점은 고작 계란후라이였더랬다. 완숙이냐 반숙이냐 소금이냐 간장이냐 라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좋은 아침입니다아.”


비록 유치한 언어를 일삼으며 헤어졌어도 어른은 어른이었다. 시마 카즈미는 천연덕스럽게 인사하고선 일과를 위해 천연덕스럽게 돌아섰고 이부키 아이가 온 몸을 비비꼬아가며 붙었다. 순간적으로 놀라긴 했지만 시마 카즈미는 사내연애 말로에 선 제 태도가 그럭저럭 타의 귀감이라고 생각했다. 이부키 아이는 어른은 맞지만 그냥 바보였다.


“헤이. 시마. 이거 누구야. 나랑 헤어진 시마쨩 아냐. 발은 뻗고 자셨나?”

“시끄러. 숙면했어.”

“에헤이….”


탄식이다. 다리를 꼬며 비틀거린다. 아직 앙금이 남아있는지 시마 카즈미의 숙면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부키 아이는 사귀기 전에도 헤어지기 전에도 멍청이였으므로 이 상태가 평소와 똑같은 텐션이었다. 오히려 뻣뻣하게 굴었더라면 시마 카즈미가 기겁해서 기절했을 것이다. 일할 시간이었다. 바보 같은 개를 데리고 갔다. 새 관심거리를 던져 주면 금방 신이 나서 킁킁거렸다. 물어와, 했더니 잘만 물고 왔다. 사건 현장에서 찾을 건 다 찾아놓고 정작 제 안경은 찾지 못해 불안하게 다리를 들썩거렸다. 적어도 헤어진 것 보다는 사라진 안경이 더 중해 보였다. 아예 관심사가 옮겨간 것처럼. 사내연애였지만 그나마 얘랑 연애했어서 다행이었다. 시마 카즈미는 낙관했다. 약 6시간의 낙관으로 이부키 아이가 저녁 휴식시간에 본격적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전까지 그랬다. 밥상머리에 연애 얘기라니, 아주 입맛 뚝 떨어지는 선택이었다. 심지어 이부키 아이는 이 대화의 장을 대충 대 우동 토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촌스러웠다. 올라탈 마음이 전혀 안 생겼다.

시마 카즈미가 이부키 아이의 촌스러운 네이밍에 딴죽을 거는 것으로 계란후라이로 출발했던, 아무 이유 없는 싸움의 제 2라운드가 진행되었다. 싸움이라기 보단 엄숙하고 치열한 협정에 치우쳐 있었다. 이부키 아이가 대 우동 토론이라 이름 붙일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차 이별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사후 처리에서 의견이 갈렸다. 시마 카즈미는 이 상태 그대로 좋다고 했다. 24시간 얼굴 맞대고 어색해 죽는 것 보단 훨씬 나았다. 하루 종일 일적으로 붙어있어야 한다는 사이란 걸 생각 못한 건 불찰이다. 불찰은 업보로 감당할 테니 폐허는 폐허대로 바리케이트를 친 채 덮으면 된다. 이 자리에 흑역사의 비석을 세우면 더 그럴듯하겠다.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가 피도 눈물도 없고 가슴속에 하트도 없고 매정하다면서 몰아붙였지만 그라고 딱히 괜찮은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부키 아이는 특히 시마 카즈미가 이부키 너 되게 구질구질한 편이구나. 라고 했을 때 발끈했다. 아 그래 시마는 쿨해서 좋겠어. 여기서 서로를 비방하느라 대화는 많이 헛돌았다. 결국 뭘 원하냐 했더니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별 장면이었다. 시마 카즈미가 여기기에 아주 꼴값인 새벽 2시 ‘자니…?’ 류의 퍼포먼스를 포함해서. 시마 카즈미는 젓가락을 들고 띄엄띄엄 짓이기듯 말했다. 


“들어둬. 앞으로 이부키 너랑 나 사이에 찍을 장르 중에 멜로나 신파는 없어. 공포, 스릴러, 액션 중에 골라.” 


반쯤은 박력에 눌려 이부키 아이는 액션을 골랐고(그것도 블록버스터) 형태가 있는 마무리가 필요하다는 의견만 시마 카즈미에게 가까스로 접수되었다. 어디까지나 협정이니까. 제대로 된 마무리 겸 협정사인은 우동그릇 위로 드리운 악수로 끝났다. 더 이상은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자는 약속이기도 했다. 정중하게 손을 내밀어 감싸 쥐고선 흔들었다. 막 들어오던 진바 코헤이가 뭣도 모르고 박수를 쳤다. 진바 씨, 사진 찍어줘요. 사진. 지금. 빨리, 빨리. 내 폰으로. 애인일 때 찍은 사진은 없었는데 마지막이라고 사진 한 장, 아니 데이터 한 조각이 남았다. 악수한 채 입 활짝 찢어가며 웃는 이부키 아이와 영 찝찝한 표정의 시마 카즈미였다. 진바 코헤이가 필터를 잘못 선택해서 지나치게 윤곽이 부드럽고 뽀샤시했다. 




이로써 시마 카즈미와 이부키 아이는 명실상부한 구 애인이자 현 파트너가 되었다. 혹시 모를 이동을 이용한 도피 가능성은 끝까지 함구했다. 어설픈 협정까지 해 가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아무렴 그게 연애보다야 훨씬 중했다. 

한데로 묶여 있던 각자의 사생활은 이제 언급 금지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박살나 폐허 안에 묻혀 있던 것이 그것이었다. 거기서 시마 카즈미는 잃어버린 이부키 아이의 색안경을 발굴하고, 냉장고 속 2인분의 식량을 천천히 먹어치웠다. 2인분의 맥주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캔도 주지 않으리라. 이부키 아이의 집 냉장고에도 똑같은 양의 식량과 맥주가 있을 테니 양심에 찔릴 일도 없었다. 각자의 몫을 흥청망청 즐기면 된다. 혹여 도가 넘는 휴일 전후 안부인사 일까봐 망설이는 이부키 아이를 비웃었다. 바보. 우리는 그 전에도 그 정도 얘기는 했었어.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입조심하느라 입술이 남아나질 못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여분의 칫솔과 속옷을 죄다 내다 버렸다. 이건 정말로 돌려주다간 죽을 것 같았으니 버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휴일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뉴스를 틀어놓은 텔레비전은 혼자서 딱딱한 말을 했다. 엎어놓은 책은 책갈피 채로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소파에서 다리를 쭉 펴고 드러누웠다. 그러다 발끝에 걸리는 게 있어 꺼내 봤더니 열쇠더라. 오토락인 시마 카즈키의 것도 아니고 하물며 차키는 더 아니고 이부키 아이의 집 열쇠였다. 한숨을 쉬었다. 이건 분실물이 아니다. 이부키 아이가 시마 카즈미에게 복사해 준 열쇠다. 그날 문을 박차고 나가던 이부키 아이 등짝에다 던져주었어야 했는데.


“네 거야.”

“흐음…. 내 거?”


일전의 교훈이 있었으므로 반환 시간은 퇴근 직후가 되었다. 헤에. 이부키 아이는 약간은 놀라워하면서도 동시에 떨떠름하게 열쇠를 받아들었다. 본의 아닌 깜짝 쇼를 거듭했더니 그런가 보다. 식상한 거지. 색안경처럼 아끼던 물건이 아니라서 반응이 빈약한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안경이 두 개 생겼을 적처럼 손을 어정쩡하게 들고선 갈 길을 잃고 헤맸다. 그 손을 좀 더 가볍게 해주고자 놀린 세치 혀가 그만 화근이 됐다. 안경 때는 잘만 접수했으면서 말이다. 여전히 이부키 아이의 머릿속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시마 카즈미는 순전히 스릴러적 관점에서 반환했음을 강조했다. 열쇠를 돌려주고 이부키 아이의 집에 침입할만한 가능성을 아예 없앰으로서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시 안전한 알리바이를 얻는 식이다. 직업이 형사고, 형사 드라마를 즐겨 보며, 파트너 죽이기의 이명을 단 전적이 있는, 스릴러 장르를 선택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가정이었다. 이부키 아이가 선택한 액션(블록버스터)에는 그런 장면이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의 꼼꼼한 태도가 징그러웠다. 특히나 자학에 가까운 엇나간 농담이 듣기에 매우 지랄맞았다.


“그럼 내 알리바이는?”

“당연히 비밀번호를 바꿨지.”


이런 점에서 말이다. 이렇게까지 철두철미해야 하나? 이부키 아이는 빈정이 상했다. 이 빈정의 심지는 매우 짧아서 화르륵 타들어가다가 폭탄 앞에 이르러 빠르게 폭발했다. 인내심은 전부 소진되었다. 못해먹겠네. 이제 됐다. 그만둘래. 양손을 든다. 그가 어디까지나 페어플레이를 준수하며 신사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제스처와도 비슷한데, 행동양상은 전혀 달랐다. 시마 카즈미가 그동안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 온 것을 이부키 아이는 서슴없이 깨뜨리기로 했다. 어차피 늘 헷갈렸던 것 지뢰고 뭐고 아무 생각 없이 전부 밟는 것이 나았다. 시마 카즈미도 이부키 아이더러 어울리지 않게 생각한다 말했었다.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터트리란 뜻도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원래 이부키 아이라는 인간에게 완만한 제어가 먹힐 리도 없지 않은가. 바리케이트를 걷어내고 발을 디뎠다. 불을 질렀다. 화약이 펑펑 터졌다. 그리하여 장르는 이부키 아이가 원하는 블록버스터로 돌아왔다. 


“시마.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는 거 알아?”

“아?”


이부키 아이는 스나이퍼가 아니다. 핀 포인트 저격은 무리다. 따라서 던지는 건 시마 카즈미의 전 범위다. X로 덮어버린 그 한 달을 포함한. 시마 카즈미가 못 알아들을 리는 없고 갑자기 들어온 싸움을 무시할 리도 없어서 그대로 치받았다. 그러는 너는 어떻고. 마법의 말이었다. 협정과 악수를 모두 폐기처분하는. 사용하는 언어가 저급해도 어른은 맞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연애란 생각보다도 비열하고 유치찬란하다. 어른이랍시고 인간적 성숙을 기대하기란 참 어렵다. 성숙은 다 얼어 죽었기 때문이다.


“냉혈한. 파란 피의 마인.”

“사람의 말로 해!”

“넌 멜로를 몰라!”

“넌 얼마나 알았다고 그래?”


네가 하는 멜로는 대부분 구렸어. 이부키 아이가 출입금지구역을 사정없이 밟아버리니 시마 카즈미도 어쩔 수 없었다. 헤어진 김에 영원히 묻어버리려고 했던 불만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예상 못하게 즉효성이었다. 시마 그거 맘에 안 들었었어? 이부키 아이가 어이없어했다. 당장 뒷목 잡을 듯 손까지 떨었다. 그건 그 나름의 혼신의 이벤트였었다. 그땐 아무 말도 안했으면서 지금 와서 이런다. 너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 따진다면야 이부키 아이도 할 말 많았다. 역시 대 우동 토론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그런 걸로 틀어막기엔 한 달은 너무 내밀한 시간이었다. 연애를 하기에는 짧지만 그 연애를 24시간 내내 붙어 꼬박 30일을 지속했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런 연애였다. 꼭 하나처럼 포개 누워 있던 것만 같던 나날들. 결국 그게 불안을 공유하는 것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지지부진하게 끌어당기는 손짓. 무릎을 굽히고 소파에 주저앉아 말없이 귀만 기울이던 침묵의 순간들. 폐허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마 카즈미가 불컥 짜증을 냈다. 시마 카즈미의 짜증은 이부키 아이가 느끼고 있는 감정 비슷한 선상을 걷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혼자 갖다 버리면서 울든가!”

“외로우니까 같이 가!”

“하?!”


그래서 같이 갔다. 큰 강 까지 차를 내달려서, 여전히 네 탓이네 내 탓이네를 떠밀어가면서, 그럼에도 절대 되돌릴 생각은 하지도 않고. 증거를 인멸하듯 내다 버렸다. 이부키 아이는 허리를 젖히고 크게 팔을 휘둘러 열쇠를 던졌다. 하나같이 맘에 안 드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상적인 형태였다. 열쇠는 큰 포물선을 그렸다. 시마 카즈미가 눈으로 쫓았지만 저 아래로 떨어지고부터는 궤적을 잃어버렸다. 작은 열쇠는 파동조차 없이 고요히 빠져들었다. 이부키 아이는 여전히 난간에 매달렸다. 팔을 포개고 턱을 괴었다. 그는 시마 카즈미가 잃어버린 모든 궤적을 다 뚫고 있는 듯했다. 저 밑바닥까지.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열쇠가 없어서 어떡해?”


얼뜨기 같은 질문에 시마 카즈미는 정말 바보 같은 걸 묻는다는 식으로 입을 쩍 벌렸다. 


“바보야? 문을 부수면 되니까 괜찮아.” 


봤는데 너희 집 문은 약해. 그가 어떻게 문을 부술지, 그래도 부수는 것보단 열쇠가 빠르지 않은지. 이런 상식적인 생각을 하려다가 이부키 아이도 순식간에 괜찮아졌다. 그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래서 그렇게 쉽게 헤어졌구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자 했다. 열쇠가 없고 비밀번호를 모르는 집으로 서로의 등을 떠밀었다. 싸움은 어쨌느냐면 아까 열쇠에 싸서 던져 버렸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다. 멍청이들.

우리는 그저 서로의 휴일과 사생활에 접근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침범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연애만큼 적절한 것이 또 없었다. 사생활을 완전히 겹쳐 놓고 난 다음에는 내밀한 속 알맹이가 가지고 싶어졌다. 손을 뻗고 달라 졸랐다. 남의 인생 하나를 온전히 거머쥔 한 달이 행복했는가? 진절머리 나게도 그랬다. 그게 이부키 아이의 것이라서 그랬다. 더 지속하지 못한 건 무서워서도 아니고 부담스러워서도 스스로가 병신 같이 느껴져서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말을 흐릴 수밖에 없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시마 카즈미와 이부키 아이가 이미 잊어버린 지 한참인 계란 후라이 때문에. 이 날 시마 카즈미는 현관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틀렸다. 삑삑 소리를 뻔히 들으면서도 억지로 문을 열려고 하다가 손을 멈췄다. 아 비밀번호 바꿨다고 말했지. 시마 카즈미는 그게 제가 이부키 아이한테 거짓말을 한줄 알았다. 진짜 바꿨지, 참.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더딘 실랑이 끝에 문을 열고선 바로 이전의 비밀번호로 되돌려 버렸다. 이부키 아이가 제 열쇠를 들고선 이미 버린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03 강아지 왈츠 



사기꾼이 제대로 판을 벌였단다. 규모가 워낙 커서 털린 사람만 해도 한 무더기였다. 심지어 한 무더기의 피해자들 진술이 서로 엇갈렸다. 남자다. 여자다. 나이가 들었다. 젊은이였다. 얼굴을 봤다. 친구였다. 길거리캐스팅인줄. 보이스피싱이었다. 야쿠자일걸? 이부키 아이와 시마 카즈미가 속닥거렸다. 이거 되게 익숙한 패턴인데. 그래 쓰레기 베리에이션 패턴. 그거 알지, 31가지 맛. 그렇게까지 다채롭진 않아. 숱한 목격담 속으로 사기꾼들은 자취를 감췄다. 처음엔 집단인 줄 알았다가 그 다음엔 한 사람인가 싶었다가 겨우 오늘에서야 남여 2인조였음을 알았다고 했다. 여기까지 두 달. 지지부진 했으나 특정하고 나니 그 후로는 일사천리로 속도가 붙었다. 문제의 2인조는 지금 신나게 쫓기는 중이고 이상이 404가 전달받은 사건개요다. 


“그러니까, 우리도 합류해서 잡으면 돼요?” 


이부키 아이가 발을 어쩌지 못하고 구른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다. 하지만 말이 아직 안 끝났다. 벼른 만큼 그쪽은 인원이 충분하다. 404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사기꾼 쫓는 일 보다는 좀 더 재미없는 일이었다. 이부키 아이 관점으로는 그랬다. 404는 집 수색에 동원되었다. 무슨 영장을 심부름 쪽지 주는 것처럼 준다. 집 주소가 있으니 가서 봐 달란다. 집을 거점으로 썼으니 뭐가 나오기는 나올 거라며. 이부키 아이 구르던 발이 점점 잔잔해진다. 뒤꿈치를 고정한 채 발가락만 들썩이다가 나올 땐 신발을 질질 끌었다. 온도차가 적나라했다.


그렇게 슬렁슬렁 굴러간 곳은 외관이 꽤 훌륭한 맨션이다. 사기꾼 거처 치고는 거창하지 않은가. 문을 딴다. 엿차,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인데도 이부키 아이는 크게 소리 내 인사를 하며 들어간다. 인사하는 것 치고는 제집인 양 발걸음이 거침없다. 앞으로 거하게 실례를 할 참이니 과연 인사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시마 카즈미는 조금 헷갈리지만 대충 이부키 아이를 따라 고개만 까닥거린다. 그런데 이부키 아이가 현관을 가리고 서서 집 안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부키 아이는 그 상태로 잠시 멈춰 있었다. 넋을 놓은 것도 같았다. 안에 끔찍한 뭐라도 있는지, 반대로 꼬리를 빼느라 텅 비어 있는지 광경이 상상이 안 간다. 시마 카즈미가 툭 밀고 나서야 이부키 아이는 떠밀리듯 거실에 들어선다. 휘파람을 흉내 내는 소리에 가깝게 훅 토해낸다. 훠우. 


“시마. 그 사기꾼 2인조. 그냥 단순한 2인조가 아니었어.” 


이부키 아이가 거실 쪽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집 내부가 보인다. 내추럴을 기조로 한, 튀지 않는 인테리어로 꾸민 멋진 집이었다. 흰색 러그, 좌식의 원목 테이블과 짙은 갈색의 매끈매끈한 가죽소파. 린넨 천을 씌워둔 안락의자. 크림색 시폰이 덧대어진 회색 커튼. 따로 무늬가 들어가지 않은 단색의 가구들은 전부 조화로웠다. 모두 산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새 것이었고 그래서인지 어딘가의 모델하우스를 통째로 들어 옮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생활감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이 잘 다듬어진 인위적 통일감와 꿈꾸는 듯 둥실둥실한 생활감이 공존하는 경우를 시마 카즈미는 한 가지 알고 있었다. 분위기를 좌우하는 결정적 소품은 소파 위 벽에 달린 액자였다. 사진으로 본 예의 2인조였다. 좋아 죽겠다는 듯 끌어안고선 카메라는 아랑곳 않고 서로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린 듯한 연인이었다. 납득이 갔다. 집이라더니. 여기는 완전히 사랑의 보금자리다. 


“허. 부부사기단이라고.”


이부키가 아이가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들어올 때부터 그는 이미 집안의 핑크빛 기류에 눌려 있었다. 정작 핑크색 가구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핑크색이라고 연신 중얼거렸다. 사기꾼 소굴에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오니 꺄꺄, 우후후의 도가니탕. 부부사기단의 마지막 사기에 정직하게 걸린 기분이다. 멀찍이 서서 담요 따위를 손가락 끝으로만 살짝 집어 뒤적거린다. 묻혀 있던 리모컨이 데굴 굴러 나온다.


“서류상은 둘 다 미혼이었어.”

“그럼 그건가. 동거.”


순진한 사람들 등쳐먹고 저들 집은 아주 신혼부부처럼 꾸며 놓으셨겠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마 카즈미는 티비장 서랍 뒤집는 데에 여념이 없다. 하긴 이쯤 어이가 없으면 마구 들춰 보는데 양심도 안 찔린다. 자그마한 앨범, 손톱깎이, 도장, 동전이 담긴 양철통, 건전지, 광고지 몇 장, 배달 책자 그리고 계약서. 겨우 볼만한 게 나왔다. 시마 카즈미가 계약서를 훑는 동안 이부키 아이는 테이블 쪽을 뒤진다. 뒤집는 손길은 퍽 소극적이 되었다. 이런 핑크빛 하우스에선 민망한 거나 안 나오길 빌어야 한다. 부디 이 거실에서 쓸모 있는 것이 잔뜩 나와 줘서 침실까지는 들어가지 않아도 되기를. 두 손 모아 빌지 않아서인가 소망은 하늘에 닿기도 전에 쓰레기가 되었다. 이부키 아이는 좌식 테이블 아래 선반에 비죽 삐져나온 콘돔상자를 집어 던진다. 아니 진짜. 이게 지금 나오면 안 되지. 깔끔하게만 보였던 새 소파가 순식간에 수상쩍어졌다. 이부키 아이는 손바닥을 여러 번 비벼 닦는다. 테이블 위에는 이름과 전화번호 몇 개 적어놓은 수첩이 있었고 수첩 안쪽에 스티커 사진이 끼어 있었다. 액자에 있는 예의 그 사람들이었다. 연인은 온갖 모양의 하트를 만들어가며 깜찍한 표정을 쥐어짜내고 있었다. 사진 배경에도 반짝이 효과와 하트가 난무했다. 행복해 보인다. 비록 무전 상으론 이미 잡혀 수갑을 찬 채 울고불고 손발 닳도록 싹싹 빌고 있지만. 어찌나 나불나불 잘 불던지 잡힌 이후 집수색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404가 찾아야 하는 게 아닌 챙겨야 할 목록이 실시간으로 갱신된다. 수색인지 심부름인지. 챙기는 김에 더 찾아서 챙겨오면 좋단다. 일단 잡은 시점에서 서에서는 말하는 게 아주 편해졌다. 덩달아 404의 수색도 힘이 빠졌다. 


“그러고 보니 우린 같이 스티커사진 찍은 적 없어.”


나름 할 만한 건 다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부키 아이가 중얼거린다. 냉장고에도 작은 사진들이 붙어 있다. 여행 스냅사진들이다. 귀여운 자석으로 붙여 놓았다. 사이사이 편지처럼 주고받은 쪽지들도 붙어 있다. 냉장고 안의 뭘 챙겨 먹으라던지, 오늘은 늦는다든지. 날짜가 상당히 지났음에도 떼지 않고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겼다. 참 귀여워 죽겠다. 사기꾼만 아니었더라면.


“나이가 몇이야.”


위조 신분증 줍던 시마 카즈미가 한 박자 늦게 답한다. 몹시 건성이다. 그치, 시마쨩은 그런 거 안 좋아하지. 이부키 아이는 납득한다. 아마 헤어지기 전에 물었더라도 시마 카즈미는 똑같이 답했을 것이다.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찍어. 손을 설레설레 저으면서. 쉽게 상상이 간다. 노트북은 통으로 가져가는 게 낫겠다. 이부키 아이도 손은 쉬지 않는다. 


“내가 안 좋아하고가 문제야? 순전히 나이의 문제야. 이거 도쿄만 턴 게 아닌데….” 


계속해서 시마 카즈미의 답이 늦는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대화는 사건에 관련된 것과 아닌 것이 섞여있다. 이부키 아이는 분류를 잘 해야 한다. 그는 주로 아닌 쪽을 귀담아 듣는다. 손으로는 여러 흔적을 쓸어 모은다. 갖가지 명함들. 이름도 업종도 직책도 전화번호도 가지각색이다.


“그 작자들, 정말 바쁘게도 돌아다녔네. 어쩐지 특산물이 잔뜩 있더라. 따로 대접도 못 받았는데 하나쯤 뜯어먹어도 되지 않을까? 근데 그럼 좋아한단 소리야?”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사진이라면 네 핸드폰에도 있잖아. 아, 그거 말고. 셀프로 대접받지도 말고. 아까 수첩에 연락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에에? 그걸로 친다고? 시마쨩. 실망이야.”


수첩을 던져 준다. 스티커 사진이 끼워진 그대로다. 시마 카즈미도 직접 본다면 느끼는 바가 있을 테다. 시마 카즈미가 말하는 사진과 실제 커플사진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단 둘이 찍은 사진이란 하나를 가리킨다. 헤어진 후 싸움 끝에 진바 코헤이가 증거 차 찍어준 사진이다. 상반된 표정으로 악수를 하는. 협약은 폐기된 지 오래지만 사진은 이부키 핸드폰 속에 아직 남아 있다. 시마 카즈미가 손가락을 바구니처럼 벌려 수첩을 너끈히 받아낸다. 손가락은 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가른다.


“필터를 썼잖아. 비슷하지.”

“아! 진바씨이!!! 왜 필터를 써서!”


무전이 404를 부른다. 그 집에 수첩이 있지 않나요? 예, 기수 404. 얼렁뚱땅 원격 심부름센터가 지금 갑니다. 바리바리 박스 하나를 싸들고 분홍색 기류의 집으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허겁지겁 시동을 건다. 

제대로 보랍시고 기껏 껴서 던져줬건만 시마 카즈미는 수첩 안의 스티커사진을 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책갈피마냥 꽂아 둔 스티커 사진의 하트무늬를 보고 서의 모두가 기겁을 했다. 시마 카즈미도 놀랐다. 오직 이부키 아이만 놀라지 않았다. 있던 그대로 가져왔는데, 왜요. 시침을 뚝 뗐다. 저들의 애정행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막상 사기꾼들은 스티커사진에 관심이 없다. 엉엉 울기 바쁘다. 저 정도 담으로 참도 잘 등쳐먹었다. 너무 한심해서 모두가 한숨 쉬었다. 명연기는 인정한다. 허나 하필 바늘로 찔러도 눈물이 안 날 형사들 소굴이라 동정표라도 사려는 노력은 죄 수포로 돌아갔다. 이부키 아이라면 넘어갈 수도 있었겠는데 그마저도 핑크빛 집을 보고 와서인지 별로 좋은 감정이 안 들었다. 예에이, 눈물공격! 탈락! 팔을 교차하고 가차 없이 엑스표를 날렸다. 커플은 코를 훌쩍이며 쭈그러들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동화 끝의 성 같은 안식처가 존재했었다. 꿈을 한 움큼 떼어 구름 위의 섬처럼 격리해놓고 다정한 속삭임들을 예쁜 자석으로 고정해 전시해두는. 연애는 의외로 세상사람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래서 허탈하기까지 하다. 이부키 아이가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름이 돋은 것은 다름 아닌 그 때문이었다. 익숙한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아서. 플래시백이 뒤통수를 때린다. 저 사기꾼들에게 상해죄를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로부터 역류하는 시간으로 인해 어지럽다. 길을 잃는다. 연애는 평등하고 이부키 아이와 시마 카즈미의 한 달이 이와 다르지 않았다. 사진을 본다. 스티커 사진이 아니라, 이부키 아이 핸드폰 속의 어색한 악수 사진이다. 이제는 핸드폰 갤러리에서도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가 있다. 이게 남은 유일한 사진이라니, 둘이서 사진을 안 찍어 봤구나. 저들은 고작 한 달 보다는 더 사귀어서 사진도 찍고 동거도 했던 거겠지. 당시 날 선 분위기에 반해 사진의 색감은 매우 따듯하다. 그럴듯하다. 사진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아 까칠했던 언변들은 전부 유화처럼 부드럽게 뭉개져있다. 재미있었지. 필터로 인해 기억은 왜곡된다. 손가락을 헛디뎌 필터를 씌워버린 진바 코헤이에게 감사해야 할 판이다. 이내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하긴 커플링도 하지 않았었다. 동시에 이부키 아이 머릿속 시마 카즈미가 외친다. 돈 아껴서 잘 됐어. 이부키 아이도 동의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덕분에 강바닥에 열쇠만 버렸지. 얼결에 반지까지 퐁당 버릴 뻔 했다. 반지까지 버렸더라면 이부키 아이의 충동은 두 배가 되었을 것이다. 이건 시마 카즈미에게는 말 못할 충동이라 그저 혼자 끙끙 앓는다. 그에게도 차마 말 못할 얘기 한둘 정도는 있다.


이부키 아이는 아까 그가 봤던 예쁜 모델하우스 같은 집에 이부키 아이와 시마 카즈미 형상의 작은 레고 인형을 가져다 놓는다. 집이 하도 예뻤어서 위화감이 든다. 그나마 제 집보단 시마 카즈미의 집이 비슷했던 것 같다. 역류하는 플래시백 속에서 두 발 달린 레고 인형들은 뽈뽈 집안을 돌아다니다 차례로 소파에 드러눕는다. 갈고리모양 손으로 맥주와 리모컨을 든다. 퍼졌군. 근데 그들은 집 안에서는 대체로 방탕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 저의 맨발이다. 나란히 소파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발을 쭉 뻗으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것이었다. 텔레비전과 발끝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양 발을 흔들거렸다. 점점 폭을 넓히니 시마 카즈미의 무릎이 부딪혔다. 시마 카즈미가 궁시렁대며 무릎을 굽혔다. 

이부키 아이가 잘라낸 기억의 시야들은 이렇게 생겼다. 장면 장면은 전체 실루엣을 이루지 못하고 토막 난 채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이부키 아이가 하는 것은 한 조각을 꺼내 오래 바라보는 것이다. 유리병에 꽉 채워 넣은 것 마냥 선명하다. 라벨을 붙인다. 날짜를 쓴다. 모월 4일부터 그 다음 달 8일까지. 물결표시를 덧붙여서. 한 달을 살짝 넘겼지만 하도 미미해 그냥 한 달이라고 퉁쳐 부르고 있다. 그 기간 중에는 기념일도 생일도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함의 극치인 한 달이었다. 그래서 둘은 평범한 한 달 속에서 평범하게 할 수 있는 걸 다해보려고 노력했다. 다 해봤다기엔 자꾸 안 해본 게 튀어나와서 노력이 가상하다 정도로 평가를 낮추기로 한다. 뒤늦게나마 시마 카즈미가 질색했던 이부키 아이의 이벤트도 그 기간에 속해 있다. 그의 체면을 위해 헬륨풍선과 양초 몇 개가 동원되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겠다. 퇴근하면 같이 돌아갔다. 24시간이 쭉 연장되는 것 같아 좋았다. 공과 사는 으레 녹아버렸다. 버터처럼 흐물흐물한 날들이었다. 물론 이 때문에 지금 시마 카즈미가 골머리를 앓고 있긴 하다. 

아주 전형적인 데이트를 하다가 2주가 지나갈 즈음에는 거의 집에 틀어박혔다. 단 한번, 근교로 짧은 여행을 했다. 1박 거리도 되지 않는 짧은 여행이었다. 풍경이 예쁘다는 평을 그러모아 힘을 내서 갔는데 풍경보다는 뭘 많이 먹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그래서 되새기거든 서로 맛있었지. 맛있었어. 얘기밖에 안한다. 이 얘기는 연애얘기가 아니라서 아직까지도 하는 중이다. 맛있었지. 맛있었어. 다음에 가거든 또 먹어야지. 하지만 앞으로 그곳에는 영영 갈 일이 없을 것이다. 

택배를 기다리느라 시마 집 한복판에서 서성거렸더랬다. 시마 카즈미가 그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길게 드러누워 있어서 몇 번이고 타 넘어 다녀야 했다. 못된 버릇이다. 시마 카즈미가 혀를 쯧 차며 책을 했다. 


“뭐 마려운 개처럼 돌아다니지 마.”

“그게. 올 때가 됐는데. 택배를 시켰는데 시마 집으로 시켰거든.”

“우리집을 택배수령소로 쓰는 거야?”


이부키 아이가 초조하게 한 바퀴를 더 돌아 또 다시 시마 카즈미를 타넘었다. 시마 카즈미의 한숨도 넘었다. 시마 카즈미는 제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지나가는 이부키 아이 발목을 잡으려다 놓쳤다.


“그런 게 아니야. 기다려 봐. 아주 깜짝 놀랄 걸.”

“이미 네 무신경에 무지막지하게 놀라고 있어.”


시마 카즈미가 끙 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도로 드러눕는다. 포기다. 이부키 아이는 다리를 번쩍 들고 건너뛴다. 여섯 번을 더 타넘어서야 택배가 왔다. 시마, 도장! 그래도 시마 카즈미도 좋아했을 거다. 선물이었으니까. 하도 붙어있다 보니 따로 선물 살 틈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샀다. 나름 서프라이즈다. 산 물건이야 하도 사소해서 오히려 이부키 아이의 개봉식이 훨씬 더 요란했다. 시마 카즈미는 미묘하게 웃었다. 쑥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이 상황이 민망한 것 같기도 했다. 망설이다 말했다.


“음…. 설마 내가 지금 달려들어야 해?”

“어. 완전. 와락.”


정말 중요하니까 끊어 말했다. 양 팔을 벌리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컴온!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이 또한 조각나 과대하게 부풀어진 한 장면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부키 아이의 왜곡된 추억담이며 상상이 가필되었다. 담백한 사실을 말하자면 시마 카즈미는 달려들지 않았고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멋진 포옹은 없었다. 수정 가필의 이유는 간단하다. 엔딩이 그러했듯 한 달이 마냥 아름답지마는 않아서다. 시마 카즈미와 함께 가 본 이 세상 끝이 어땠느냐면 절대 평화롭지는 않았다. 재미는 있었으나 꽃밭도 낙원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헤어졌다. 딱히 미련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부키 아이는 가끔 깊은 강 밑바닥을 뒤지고 싶다는 충동을 참고는 한다. 강 밑바닥에는 열쇠가 있다. 둘이 같이 버렸다. 더 오래 가라앉아 있다가 시퍼렇게 녹이 슬어 열쇠 구멍에 맞지 않게 될까봐 걱정스럽다. 시마 카즈미가 말하길 기우라 한다. 기우? 하늘이 무너지길 걱정한 사람이 있었단다. 거 별 걱정을 다 하는군. 


“네가 지금 그런 걱정을 하고 있어.”

“그 정돈 아니지.”

“왜 또 비유를 생각 안하지?”


기우다. 헤어져봤자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열쇠는 강 밑바닥에 가라앉은 그대로다. 여간해선 녹조차 슬지 않을 것이다. 404 콜사인은 쭉 이어진다. 지금도 좌석시트에 뒤통수를 얹은 채 고개를 돌리면. 시마 카즈미는 여전히 옆자리에 앉아서 영 모를 말들만 한다. 세상 끝까지 가 봐도 뭐 별 건 없었다. 시마 카즈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이 이부키 아이를 대해서 더 헷갈린다. 한 달 간의 얘기를 꺼내면 벌컥 성을 내는 것마저 그답게 변함이 없다. 어쩔 땐 되게 잘 알겠던데 시마 카즈미의 속내는 지금처럼 오리무중일 때가 더 많다. 모든 사람들의 속내가 대개 그렇듯이. 사귀어 보고 꺼풀을 벗기면 더 훤히 보일 줄 알았는데, 투명해지는 건 단편적인 장면뿐이다. 연애란 게 참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하지만 시마 카즈미가 집에서 맨발일 때 발을 질질 끄는 것은 이부키 아이밖에 모를 것이다. 그는 적응하고 나선 이부키 아이의 집에서마저 그러고 다녔다. 책에 꽂힌 책갈피 그림도 이부키 아이만 안다. 냉장고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게 음료 종류인 것도 이부키 아이만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손톱의 길이 따위와. 모로 누워 자는 잠버릇과. 유독 자주 떠올려 되새기는 장면들이 있다. 비록 이부키 아이의 각색이 상당부분 들어가긴 했지만 이런 장면들을 생각하면 몹시 충만해진다. 24시간을 흐물흐물하게 넘어서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다. 세상의 끝에 별 건 없었어도 가보기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부키 아이는 그 구분을 아주 잘 한다. 헤어진 걸 후회하진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귄 것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는 모순을 제대로 이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부키 아이는 자주 쿨 하고 가끔만 구질구질하다. 시마 카즈미는 쿨 한 거 같은데 대체적으로 그냥 구질구질하다. 일단 티 안내고 쿨 하려고 노력하는 데서부터 구질구질하다 할 수 있다. 그는 자주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데 애초에 향하는 곳이 잘못되었다. 이부키 아이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다. 중이 염불 외듯 한다. 매번 말했더니 급기야 이부키 아이가 생각을 떨쳐 버렸다. 문제는 정상적인 생각을 떨쳐 버렸다. 맘대로 되는 일 하나 없다.


“저기, 시마. 시마. 시마는 전 애인이랑 뽀뽀 가능한 타입?”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세상 끝에 갔다 왔더니 화제의 저변이 넓어졌다. 기수 차에 타서도 사생활 저편의 얘기를 잘도 꺼내게 됐다. 듣도 보도 못한 신개념 인터뷰요, 토크쇼다. 이부키 아이의 우주로부터 떨어진 뜬금없는 질문에 시마 카즈미는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는다. 도사린 곤혹을 이부키 아이는 용케 알아본다. 당장 문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데 차마 못 하는 표정이다. 이 표정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이부키 아이 혼자 즐겁다는 얘기다. 이부키 아이는 혼자 즐거운 쪽이 좋다. 일방적으로 놀려먹고만 싶다. 어깨춤을 춘다. 이럴 때의 이부키 아이는 조금 막 나가는 경향이 있다.


“오. 이번기회에 확인해보면 되겠네.”

“절대 안 되는 타입이라고 했잖아.”

“에. 시마쨩. 아이쨩이랑은 뽀뽀하기 싫어?”


맘에도 없으면서 이부키 아이는 한껏 섭섭한 척 한다. 얼마 전만 해도 입술을 그렇게 비벼 댔으면서 야박하다 생떼를 부린다. 시마 카즈미는 다 잊은 모양인데 그땐 눈 뜨자마자 입부터 갖다 대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이부키 아이의 각색상에서다. 감안해야한다. 언제나 실제의 연애는 이부키 아이의 가필보다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어. 다이렉트로 그런 얘기야. 넌 좋아?”


시마 카즈미 놀려먹을 때가 좋았다. 흐름이 올 때에 최선을 다해 즐기지 않으면 이렇게 곧장 역으로 되돌아온다. 그럼 이부키 아이는 할 말이 없어진다. 자유연구 주제를 받은 어린아이처럼 파고들어간다. 좋은가? 싫은가? 갈팡질팡한다. 그는 가정보다는 실험을 더 선호하므로, 해봐야 확실하게 알 것 같다. 탐구심도 있다. 해봐야 알겠는데. 뽀뽀란 게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맞부딪힐 입이 있어야지.


“이게 협조가 안 되네….”


그럼 기억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이부키 아이가 잠잠해진다. 굉장히 찜찜해질 정도의 침묵이다. 달갑지 않다. 이부키 아이는 분명 그가 들먹이는 한 달로 시간 여행을 떠난 참이다. 시마 카즈미도 덩달아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달가울 리가. 

기억에 관해서라면 시마 카즈미 쪽이 참고할 만하다. 시마 카즈미는 각색을 최대한 배제한다. 시점은 고정되어 있다. 줌인도 줌아웃도 없다. 이부키 아이가 제멋대로 당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을 만한 잡음을 날리고 심장소리와 손바닥 한복판에 닿는 숨소리 따위만 키워 놓는다면 시마 카즈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담는다. 자연광에만 의지해 굉장히 어두운 편이다. 이부키 아이의 감상은 각주, 혹은 괄호지만 시마 카즈미의 감상은 미주다. 재생이 끝나고 나서 끝에 겨우 붙는다. 아주 작게. 보험 약관처럼. 이부키 아이가 눈치 채더라도 글씨가 너무 작아 읽고 싶어지지 않도록. 눈에 힘을 주고 읽자면 간단하게 요약이 된다. 이부키 아이와 비슷하다. 아쉽기도 하고 아주 괜찮지는 않은데 오기를 조금 보태면 버틸 만하다. 사실은 사랑이 아니었어서 버틸만한 게 아닌지 시마 카즈미는 생각한다. 개가 짖는 소리를 계속 쫓아버려야 한다. 허공을 내젓는 무의미한 손짓이 늘었다. 이부키 아이는 그게 시마 카즈미가 파리 쫓는 줄 안다. 시야를 멍하게 흐리며 움직이는 시마 카즈미의 손에 무의미하게 반응하다가 엉뚱한 결론을 낸다. 슬슬 굴리다 무심결에 툭 굴려 뱉는다.


“네가 딴사람하곤 뽀뽀 안했으면 좋겠다.”

“이부키…. 미련 있어?”


좀 소름 돋았다. 시마 카즈미가 본능적으로 농담으로 돌려쳤다. 지금 둘 중 하나라도 진심으로 받으면 망할 거란 예감이 든다. 아까  뛰어 내릴걸 그랬다. 후회해봤자 늦었다. 이부키 아이는 계속 어물어물한다. 여기에선 화를 냈어야 했다. 바보 같은 이부키 아이. 혓바닥으로 폭탄을 굴리는 이부키 아이. 사탕마냥 살살 녹여가면서.


“아니 없는데…. 뽀뽀는…좀 그래…….”

“뽀뽀를 안 하면 어떻게 연애를 해.”


이부키를 따라서 시마 카즈미의 어휘도 유치해진다. 싸울 때 그래왔듯이. 키스 같은 고급어휘는 지양된다. 뽀뽀니 츄니 하는 식이다. 단순해지는 건 보통 연인사이에나 허락되는 대화 스크립트란 걸 둘 다 모른 채 하고 있다. 혹여 누군가 지적할까봐 불안해하며. 그저 좀 봐주세요, 하는 심정이다. 이 기도는 이부키 아이가 두 손을 잘 모은 덕에 아슬아슬하게 하늘에 닿는다. 유치한 말싸움도 이어진다.


“넌 아무한테나 다 하니? 그렇게 발랑 까졌니?”

“어…. 그러니까 너한테도 했지…. 있잖아. 이부키. 우리 나이대가 되면 좀 발랑 까져도 돼.”

“저질이네. 시마쨩.”

“저질은 너야.”


이부키 아이가 팩 토라진다. 시마 카즈미는 나이 때문에 스티커사진은 못 찍지만 나이 때문에 발랑 까져도 되는 복잡함에 대해서 논한다. 듣자면 대체로 개소리다. 웃기고 있네. 이부키 아이가 듣기에도 그렇다. 한 귀로 흘리기로 한다. 하지만 닫힌 공간이라 완전히 흘려내지는 못하고 잔여물이 귀에 남는다. 간질거린다. 그의 긴 논설은 마디마디가 단호해서 좋아했었다. 내버려두고 들으면서 연결하는 이음매를 찾곤 했었다. 가장 낮아지는 지점을 찾아 따라 속삭였다. 시마 카즈미가 말하는 투는 전혀 안 변했다. 사귀기 전에는 어땠더라? 그때로 돌아가야 하나? 돌아갈 수 있나? 괜히 연애해서 이 사단이 났나? 혓바닥에 걸리는 사탕이 또 있었다. 내뱉고 본다. 본의 아니게 논설을 뚝 끊어버렸다. 어차피 시마 카즈미도 끝에 가서는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말하고 있던 게 분명하다. 이음매를 잃고 따로 놀던 낱말들이 이부키 아이의 폭탄에 놀라 푸드덕 날아간다. 그것들은 세상의 끝으로 갈까. 맨션의 거실 같은. 안락한 성으로. 


“시마. 사랑한다고 했던 건 내 잘못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시마 카즈미는 이럴 땐 쿨 하다.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는 주제에, 그조차 아리까리해 하는 주제에, 단호하게 말한다. 괜히 이부키 아이를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의 말투다. 시마 카즈미의 진심과 농담과 사설을 모두 들어온 이부키 아이는 구별해낸다. 구질구질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부키 아이는 괜한 안심을 한다. 전부 기우다. 기우가 맞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진바 코헤이가 보기엔 맨날 똑같은 놈들이다. 저 바보, 어제 스티커사진을 가져와서 들이밀었어요. 사소한 고자질, 사소한 비방과 변호를 번갈아 듣다가 한탄하며 말한다. 


“아니? 너네는 왜 맨날 똑같은데.”

“예?”

“너희들은 맨날 이랬다고.”


약간은 진절머리까지 내며 퇴근한다. 과연 뽀샤시 필터 씌워서 사진찍어 주는 사람답다. 그 뒤로 404만 남겨진다. 역시 반장은 다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은 말만 해 준다.








04 시리우스의 개  



살다보면 별별 날이 다 있기 마련이다. 비단 좋은 날 나쁜 날 단순하게 국한하는 일이 아니다. 모든 일에 아귀가 딱딱 맞게 돌아가 별 일 안 하고도 충만하게 느껴지는 하루가 있는가 하면 고기 낚이지 않을 삭은 그물처럼 일진이 사나운 날 또한 있다. 오늘은 전면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일단 비가 왔다. 오래 왔다. 새벽부터 내렸는지 아침엔 이미 온 세상이 흠뻑 젖어 있었다. 비가 와서 사위가 어두웠던 탓에 늦잠을 잤다. 눈이 영 꺼끌하게 떠졌다. 머리의 나사들마저 느릿하게 돌아갔다. 비가 통째로 방 안에 들어온 것만 같다. 빗줄기가 줄줄 맺히다 흘러내려 흐물흐물하기까지 한 유리창을 보며 이부키 아이는 잠시 꿈결에 젖어 있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천천히 기억해내고 현재 시각을 인식한 후 간단한 뺄셈을 하고 나서야 머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비상등이 이부키 아이를 이불로부터 몰아냈다. 화다닥 놀라 일어났다. 와, 와, 와, 와, 와. 꽁무니에 불이 붙었다. 긴급차량이 아니라 긴급한 사람이었다. 바지에 마구잡이로 발을 꿰다 중심이 꼬여 자빠졌다. 누운 채 끌어올렸다. 일분. 잡히는 대로 상의를 뒤집어썼다. 삼십초. 고양이 세수에 사십초. 신발 신고 뛰쳐나가기까지 도합 사분 삼십초. 나와 보니 비가 와서 되돌아가 우산 들고 나오는데 낭비된 시간 일분. 당연히 아침밥은 못 먹었다. 우산을 쓰긴 했으나 뛰느라 우산은 가리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행위예술의 일종으로만 머리위에서 정신 사납게 덜렁거렸다. 장대비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잔비에 어깨가 축축해졌다.


지각을 겨우 면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말만 그랬지 하나도 안 좋았다. 아아! 거지같은데! 라도 외치며 들어갈 걸 그랬다. 꼴은 ‘거지같은’을 넘어 이미 거지였다. 시마 카즈미가 이제 막 들어오는 이부키 아이를 보더니 오…, 하고 소리만 냈다. 짤막한 탄성만 흘리고 끝내버려서 놀리는 건지 놀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놀리면 또 어떠랴. 제 꼴이 제가 봐도 웃긴데. 이부키 아이는 아랑곳 않고 머리며 옷이며 두들겨 가며 빗방울을 털어냈다. 오히려 비에 젖은 생쥐 꼴보다도 물기 터는 모습이 시마 카즈미의 웃음을 샀다. 이거 영락없이 목욕 후의 개가 아닌가. 이부키 아이는 탄성에서 감정을 집어내는 건 힘들어해도 저를 향한 웃음소리만큼은 쉽게 낚아챘다.


“시마. 지금 웃었어?”

“어어.”


시마 카즈미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거 참 실수, 가 넌지시 보이는 톤이었다. 파트너의 곤경을 보고도 웃다니, 형사로서의 태도가 아주 글러먹었다. 아니 사람으로의 태도로도 좀 그렇다. 공감능력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다. 냉혈한이다. 냉혈한인데 비웃기까지 해? 그건 그냥 성격이 나쁜 거지! 성격이 나쁜 시마. 이부키 아이가 비 맞은 중처럼 꿍얼꿍얼 욕을 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잔물결로 흐르던 시마 카즈미의 웃음이 폭소로 터져버렸다. 양손에 가방이며 파일이며 바리바리 든 채 아까 웃음과는 비교도 안 되게 목을 젖치고 깔깔대며 웃었다.

이부키 아이도 안다. 시마 카즈미가 뭘 떠올리고 있는지. 나우튜브 영상이다. 약 50초짜리로 구석에 쭈그린 개를 찍은 영상인데 개는 50초 내내 흰자위를 번들거리며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다. 뭐가 불만인지 짖는 것도 아니고 하울링도 아닌 옹알이로 한참을 꿍얼거린다. 확실히 개가 하던 말이 욕은 맞았나보다. 이부키 아이 혼잣말로 욕하는 소리가 꼭 그를 닮은 걸 보면. 영상의 마지막에 가서는 사운드에 개를 찍는 주인의 허탈한 목소리가 섞여드는데, ‘어어? 뭐라는 거야? 네가 잘했다는 거야?’ 종내는 주인의 내뱉는 숨에 웃음기가 짙어지고 만다. 세상 모든 착한 개의 주인은 결국 개에게 지게 되어 있다. 아마 이 주인도 졌을 것이다. 그러니 끝에는 웃고 말지. 그러니 보란 듯 영상을 업로드하지. 시마 카즈미도 그래서 웃는다. 

시마 카즈미에게 그 영상을 보여줬던 건 이부키 아이였다. 예의 한 달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시마, 이거 봐봐. 웃겨. 소파 밑에 앉아 있다가 팔을 뻗어 뒤로 넘겼더랬다. 시마 카즈미는 허리를 잔뜩 수그려가며 보다가, 이부키 아이가 팔을 흔들어 대서 어지럽다고 했었다. 예의 한 달이란 그런 게 가능한 때다. 그때는 영 건성으로 보는 듯 하더니 제대로 보긴 했던 모양이다. 이부키 욕하는 소리에 바로 영상을 떠올렸으니. 시마 카즈미는 터진 웃음을 끊지 못하고 계속 피식거리며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튀는 것이렷다. 어차피 이부키 아이도 같은 차에 탈 것을 뻔히 알면서. 이부키 아이는 물방울을 방울방울 털면서 쫓아갔다. 걸음마다 습기가 서리처럼 떨어졌다. 습도가 높은 날은 소리가 죄 낮게 깔린다. 떨어진 웃음소리를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서걱서걱 밟았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비를 흠뻑 맞고 출근한 정도로 끝난다면 그건 얄팍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진정한 불운의 효시를 결정지은 건 차에서였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머지 한 다리를 집어넣다가 발견했다. 드러난 발목의 경계선이 남달랐다. 어라. 발목을 돌려보았다. 여기 검정색 줄무늬가 있으면 안 되는데. 이부키 아이가 아침에 잡은 양말은 분명 무늬 없는 흰 양말이었다. 바지 왼쪽을 슬쩍 들었다. 흰색 민무늬가 맞았다. 오른쪽이 문제다. 다시 확인해도 줄무늬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었다. 늦잠 탓에 급하게 신어서는 아니다. 빨래를 개면서부터 짝을 잘못 맞춘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집에는 또 다른 짝짝이 양말 한 쌍이 곱게 접혀 있을 테다. 이부키 아이는 내일 집에 들어가자마자 속아내리라 다짐한다. 별 거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양말이야말로 가오의 끝판왕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 발에 속하기 때문이다. 짝짝이는 이부키 아이의 자존심이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이미 양말이 짝짝이인 걸 눈치 채자마자 기분은 삐딱선을 타고선 가파르게 하강했다.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아봤자 이부키 아이가 알아버린 이상 소용없었다. 이 양말은 짝짝이다, 이 양말은 짝짝이다. 오른발을 슬그머니 차에 들였다. 양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선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일단 솔직하게 자진납세하기로 했다. 가오의 끝판왕이 짓밟히고 망가졌지만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가 굳이 폼을 잴 필요가 없는 상대다. 전 애인이란 바로 그런 존재다. 파트너도 그런 존재고. 이미 볼 꼴 못 볼꼴을 다 보였는데 양말쯤이야. 


“시마, 시마. 들어봐. 나 오늘 양말이 짝짝이야. 하나가 스트라이프라고. 어마어마하게 절망스럽다, 지금.”

“아하. 그래?”


시마 카즈미는 못 들은 척 했다. 말이 긍정이지 그저 무시였다. 이부키 아이의 가오에 관한 고백은 무참하게 짓밟힌 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하루는 짝짝이 양말로부터 슬금슬금 꼬여갔다. 불행은 비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위로부터 흘러내리되 발목부터 젖어들었다. 이부키 아이의 감이 속삭였다. 심상치 않은 하루가 될 거라고. 줄무늬 모양을 하고선 벙긋거렸다.

감이 옳았다. 불행과 비는 오랜 시간 추적이며 내렸다. 내내 오락가락했다. 슬슬 그치려나 싶으면 후두둑 떨어지고 실컷 토해냈다 싶으면 사그라들었다. 가랑비는 눈을 찌르고 안개비는 폐를 파고들었다. 온기를 빼앗아갔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째깍거렸다. 그 때마다 이부키 아이도 눈을 깜박거렸다. 뒤틀린 심사가 꿈틀거렸다. 노이즈 범벅인 무전이 유독 멀게 들렸다. 차라리 빗소리가 가까웠다. 귓바퀴를 타고선 흘러내렸다. 그 끝에서야 전기신호가 미세하게 섞여들었다.

시마 카즈미는 비에 대해 별 생각을 안 한다. 이부키 아이는 비를 싫어하지 않는다. 평소라면. 평소에 한해서라면 원래 비라는 것은 일기현상의 하나일 뿐,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24시간 당번근무 앞에선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당번근무에 비는 아주 좋지 못했다. 기동 수사대 앞에 비는 그저 방해물에 불과하다. 24시간 내내 뛰어야 하는 날이니만큼 더욱 그랬다. 빗길운전인 이상 일단 기동력부터 현저하게 떨어졌다. 차는 안전을 우선시하며 굼벵이처럼 달린다. 옳지, 옳지. 기동대가 아니고 기동 수사대니까. 키쿄 유즈루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순 이부키 아이의 상상 속에서다. 이부키 아이만 불만스럽다. 기동대가 아니고 기동 수사대, 다 좋은데 이부키 아이에게서 기동력을 빼면 뭐가 남더라. 기동력을 빼더라도 남는 게 많다 주장하고 싶지만 기왕이면 빠른 게 좋았다. 시원하게 달릴 수 없다는 건 꽤 짜증나는 일이다. 

차에서 내리자 악조건이 더해진다. 이부키 아이가 차에서 내리기만을 기다린 듯 빗줄기는 굵어졌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방울방울 무거웠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시야를 가린다. 눈에는 와이퍼가 없다. 우산도 없다. 운동화는 발끝으로부터 젖어든다. 그리고 이부키 아이는 앞서는 달리기가 아니라 쫓는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다. 남색 비닐 자켓을 입은 남색 등. 어깨는 좁다. 키는 174cm남짓. 공사판에서 왔는지 군데군데 굳은 시멘트가 묻었다. 허둥대고 있다. 허둥대는 사람은 낭비하는 행동이 많아서 쫓기가 한결 쉽다. 비를 이부키 아이만 맞는 것도 아니기에 조건도 같다. 하지만 이부키 아이에게는 오늘 한정의 핸디캡이 있다. 얕은 물이 흐르는 강물 같은 아스팔트를 찰박거리며 뛰다가 이부키 아이는 발 하나를 아예 웅덩이에 빠뜨렸다. 줄무늬 양말을 신은 쪽이다. 물은 분수처럼 걸출하게 튀어 올랐다. 바지뿐만 아니라 마음 한복판에도 흙탕물이 튀었다. 흐린 시야 너머가 얼룩투성이다. 발목이 죄 축축했다. 것 봐라. 이러니 짝짝이는 안 된댔다. 


신발까지 더럽혀가며 잡은 사람은 전혀 연관 없는 자로서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럼 왜 말 걸자마자 도망갔냐 하니 갑자기 형사가 쫓아와서 무서웠다고 했다. 불쌍하게 쫓겼던 남자는 떨면서 젖은 어깨를 연신 움츠렸다. 무서울 만 했다. 험상궂은 표정의 이부키 아이가 깔깔한 비를 헤치고 짐승같이 쫓아온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시마 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중하게 이부키 아이 뒤통수를 밀어가며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가 누르는 바람에 마지못해 숙여주었다. 함께 쫓았던 관할에서도 멋쩍어 했다. 나머지는 이쪽에서 캐보겠다 말했다. 수사의 주체가 완전히 넘어갔음을 느낀다. 초동수사가 종료되었다. 

하지만 보내준 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똑같은 사람을 또 똑같은 방식으로 쫓게 된다. 역시나 빗물 웅덩이에 발을 담가가면서다. 한 시간 전 쫓던 사건과는 전혀 별개의 건에서였다. 어쩐지 허둥대더라니. 형사가 무서울 만도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전혀 다른 이유로 찔릴만한 사정이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두 번 쫓게 된 과정이야 이해하겠지만 막상 잡는 사람 입장이 되면 화가 나기 마련이다. 똥개훈련이라는 말을 절절하게 체감한다. 이부키 아이는 발을 털었다. 두 발이 전부 젖어서 흙탕물 튄 발이 어느 쪽인지 분간도 안 간다. 잡으면 절대로 한 대 때려줄 거라 엄포를 놓는데 시마 카즈미가 말리질 않는다. 그도 말은 안 하지만 적잖이 짜증이 난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를 믿고 진짜로 한 대 때렸다. 그도 앞뒤 생각 정도는 한다. 일이 차분히 정리되고 때렸다간 분명 혼날 일이라 시멘트 묻은 팔을 잡아채자마자 치고 봤다. 


“아저씨! 나 알지? 또 만나서 정말 반갑네!”


주먹 대신 손바닥으로 거친 인사인 척 후려갈겼다. 짝! 거의 채찍과도 흡사한 소리가 났다. 때린 이부키 아이마저 놀랐다. 감정이 많이 실렸나 보다.


“어이쿠.”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의 믿음대로 화풀이를 모른 척했다. 수갑을 느긋하게 꺼냈다. 그 모습이 마치 용인해 준 것만 같아서 이부키 아이는 절로 의기양양해졌다. 결코 잘한 일이 아니지만 당당하게 목에 힘을 주었다.


차는 세상 모든 빨간불에 걸려 무겁게 멈춰 섰다. 단 한 교차로도 무사히 지나치질 못했다. 이부키 아이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번거로움을 브레이크에 실어 지그시 밟았다. 브레이크 밟은 무릎을 와들와들 떨어댔다. 와이퍼는 계속 부지런히 흔들거리며 차창의 비를 쓸어냈다. 왔다 갔다 한 번에 이부키 아이의 화도 울컥거리며 한 번씩 밀려났다. 쓸려나간 빈자리를 도로 빗물이 채웠다. 밥 먹자. 시마 카즈미가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침밥도 못 먹고 두 번 뛴 끝에 먹는 점심밥은 기가 막히게 맛이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짰다. 누가 이걸 먹자고 한 거야? 소리치려고 했는데 다름 아닌 이부키 아이였다. 불평마저 꾸역꾸역 삼켜야 했다. 배는 고프니까. 나중에 돌이켜보면 잘한 일이었다. 잘못 쪼갠 나무젓가락은 양쪽의 길이가 맞지 않았다. 원래는 신경 쓰는 편이 아닌데, 날이 그래서인지 자꾸 걸렸다. 아마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왔기 때문이리라. 연신 젓가락을 테이블에 절뚝이며 면을 씹었다. 타닥타닥 엇박자로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낚아 올리는 젓가락이 허투로 돌았다. 면은 투두둑 끊어져 흘러내렸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왜 이런 날 당번근무를 해서. 전후를 고쳐본다. 왜 당번근무날에 비가 와서. 하지만 처음이 맞았다. 하필 이런 재수 없는 날에 당번 근무를 해서. 제대로 짜 맞추고 나자 한숨이 나왔다. 한숨이 어찌나 무거운지 씹던 것을 죄 뱉을 뻔 했다.


결국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굳이 앞뒤 순서를 정리해 원인을 찾으려는 이유가 있다. 이부키 아이 혼자만이라면 그나마 괜찮을 텐데, 덩달아 행동을 함께 하는 시마 카즈미마저 오늘 하루 지독히도 재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젓가락만 제대로 쪼개졌을 뿐이지 시마 카즈미도 지독하게 맛이 없는 점심을 먹었다. 너무 짜고 마디마다 끊어지는 면이었다. 시마 카즈미의 선택이 아니었으니 얼마든지 불평을 해도 되지만 그는 맛있다 맛없다 말조차 않고 얌전히 물 한 통을 다 비워냈다. 마찬가지로 이부키 아이와 같은 차를 탔기에 세상 모든 빨간 신호에 발이 묶였다. 당장 급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초조하게 다리를 떠는 이부키 아이를 빤히 지켜봤다. 정지선을 조금이라도 넘을 새라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공기마냥 견뎌내는 평소대로의 시마 카즈미다. 이부키 아이는 절로 미안해졌다. 그는 시마 카즈미의 불운을 견디지 못했다. 어깨가 축 쳐졌다. 드물게 풀이 죽어 사과를 했다. 아직도 정신없이 무릎을 떠느라 진정성은 조금 떨어졌지만 어쨌든 진심이었다.


“나 오늘은 진짜 재수가 없나봐. 미안해.”

“엑.”


시마 카즈미가 창턱에 걸치고 있던 팔꿈치를 미끄러뜨렸다. 턱이 손바닥에서 벗어나 뚝 떨어졌다. 어디 이를 부딪치기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한편의 개그 만화 같은 모양새였다. 이부키 아이는 아주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우스꽝스런 슬랩스틱을 빤히 보면서도 차마 웃지 못했다. 시마 카즈미는 미끄러진 그대로 널부러졌다. 띄엄띄엄 말했다. 뱉는 단어마다 지친 투가 역력했다. 밥 먹자 말했을 때처럼.

그도 오늘 운수가 꽤 사납다고는 느끼고 있었다. 이런 날은 버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따름이라 버티는 것뿐이다. 그래서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의 불운보다도 그의 유순한 솔직함에 방점을 찍어 놀랐다. 그의 감탄은 솔직한 실토에 대한 칭찬이기까지 했다. 


“난 오늘 내가 재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근데 이부키 너처럼 사과할 생각은 안 해봤어.”

“그치?!”


늘 본인의 문제부터 짚어나가는 시마 카즈미 특유의 여상한 말투에 이부키 아이의 마음이 야들야들하게 풀렸다. 저의 불운이 시마 카즈미에게 옮았다고 생각하기보단 그저 각자의 사정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쪽이 훨씬 위안이 되었다. 저 때문에 시마 카즈미가 불운해지는 건 싫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짜 불운이니까. 그리고 사고의 앞부분은 댕강 잘라 날려버리고 간단하게 시마 카즈미가 오늘 불운해서 좋다고 말했다. 듣기에 개차반으로 들릴만한 말이었다. 시마 카즈미가 기가 차 했다. 


“하? 미안하다며?”

“미안한 거랑은 별개지. 저기. 복권이라도 살까?”


머리가 어떻게 돌아가면 저런 발상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분명 연애를 했었는데도 전혀 모르겠다. 이부키 아이의 한 길 사람 속은 너무 얕고 이상하고 뜬금없는 해구가 산재해 있어 가늠하기가 힘들다.


“어째서 복권을 사는 거야?”

“어디까지 재수가 없을지 보고 싶어지잖아. 궁금하지 않아?”

“네 생각은 전혀 모르겠어.”

“아니 완전히 명확한데. 왜 모르지?”


이부키 아이는 관심을 완전히 복권으로 옮겨 버렸다. 훌쩍 발을 들고 날아갔다. 여전히 한쪽은 줄무늬 양말이다. 이부키 왈, 복권은 행운과 불운이 한 눈에 보여서 좋단다. 온통 불운만 산재해있고 행운이라곤 티끌같이 도드라지는 시스템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오늘 치 불운을 적당히 정당화 시켜주는 것 같아서다. 복권, 복권. 그래, 낙첨 복권을 사는 거야. 이부키 아이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단순한 단어에 멜로디를 붙인 흡사 타령이었다. 혼자 부르는 콧노래라기엔 성량이 너무 컸다. 듣고 호응해주기를 바라는 듯 노골적으로 반복되었다. 멜론빵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런 식으로 종종 다른 종목의 노래가 차안을 맴돌곤 한다. 시마 카즈미는 정말 따라하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매번 걸리는 빨간색 신호나 끊임없는 비보다도 이부키 아이의 발랄한 노래가 시마 카즈미를 불행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다. 시마 카즈미가 노래로 인해 불행해질지언정 이부키 아이는 어떻게든 저가, 혹은 저만이라도 기분 좋을 만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하루쯤 재수가 없어도 그뿐이다. 이부키 아이의 기분에 완전히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드리운 작은 조각구름일 테다. 대단하네. 시마 카즈미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이 감상은 전혀 다른 의미로 내뱉어졌다. 그냥, 사. 아까 전 이부키 아이가 앞부분을 잘라먹는 것과 같은 식이다. 둘의 대화는 은근히 아귀가 맞지 않고 각자의 뜻으로만 진행된다. 

그래서 저 좋을 대로 받아들인 이부키 아이는 기어이 복권을 샀다. 잠깐 있어봐, 하더니 비를 맞고 후다닥 뛰어갔다 왔다. 두 장을 샀다. 한 장은 시마 카즈미에게 주었다. 빗방울에 점점이 젖은 복권을 시마 카즈미는 떨떠름하게 받았다. 여기서 또 거절은 안 한다. 대신 으름장을 놨다. 


“당첨되어도 나눠주지 않을 거야. 네가 산거라고 소송 걸어도 소용없어.”

“왜 거기서 현실적인데? 무섭다, 무서워. 시마쨩.”

“이런 건 사전에 확실히 해야 하니까.”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지, 개꿈도 크다고 해야 할지, 이부키 아이는 혼란했다. 당첨금 소송은 상상조차 못 한 일이다. 얜 대체 뭘 보고 살기에 머릿속이 이리 살벌하담. 떠올려보니 시마 카즈미는 순 이상한 것만 봤었다. 이상함이란 이부키 아이의 기준에서다. 예를 들면 과학 수사나 법정 드라마 같은 것들 혹은 스릴러. 장면마다 등장인물들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고 전문 지식을 덧바른 딱딱한 어투를 구사했다. 이부키 아이로선 ‘이기아리’ 밖에는 모를 장르였다. 리모컨을 탈취하려고 몸싸움을 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러다 결국 마룻바닥에서 뒹굴었던 기억도. 아무렴 싸늘한 드라마보다야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훨씬 낫지 않은가. 

복권은 여러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당첨을 노리는 게 아닌 순전히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였으니 넣은 채로 잊어버리기로 한다. 복권 노래도 멈췄다. 노래가 멈춘 덕에 시마 카즈미는 그나마 덜 불행해졌다.

그리하여 모두가 덜 불행해진 저녁, 저녁밥에 대해서라면 어떨까 했는데, 아예 먹을 시간 자체가 비에 녹아 사라졌다. 근무시간 내 칼같이 명시된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은 가끔씩 먹통이 된다. 재수 없는 오늘이 그날이었다. 복권, 전혀 소용없잖아. 하고 시마 카즈미가 투덜거렸다. 


“복권이야. 부적이 아니라니까.”

“네 태도를 보면 완전 미신이라고. 이젠 그 마저도 기능을 안 하는군.”

“바로 그러기 위한 부적이거든.”


텅 빈 뱃속에서 뽑는 잡담은 공허했다. 잡소리로 점철된 대화와는 반대로 차는 급하게 내몰리고 있었다. 비를 맞는 순찰램프가 제일 다급하게 삐용거렸다. 램프는 도로의 차들에게 주의를 주는 동시에 기수를 재촉했다. 시마 카즈미가 엑셀을 지르밟았다. 법정속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서. 지금 핸들을 이부키 아이가 잡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금의 이부키 아이라면 빗길운전이라는 핑계로 법정속도를 준수하는 드리프트를 시도하고도 남았다. 그러는 와중에 모든 빨간불에 발이 묶였다. 이부키 아이는 조수석에서 계속 무릎을 떨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드리프트를 포함해서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막상 가보니 무릎까지 떨 만큼 급하고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당사자야 충분히 심각했을 것이다. 다만 신고자가 체감하는 급박함과 실제 상황의 거리감으로 인한 오류다. 상황은 5분 만에 손쉽게 정리되었다. 굳이 기수까지도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맥이 빠진다. 비 맞으며 차로 되돌아간다. 시마 카즈미가 빗길에 미끄러져 휘청거렸다. 헛발을 돌며 탭댄스를 췄다. 제 오늘치의 불운을 잊고선 이부키 아이가 배를 잡았다. 숨이 넘어가 폐 속에서 꺽꺽대는 소리를 냈다. 누차 말하지만 시마 카즈미의 불행은 비가 오는 것이나 발이 꼬이는 일이 아니라 순전히 이부키 아이의 주둥이로부터 온다.

자잘한 일로 장소마다 전전했다. 비 피할 지붕을 찾아 들어가는 떠돌이인양 했다. 건진 건 없는데 계속 바빴다. 자잘한 사건사고들이 휘몰아쳤다. 텅텅 빈 뱃속에선 억지로 먹은 점심이 부대꼈다. 먹을 시간을 놓쳤더니 뭐 제대로 된 걸 먹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위에 차곡하게 음료와 초코바 따위를 얹어놓았다. 이부키 아이는 초코바를 길쭉하게 빼물고선 오래 우물거렸다. 그러느라 절반을 툭 떨어뜨렸으니 이젠 웃음도 안 나온다. 일순 서러워져서 찔끔 울 뻔하기까지 했는데 초코바를 적시는 건 눈물보다도 빗물이 먼저였다. 이미 한참을 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부키 아이는 시원스럽게 미련을 버렸다. 대신 다른 것을 생각하기로 했다. 시마 카즈미의 감탄마냥 기분전환은 특기였으므로. 주머니 속 복권 같은 것들이 아직도 한가득 남았다. 꿀꿀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까먹을 수 있다. 차창을 열었다. 안개비라 안까지 들이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쭉 뽑았다.

별도 안 보일 비오는 밤이지만 대신 창문마다 빛이 들어온다. 건물마다 박혀있는 네모난 별들 헤아리기를 좋아했다. 따스한 백열 불빛에 의지해 많은 상상을 한다. 어느 사기꾼 커플이 꾸민 다정함 같은 것들을. 수백의 빛나는 섬들이다. 이부키 아이는 상상력이 좋아서 안의 생활상을 다 그릴 수 있다. 창문이 많아 헤아리려면 끝도 없다. 저 집은 가족이 살았으면 좋겠다. 저 집은 빛이 밝으니 공부하는 사람이 살아도 좋겠다. 그 옛날 양치기들이 그런 식으로 별을 보고 선을 그려 별자리를 만들었더랬다. 이부키 아이가 하는 일도 그다지 다르진 않다. 양치기들이 만들어낸 별자리 이야기처럼 멋들어진 이야기다. 조수석에 앉으면 이부키 아이는 이것들을 시마 카즈미에게 들려준다. 옆자리에 시마 카즈미가 있어서다. 모두 이부키 아이의 조잡한 상상에 불과하지만 시마 카즈미는 잘 들어준다. 많이 비약된 상상에는 코웃음을 넣는다. 그럴 리가 있겠어. 차가 멈출 때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이 따라가는데 그럼 시마 카즈미가 뭔가를 발견할 때도 있다. 길게 가지는 않는다. 으레 무전이 오기 때문이다. 


계속 말하기도 입 아프지만 어쩐지 재수가 없더라니.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은 세 번째엔 기어이 진짜 늑대를 만나기 마련이다. 기수의 경우는 반대다. 양치기 소년을 셋 거쳤더니 진짜 늑대가 나왔다. 도와달란 무전 하나에 슬렁슬렁 가 봤다가 봉변당했다. 잡아야 할 놈이 손버릇이 영 안 좋다는 뜻이다. 입버릇 또한. 포위망이 좁혀지자 입에 쌍욕을 물었다. 이미 눈이 맛이 갔다. 이부키 아이가 약 낌새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딱 봐도 동공이 제정신이 아니구먼. 혀를 찼다. 성가시다. 안개비였던 빗줄기가 거세졌다. 하도 떨어져 아무리 와이퍼로 닦아내도 시야는 얼룩지기만 했다. 이부키 아이가 맘이 급해 차에서 내렸다. 기껏 마른 운동화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12시 넘었는데 이러기 있어? 날짜 지났잖아!”


이부키 아이가 소리 질렀다. 내딛는 발마다 철벅거린다. 거대한 수면 위를 달리는 것만 같다.


“24시간이야? 오전 9시 기준인가보지.”


이어폰 너머 목소리가 침착했다. 빗소리가 섞여 들렸다. 시마 카즈미는 시간상 어제부터 걸친 오늘의 불운에 익숙해졌다. 불운이 영원히 이어지더라도 어떻게든 감내할 태세였다. 이부키 아이의 주둥이로부터 오는 불행도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체념은 쉽다.


“그러니까 근무 시작 전부터 재수가 없었다고! 적어도 오전 7시부터는 재수가 없었어!” 


이부키 아이가 항변했다. 


“오전 7시도 앞으로 한참 멀었어.”


지금 형사만 넷이 쫓고 있다. 모두 비를 맞고 있다. 운동화가 젖는 정도는 약과였다. 이부키 아이는 바닥에 한 번 굴렀다. 장르로는 늘 액션(블록버스터)을 선택했지만 실제 액션장르의 삶은 정말 힘든 거였다. 비가 오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흰 옷 따위 입지 않았을 것이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온 탓이다. 그게 또 하필 흰색이라서. 하필은 반복되고 거듭된다. 확실히 오늘 이부키 아이는 재수가 없다. 주머니 속 낙첨일 복권과 건물에 박힌 도시의 네모난 별들과 옆에서 똑같이 구르는 시마 카즈미가 그나마 위안이다. 난 정말 약이 싫어. 약쟁이는 더 싫고. 시마 카즈미가 속으로 이를 가는 게 빤히 보인다. 동감이다. 역시 파트너. 이심전심이 아닌가. 입을 열자 비만 들어찬다. 동의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부키 아이도 약이 정말 싫다. 원래도 싫었는데 이런저런 일이 많았던 터라 싫은 걸 넘어 지긋지긋해졌다. 


“그나저나 진짜 날래네! 젠장!” 


마냥 쫓고 쫓기기만 한 건 아니고 몸싸움 있었더니 팔이 멍투성이다. 정강이도 그렇다. 도와달라고 친구라도 불렀는지 약쟁이는 어느 순간 둘이 되었다. 결론적으론 둘 다 맥없이 쫓기고 있으니 아주 멍청한 짓이었다. 게다가 형사도 부를만한 친구가 얼마든지 있다. 지원은 여섯을 훌쩍 넘었다. 쫓는 쪽도 쫓기는 쪽도 전부 낭패라는 표정이다. 대체 무엇을 위한 추격전인가.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커졌다. 멈출 수도 없다. 이래서 약쟁이가 싫댔다. 파고 들어가면 결국 이렇게 되니까! 물론 눈앞에 있는 이상 놓칠 생각은 없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 폐건물이나마 비 막아줄 곳으로 들어와서 다행이다. 찰박이는 물가를 건너 육지를 밟는 느낌이다. 눅눅한 먼지를 가로지른다. 허옇게 피어오르는 입김에서는 단맛이 난다. 동시에 입천장이 바싹 마르는 것이 느껴진다.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를 찾는다. 연계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임에 동시에 사적으로 자리 잡은 습관이다. 시마 카즈미의 위치를 확인하는 게. 속 어느메의 음침한 집착이기도 하고 갈급한 바람이기도 하다. 바로 북극성을 찾는 것이다. 북극성을 찾기만 하면,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부키! 북극성이 들린다. 생생하게 들린다. 무전이 아닌 갈라진 목소리로. 근처다. 시마 카즈미가 이부키 아이를 찾는 목소리도 별 헤아리듯 한다는 걸 안다. 저녁밥은커녕 초코바에 커피하나 먹었다는 게 생각났다. 고작 그거로 지금 잘도 뛰고 있다. 저놈들 윗선에서 꼬리를 자르기 전에 잡아서 뭐든 줄줄 토해내게 하면 좋겠다. 발소리가 저 위에서 같이 뛴다. 시마 카즈미가 2층에 있는 것이다. 반짝인다. 시마! 별이 아닌, 건물마다 박힌 네모난 이야기도 아닌, 살아있는 그의 지표. 시마 카즈미가 고개를 돌려 난간을 너머 이부키 아이를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쳤다. 그때 오감이 열렸다. 들어오는 정보들을 가닥가닥 다 분류해 낼 수가 있었다. 쇠 냄새. 비 냄새. 먼지 냄새. 축축한 시멘트 냄새. 멍으로 얼얼한 손목.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 몇 발자국인가의 거리. 팔목에 수갑을 걸면 끝이다. 하루는 최악이고. 더러워진 신발이 눈에 띈다. 배가 고프다. 그래도 얼마든지 뛸 수 있겠다. 북극성만 있다면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다. 이부키 아이는 잘 할 수 있다. 숨을 헐떡이면 모든 잡념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밀려들어오기만 할 뿐, 그 어떤 것에도 결론은 없었다. 천천히 시마 카즈미를 눈으로 찾으면 시마 카즈미가 다가왔다.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잡는지 치는지 망설이는 듯한 손짓이었다. 돌아가자 했다. 그가 말하는 돌아가자는 곳도 알 수 없었지만 이부키 아이는 대충 그러마했다. 이윽고 숨이 가늘어졌다. 


어디로 돌아가나 했더니 분주소다. 오죽 사지육신이 엉망진창이었어야지. 몸도 마음도 그랬다. 보다 못해 좀 씻으라 했다. 씻고, 좀 쉬고, 그러고 해. 말이 고와봤자 축객이었다. 기력도 없어서 시마 카즈미도 이부키 아이도 고개만 끄덕였다. 팔을 늘어뜨려 덜렁덜렁 흔든 채 분주소로 기어들어갔다. 거듭 말해 유난한 하루다. 그래프가 있다면 이쯤이 정점이었을 것이다. 새벽 2시 경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불운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새 양말을 신어 더이상 짝짝이 양말이 아닌 부분이 가장 컸다. 이부키 아이는 가오를 되찾았다. 몸을 녹일 뜨끈한 국물은 컵라면으로 대신했다. 물을 넉넉하게 부었다. 아직도 점심나절의 불쾌함이 남아있어서 그랬다. 그런 실수는 두 번은 없다. 


“샤워를 하면 우울함이 녹아서 사라진다지. 그래서 그런가봐.” 


종이용기에 코를 처박던 이부키 아이가 가설을 제시했다. 쓸모없었다. 시마 카즈미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비에는 녹질 않는가보다? 말하려다가 삼켰다. 아직 7시간이나 남아 있었고 그는 오래 버틸만한 체력을 남겨 두어야 했다. 말을 아끼는 것이 상책이다. 참을 인을 새긴다. 후루룩 들이마신다. 남은 시간 동안 얼마나 더 새겨야 할지 암담하다. 4일에 한 번 꼴로 똑같은 암담함을 맛보면서도 시마 카즈미는 매번 새롭다. 연애는 질리지 않는 게 최고라는데 이렇게까지 새로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연애조차 아닌데.


드디어 비가 그쳤다. 여전히 날은 흐렸다. 그럴듯한 일출도 없이 불분명한 경계 속 인식하지 못할 범위에서만 사위가 밝아졌다. 이제는 매번 빨간불에 발목 잡히지 않고 다섯 번에 한 번은 파란불을 받아 그대로 지나가기도 한다. 

어차피 낙첨일 복권은 주머니에 넣은 그대로 잃어버렸다. 찢어진 귀퉁이만 젖어 겨우 남아있었다. 거의 긁어내듯이 했다. 보잘것없는 흔적이었다. 대체 어떻게 뛰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이부키 아이는 낙담했다. 부적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결국 부적 역할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사라지고 나니 상실감이 장난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정당한 불운을 모조리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시마 카즈미는 복권을 가방에 넣어두었었다. 재수 없는 이부키 아이의 복권과는 달리 그 복권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것 또한 낙첨이리라. 그래도 이부키 아이에게는 단 한 푼도 내어주지 않을 작정이다. 이부키 아이가 주었으니 이건 이제 시마 카즈미의 것이다. 이른바 받았으면 땡. 그렇기 때문에 안녕을 고하는 뒤통수가 붙잡혔을 때 아차 싶었다.


“시마.”


24시간 들은 소리 중 가장 낮은 목소리였다. 이부키 아이는 한참동안 우물쭈물했다. 시마 카즈미가 말을 기다리다 발을 구르고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우물쭈물했다. 입이 벌어졌다 다물어졌다 반복했다. 뻐끔거렸다. 단어는 몇 번이고 허물어졌다. 그러다 겨우 꺼내는 말이 구차했다. 이 말 하나 꺼내기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이번에야말로 이부키 아이는 지쳐버렸다. 단 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나 시마 집에 뭘 두고 갔어.”


그 스스로가 분실물인 듯한 표정으로, 약간은 울상 지었다. 내뱉는 말마다 그답지 않게 망설임을 돌돌 감아, 시마 카즈미가 듣기로는 마디마디마다 절뚝이고 있었다. 짝짝이 젓가락질처럼. 시마 카즈미는 비슷한 소리를 들어봤다. 사실 아직도 듣고 있다. 작은 환청을. 캔을 따는 소리다. 딸깍거린다. 절뚝인다. 정말로 커다란 분실물이다. 알고 있어. 네가 개를 놓고 갔더라고. 아주 훨씬 전부터. 시마 카즈미는 이 말도 삼키고 만다.








05 And dog 



이동 이래 키쿄 유즈루와는 공적으로 만날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조직의 일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고 한두 번도 아닌데다가 사적으로 못 만날 사이도 아닌지라 다들 당면한 현실 앞에 덤덤해 했다. 사실 그보다는 매일매일 쏟아지는 일에 치이느라 감상 떨 시간조차 부족했다는 게 맞겠다. 개편을 하고 또 해도 사건 사고는 끝이 없고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24시간을 뛰어다닌 끝에 날이 밝으면 기진맥진해서는 술상에 앉아 이마를 박거나 삐딱하게 턱을 괴는 게 다였다. 술집 문 너머에선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직장인들이 바쁘게 지나다녔는데 날이 잘 벼려진 감각들이 때마다 구둣발 소리를 주워들었다. 지친 형사들은 그 번잡한 잡음을 술안주 삼아 홀짝거렸다. 흩어졌다가도 어딘가에서 어떻게든 다시 만나는 게 사람 일이야. 진바 코헤이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장처럼 말했다. 찰랑찰랑한 술잔에 코를 박고 흐물흐물하게 말하는 바람에 진중함은 다소 떨어졌으나 속에 단단한 뼈가 있었다. 경시청으로 돌아간 코코노에 요히토의 일마저 전부 아우르는 말이었다. 근속 35년의 짬바는 바로 이런 곳에서 묻어난다. 시마 카즈미가 겉핥기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마주앉은 이부키 아이가 장단을 따라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래그래, 진바 코헤이 말이 다 옳소, 라는 뜻으로 끄덕이는 건지 그저 끄덕이며 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평소의 이부키 아이를 생각한다면 단연코 후자가 맞았겠지만. 

변화하면서도 그대로인 일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숱한 사람들과는 달리 이부키 아이는 대놓고 섭섭함을 표한 유일한 사람이다. 현재 대장이 그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입으로나마 자주 키쿄 유즈루를 찾았다. 대장이 대장일 때가 훨씬 좋았어, 하고선. 이부키 아이 안에서 키쿄 유즈루는 끝내 대장의 직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앞으로도 이부키 아이의 머릿속에서 키쿄 유즈루는 계속 대장일 것이다. 습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존경과 호감, 기타 등등을 모두 담아서. 그 정도만 했으면 별 문제가 안됐다. 그럭저럭 흐뭇한 마음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부키 아이가 새로운 대장도 대장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여러 면면이 대장이란 이름 아래 복잡하게 혼재되었다. 이 사람도 대장이고 저 사람도 대장이고, 온통 대장이었다. 대장이, 대장인데, 대장은 이 정도는 눈감고 넘어가 줬는데, 근데 대장은 말야…. 거듭되는 대장들은 이부키 아이의 혓바닥 아래서 얼굴을 모른 채 서로 부딪혔고 그리하여 혼란하고 시끄러웠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가 전, 현 대장을 구별이나 하고 지칭하는 건지 늘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의심을 표하기엔 제 귀가 어지럽고 따가운 게 우선인지라 바닥에 가깝게 남은 기력은 번번이 이부키 아이 주둥이를 틀어막는 데에 전부 소진되었다. 시마 카즈미도 이럴진대 당사자인 키쿄 유즈루의 번거로움이란 말도 못한다. 키쿄 유즈루는 이부키 아이의 호칭을 몇 번이고 고쳐 주려 했지만 얼마 못 가 두 손 두 발 들어 버렸다. 언젠가 한 번 이부키 아이가 제대로 된 직함으로 불러준 적이 있었는데 막상 그러니 듣기에 너무나도 어색하더라는 것이다. 과연 시마 카즈미 상상 속에서도 어색했다. 상상 속 이부키 아이가 올바른 직함을 떠올리려 머리를 쥐어 짜내는 모습부터 이미 어색했다. 상상 속 이부키 아이는 팔짱을 끼고 허리를 한껏 수그리며 에, 에에…, 에, 그러니까…, 잠깐만 말하지 말아 봐! 내가 말할 거니까! 를 반복하기만 했고 말끝은 점점 흐려져 가다가 이윽고 투명해져 머그컵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머그컵 바닥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니 이부키 아이의 날숨에서 커피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역시 어색하지?” 

“그렇군요.” 


실제도 그다지 다르지가 않았나보다. 키쿄 유즈루와 시마 카즈미는 씁쓸한 미소로 동의를 주고받았다. 이래저래 이들 사이에서 이부키 아이의 이미지는 바닥을 보이다 못해 속살을 드러낸 지 오래다. 이부키 아이 본인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상당히 골을 냈을 일이다. 하지만 그는 마침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아마도 서에 보고하러 갔을 텐데 그 김에 오만 사람 오만 책상 전부 쭐래쭐래 달라붙어 참견하고 오자면 한참일 테다. 이부키의 아이의 부재가 시마 카즈미와 키쿄 유즈루를 조금이나마 들뜨게 했다. 자고로 없는 사람 얘기하기가 가장 쉽고 재미있는 법이다. 직위나 자리를 떠나 사담의 영역에서 사람을 놀릴 때의 그들의 눈매는 장난기가 흠씬 짙어지고 짓궂은 미소는 안으로 오므라든다. 얇은 눈꺼풀 아래선 농담이 꿈틀거린다. 쌜쭉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흥흥흥. 키득키득 웃고 있노라니 막 분주소로 돌아온 이부키 아이가 뒷담의 현장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가늘게 베어낸 눈꼬리에 날이 섰다. 과연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이부키 아이. 이럴 때만 날카로웠다.


“다 들렸어. 시마. 내 욕했지?”

“내가 한 거 아냐.”

“어쨌든 했다는 거잖아?! 파트너, 실망이다….”


사실 안 들렸지만 일단 찍고 본다. 시마 카즈미와 같이 뒷담 까던 키쿄 유즈루는 입에 무언가를 무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마침 손 안에 딱 알맞은 게 있다. 커피를 마신다. 시마 카즈미가 내놨던 커피가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온기는 사라졌으나 상관없었다. 아직 장난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뱅그르르 곡선을 그린다. 눈앞에선 이부키 아이와 시마 카즈미가 나이에도 안 맞을 말다툼을 하고 있고. 키쿄 유즈루는 그만 왈칵 그리움에 젖어든다. 그리움이라 할 것도 없이 짧은 시간이었는데다가 실상 현재조차 그 시간으로부터 늘어난 연장선임에도 어쩔 수 없었다. 오래된 커피메이커에서 뽑아낸 커피 맛이 한결같아서다. 물인 양 연하게 넘어가다가 끝에 가서야 텁텁하게 사라지는 맛. 어쩜 이렇게 그대로일까. 향수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발하여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조차 노랗게 바래 놓고선 파도처럼 덮쳐들고는 했다. 

4기수의 분주소는 그대로다. 가구 위치하나 바뀌지 않았다. 잡동사니만 하염없이 쌓여간다. 처음에야 임시였다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한 번 자리 잡은 이상 이동은 요원함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다. 어찌됐건 굴러가는 시늉만 하면 윗선에선 다 괜찮은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임시로 시작되어 여전한 그 곳에 키쿄 유즈루가 다 식은 종이컵을 쥔 채 앉아 있다. 진바 코헤이의 말대로다. 같은 기관이고 공조가 기본인 이상 어떻게든 만날 일은 생긴다. 키쿄 유즈루가 도로 이곳에 앉아 일 얘기를 하며 커피를 대접받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비록 객의 입장이겠지만. 그럼에도. 괜한 감상에 젖지 않기 위해 종이컵 끝을 꾹 씹었다. 씹어 물은 종이컵 가장자리가 구깃구깃 구겨진다. 


“이쪽은 여전하네.” 


고르고 고른 끝에 나온 말이다. 흔하디흔한 안부인사에 슬쩍 얹어서. 그리움을 완전히 걷어내지는 않았다. 


“그런가요.” 

“그렇죠?”


대답은 비슷했다. 서로 다른 감정만 실은 채 억양만 정반대 높낮이로 흘러갔다. 시마 카즈미는 웃음은 바닥에 깔렸고 이부키 아이의 웃음이 옥타브 저 위로 내달렸다. 카랑카랑하다. 서로 반발하며 멀어지려는 웃음소리 사이로 키쿄 유즈루가 중간점을 잡았다. 후. 그 이후로는 서류를 갈무리하는 푸닥거리가 모든 화기애애함을 덮었다. 그렇지. 그저 놀러온 게 아니지. 일 때문에 왔지. 수사로 뭣 좀 물으러 왔었지. 초동수사의 발이 안 뻗은 곳이 없으니. 핏자국으로 점철된 얘기를 하는 옆에서 이부키 아이는 이제사 키쿄 유즈루가 반갑다며 계속 떠들었다. 참견도 잊지 않았다. 용의자 사진을 어깨 너머 구경하다가 느낌이 영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르르르르. 의자 바퀴가 요란하게 분주소를 가로질렀다. 여전히 대장이라고 불렀다. 키쿄 유즈루가 일어나 분주소를 나설 때까지. 손을 크게 흔들었다. 대장, 잘 가요! 




그렇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여전하다. 내부에서야 많은 것이 요동치고 있으나 기껏해야 상자 안의 잔물결이다. 잔물결은 표가 나지 않는다. 장난감 상자 같은 우당탕탕 분주소는 넘실넘실 가벼운 파도 같은 꽁트를 반복하며 오래된 간이역마냥 유지된다. 키쿄 유즈루같이 떠난 사람들만 마냥 좋았다 기억하며 그리워하는.(하지만 돌아가라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1기수와 4기수를 함께 건사할 적 키쿄 유즈루에게는 피곤한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루는 평소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더 바쁘고 어쨌거나 시간은 간다. 퇴근은 저녁이 훌쩍 지나서였다. 시마 카즈미는 일이 더 길어질 새라 가방부터 든다. 아무리 일이 좋아봤자 일은 일인지라 퇴근을 반길 일이다. 도망을 가야겠다. 사건으로부터건 시바우라서로부터건 혹은 이부키 아이로부터건. 하찮은 시도는 한 발 떼자마자 무산됐다. 떨어뜨린 뒤꿈치로 칼발의 운동화가 바로 따라붙었다. 톡톡톡. 운동화 끝이 톡톡톡 짧게 두드린다. 노크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시마쨩. 나 또 뭘 두고 갔지 뭐야.”


이부키 아이는 부러 다정하게 말한다. 한껏 귀여운 척을 한다. 가성으로 시마쨩 시마쨩 불러 가면서. 아주 간드러져 죽겠다. 그래? 아이쨩은 정말 바보네. 듣고 있노라니 빈정거림이 그만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빈정거린다는 것마저 못 알아 들을까봐 시마 카즈미는 모난 모음과 툭 튀어나온 자음을 고대로 들이킨다. 날 선 말들은 목구멍에서 걸걱거린다. 이부키 아이는 언제까지고 이 얕은 수가 통할 줄로만 안다. 실제로도 통하고 있으니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마 카즈미가 봐 주고 있어서다. 부디 그걸 알아야 할 텐데. 

이부키 아이는 매번 알량한 수를 쓰고 시마 카즈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매번 이부이 아이를 끌고선 제 집으로 간다. 헤어지고도 바뀌지 않은 현관 비밀번호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집주인이 현관에 몸을 전부 밀어 넣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다는 것 정도다. 그는 시마 카즈미가 신발을 벗는 것까지 기다려 한 텀을 쉬고 들어간다. 실례합니다아. 딴엔 예의를 차린 인사를 한다. 어쩔 때에는 ‘실례~’ 정도로 너무 짧고 또 어쩔 때에는 ‘실례합니다아아아아~’ 로 지나치게 길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직 뒤집어 쓴 가식을 잃지 않았다. 손가락을 구부려 운동화 두 짝을 가지런히 모아 돌려놓는다. 딱 여기까지다. 양말신은 발을 바닥에 딛고 나면 그는 모든 뼈라도 잃은 듯 순식간에 흐느적거리며 무너진다. 시마 카즈미의 작은 거실은 이부키 아이로 꽉 차버린다. 두고 온 게 뭐냐고? 잊어버렸단다. 아주 뻔뻔스러웠다. 


“내 집에서 꺼졌으면….”

“응? 시마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다 들렸어. 내 욕했지?”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눈치. 들리지 않아도 아는 척 찍기. 시마 카즈미는 확신할 수 있다. 분명 이부키 아이는 정신머리를 두고 왔다. 그리고 그건 결단코 시마 카즈미의 집에는 없다. 아주 아주 훨씬 전, 옛날 옛적 그 언젠가 이부키 아이 스스로 망가뜨리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어느 열쇠처럼 집어 던졌을 수도 있고. 

그래, 시마 카즈미는 아닐지언정 이부키 아이는 여전하다. 키쿄 유즈루에게 답하던 그의 ‘그렇죠?’가 높은 톤이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여전히 딸깍이는 웃음을 끌고 들어와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오래 전에 놓고 간 그것을 전혀 거두어 갈 생각 않는다. 마음에 드는 곳에서 늘어져 눕고 리모컨을 찾아 채널을 돌리며 냉장고를 턴다. 예전 잠시 연애했을 적, 이부키 아이가 사왔던 몫은 진작 사라졌음에도 제 것인 양 맥주를 딴다. 시마 카즈미는 전부 청구하리라 마음먹었다. 오늘도 머릿속 장부에는 숫자만 빼곡히 늘어난다. 은연중에 지게 된 빚을 전혀 모르는 이부키 아이는 신나게 떠든다. 


“시마 듣고 있어?” 


시마 카즈미는 안 듣고 있었다. 개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와도 아무런 연관이 없어 생뚱맞기만 하다. 치와와가 짖고 사모예드가 봄날 민들레 홀씨마냥 털을 뿜는다. 리트리버는 꼬리를 흔든다. 이부키 아이의 묘사가 한없이 목가적이긴 한데 어쩌다 튀어나온 개인지 장부의 숫자를 세던 시마 카즈미는 혼란하기만 하다. 왈왈 짖는 와중 딸깍이는 개 또한 있다. 이부키 아이가 맥주 캔을 하나 더 따고 있어서다. 찬장에 숨겨둔 땅콩봉지도 멋대로 뜯어 주워 먹는다. 한 움큼 넣고 어금니로 씹는다. 아작아작. 맥주를 뺏기지 않으려면 시마 카즈미도 경쟁적으로 맥주를 따야만 한다. 그 와중에 건배를 잊지 않는다. 건배. 한동안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뚱땅거리는 음악소리와 얇은 금속 부딪히는 소리만 들린다. 이부키 아이는 목을 꺾어 목젖을 드러내고 시원하게도 들이킨다. 이게 바로 사는 맛이지. 사는 맛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이부키 아이는 딱 한 나절이 못 되게 머물다 간다. 그러니까 아침에 온다면 점심을 먹고선 가고 저녁에 온다면 자정이 지나기 전에 간다. 그리고 시마 카즈미의 집에 제 자리인 양 소지품을 두고 간다. 흘리고 간다. 숨기고 간다. 이부키 아이가 아예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 셈이다. 이부키 아이가 흘리는 소지품은 너무 절묘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시마 카즈미도 여간해선 눈치 채지 못할 뿐더러, 정작 이부키 아이 본인조차도 어디에 뭘 두었었는지 헷갈려 한다. 다음번 방문을 위한 핑계거리인지라 아무래도 괜찮다. 돌려놓았던 신발을 신고 마중 나온 시마 카즈미 앞에서 이부키 아이는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한다. 짧은 망설임이다. 찰나에 가까운.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이부키 손바닥에 남은 손톱자국을 시마 카즈미는 모른 척 한다. 어서 가라고 등을 떠밀 뿐이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불이 꺼진 현관에 오래도록 서 있다. 그가 끌고나간 신발자국을 찾으려 애를 쓴다. 이부키 아이의 부재를 제대로 실감하기 위해서다. 이 시간은 갈수록 길어져 이제는 숫제 5분을 넘어가기도 한다. 체감할 만큼 체감하고 나서야 시마 카즈미는 터덜터덜 방으로 되돌아간다.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 비로소 제 집 같다. 시마 카즈미는 되도록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려 한다. 이부키 아이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이 이부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훨씬 짧았으므로. 심지어 이부키 아이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의 대부분은 수면으로 소모된다. 무릇 기수라면 잘 수 있을 때는 잠을 자야하고 그 습관은 휴일을 가리지 않고 온전히 붙어있어서다. 눈을 감는다. 천천히 수면이 찾아왔다. 이로써 한 바퀴 돌았음이다. 시마 카즈미의 단순한 라이프 사이클은 이부키 아이를 얹은 채 그 모양 그대로 되돌아갔다. 24시간은 똑같이 돌아가고 샌드위치 속처럼 낀 귀한 휴일을 이부키 아이와 충분히 맛본다. 씹는다. 빈 맥주캔이 늘어난다. 교집합의 범위가 확장된다. 사적인 시간이 공유되고 중첩되면서 자연스럽게 삐걱거린다. 시마 카즈미는 슬슬 이부키 아이를 소파에 내버려 둔 채로 청소나 빨래 따위의 밀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시키기도 했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와 사귀었을 때도 얘를 집에 둔 채 집안일 따위에 시간을 소모하지는 않았었다. 이부키 아이는 손님, 혹은 애인의 자리로부터 일상의 일부로 끌려 내려왔다. 그가 멋대로 집안에 동화시킨 소지품처럼.




거의 대부분이 헤어지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대로라 이상하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그대로로 돌아가면 안 되는 사이였다. 분명 이상하긴 한데 당장은 깔끔하게 정리하거나 바로잡을 생각이 들지 않아 방치했다. 그랬더니 이보다 더 할리우드 연예기사일 수가 없었다. 이부키 아이도 인식은 하는 모양이다. 놀랍긴 한지 간혹 혀를 내둘렀다. 영락없이 막장 가십이라도 주워들은 반응이었지만 정작 가십의 주인공은 자신들이었다. 와우, 잇츠 쿨. 베리 베리 쿨. 발음이 어설프게 문드러졌다. 우리 이거 되게 멋있지 않아? 하나도 안 멋있었다. 맥이 빠진다. 말도 못할 싸움과 협상과 숱한 이별의 퍼포먼스는 다 무엇이었나. 뭐긴 뭐겠어. 코미디지. 코미디 앞에 로맨스를 붙여보려다가 애써 부정한다. 로맨스, 멜로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비 오고 재수 없던 그날이 이 사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더 이상 줄무늬가 아니었던 흰 양말이 현관을 밟던 순간을 기억한다. 둥글게 젖어들던 바닥과 꼭 같은 물자욱을 남기며 젖어 들어가던 이부키 아이의 표정. 일종의 방점이었다. 그 이후 이부키 아이는 강에 열쇠를 집어던진 일인 양 다 잊어버린 듯 노골적으로 달라붙었다. 시마 카즈미는 어째서라고 묻지 않았고 아마 물었대도 이부키 아이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마 카즈미는 체념했다. 방치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다. 절단된 연애의 단면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단적인 예로 한 달 동안 주고받던 성적인 스킨십은 싸그리 도려냈다. 이제 이부키 아이는 지극히 건전하게 과자를 뜯어먹으며 저 혼자서만 깔깔거렸다. 의식한 게 빤히 보이는 적당한 거리가 시마 카즈미의 집이나 기수의 차 안에서 존재했다. 일부러 떨어져 앉는다기보다는 일부러 붙어있지 않는다는 쪽이 맞았다. 원래 연애란 노력이다. 노력해서 마음을 쏟고 노력해서 손을 뻗는 일이 연애다. 노력이 사라진 사이의 공간을 환청이 메꿨다. 딸깍딸깍. 보이지 않는 개를 쓰다듬고 싶어졌다. 이 또한 노력임에도. 허공을 쓰다듬다가 유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몇 글자를 더 추가해야겠다. 말미에 이 개의 행방을 적어줘야지.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로 멈출지언정. 




시마 카즈미의 집에는 유서가 있다. 취지는 알 만한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의 경찰 인생은 정년까지 총을 뽑지 않을 90퍼센트에서 영영 빗나가 버렸고 그로 인해 나름의 경각심을 느꼈음이다. 그때부터 썼다. 다소 미친놈의 극단적인 발상이라 할 만 하지만 그렇게까지 비관적인 문서는 아니다. 법적 효력도 없다. 기분 내키는 대로 간결하게 객관적인 몇 가지 정보만을 쓴 그것은 차라리 인수인계문서라고 할 만 했다. 그는 남기는 것에 대한 선택이 가능하다면 감정이 아닌 사무를 남기고 가고 싶었다. 그런 치기 끝에 나온 것이 이 한 장의 에이 포 용지다. 감정이 아닌 사무이니만큼 그때그때 재정 상황에 따라 유서는 개정되었다.   

이부키 아이는 문서를 본 적이 있다. 아예 본 적을 넘어서 시시때때로 펼쳐 보고는 한다. 그래서 추가되고 삭제되는 문구들도 전부 알고 있다. 그러면서 늘 욕을 한다. 시마 카즈미라는 인간이 이 한 장으로 정리되는 건 옳지 못하다고 했다. 소심한 반발이지만 그는 애초에 유서 자체에 부정적이다. 당장 구기지 않는 건 27번 항목에 당첨되지 않은 복권 한 장이 있어서였다. 오직 그 27번만이 이부키 아이의 충동을 막아 주었다.

이부키 아이가 제멋대로긴 했지만 남의 집안을 뒤져 은밀한 문서를 훌훌 넘겨볼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순전히 시마 카즈미의 잘못이었다. 테이블에 보란 듯 올라가 있어서 시선이 안 갈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마치 이부키 아이의 재가라도 바라는 것 마냥. 이부키 아이는 정말로 별거 아닌 줄 알았더랬다. 시마 카즈미도 막지 않았다. 설마 나를 향한 러브레터는 아니지? 이야. 휘파람을 불며 펼쳤는데 글쎄 유서란다. 천하의 이부키 아이라도 당황할 만했다. 종이가 뚫릴 새라 코를 바싹 들이대고 읽어보았다. 단어 하나하나 화 낼 기력마저 모조리 빼앗아 가는 글귀였다. 냄비에 카레가 있으니 오늘 저녁은 그걸 데워먹으라는 듯한 여상한 어조로 얼마 안 되는 재산의 행방과 앞으로 갈 곳이 적혀 있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그것이었다. 지불의 방향과 보험과 기타 등등. 닥닥 긁어모아 더하고 빼면 한 줌… 치고는 좀 많고 두세 줌 되는 것 같다. 열심히도 살았네 진짜. 아무래도 부동산이 끼면 어쩔 수 없지. 이부키 아이는 일단 내용보다도 어조에 기가 질렸다.


“대체 뭘 인수인계하는 거야?”

“…내 재산을?”

“그거 얼마나 있다고….”

“피와 땀의 결정체지.”

“결정체라니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좀 더 다른 건 없어? 인생에 대한 반성, 고찰같은 거….”

“이부키 너. 시말서랑 헷갈리고 있어.”


정말로 이부키 아이는 찔끔 울었다. 속상해서 울었다기보다는 봉투조차 없는 종이 한 장의 삭막함에 어이없어서 눈물이 났다는 데 가까웠다. 가끔 생각하는 데 얘가 더 또라이야. 방울방울 남은 눈물 자국 때문에 시마 카즈미는 다시 유서를 출력해야 했다. 눈물자국은 감정적이니까. 

당시 파일명은 ver.3이었고 현재는 ver.7의 차례다. 집을 나갈 생각을 않는 개에 대해 쓰고자 한다. 그의 환청이 워낙 사적인 감정이라 시마 카즈미는 추가하길 망설이지만 결국엔 집어넣고야 만다. 돌리고 에둘러서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한 문장으로 압축하다보니 남은 건 캔에 대한 얘기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재산 목록 중엔 가장 잡동사니다. 업데이트 되는 유서를 이부키 아이는 심심할 때마다 펼쳐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마지막 문장은 43번 항목이었다. 한참을 본다. 무슨 뜻인지를 유추하려 한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개가 문제를 맞닥뜨릴 때 어떻게 하는지를 아는가? 고개를 돌리고 인간을 찾는다. 올바른 답을 제시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이부키 아이도 똑같이 했다. 우습게도. 아하하. 시마 카즈미는 소리 내서 웃는다. 그 날 이래 이어진 이부키 아이의 숱한 수작대로 노력을 해 보기로 한다. 에이 포 용지를 뺏고 고이 접어 올려놓고 손을 끌어 현관으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일은 현관에서였다. 그러니까 발바닥 모양 둥근 물자욱이 찍힌 그 자리. 아직도 축축한 것만 같은 그 자리로 되돌아가서. 이부키 아이도 기억할 게다. 이곳이 그 자리였음을. 그리고 ‘굳이’라는 이름의 노력을 더한다. 쭈그려 앉고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꺾어 입을 맞추는 단순한 노력이다. 환청 하나를 얼마 되지 않은 그 소유의 재산목록에 올린다는 건 그런 의미다.









06 챠우챠우  



최근 들어 두 사람 사이에서 소소하게 흥행하기 시작한 게임이 있다. 차가 멈추어 섰을 때,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때, 술을 먹을 때, 짬짬이 뜬 시간이 생길 때마다다. 보통 이부키 아이가 운을 뗌으로써 시작된다. 시마 카즈미는 받아주는 형태로만 이 게임을 진행하고 싶어 미적거리지만 이부키 아이 눈짓 두어 번에 올라타고 만다. 그 정도로 쓰잘머리 없는 게임이다. 다른 게 아니라 연애했을 적의 얘기를 하는 것이다. 소위 추억 팔이라고나 할 수 있다. 그렇게 해대고도 또? 시마 카즈미가 경악한다. 종 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그 짧았던 기간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소가 여물 씹듯 저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건져내 곱씹는다. 오랫동안 입에 머금고선 씹는다. 대화가 아닌 게임의 성격을 띠는 이유는 간단하게나마 규칙을 가지고 있어서다. 

첫 번째 룰은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한 가지씩을 언급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급적이면 좋았던 얘기만을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전에 말했던 내용과 겹치지 않을 것. 따로 명시되거나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규칙은 이게 전부다. 그 때문에 시마 카즈미는 골몰하고는 한다. 짧은 이부키 아이와의 연애에서 좋았던 점을 발굴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어서다. 그렇다고 해서 또 져주기는 싫었다. 정신 수양의 일환으로 게임을 받아들인다. 언뜻 도를 닦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세상 어떤 미물에게도 사랑스러운 점 하나쯤은 있겠지. 미물에게도 있을진대 하물며 이부키 아이라면야. 불행히도 자세히 보아야만, 아주아주 자세히 보아야만 하지만. 이런 심정이다. 

놀라운 점은 이부키 아이 또한 시시때때로 골몰한다는 것이다. 아니 네가 왜? 시마 카즈미로선 엄청나게 어이가 없다. 이부키 아이가 장고라도 하고 있노라면 대놓고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있지만 너는 아니지.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의 이런 철면피 같은 점을 좋아했다. 적어도 세 번째의 이부키 턴이 왔을 때 당장 입에 올렸을 정도로는 좋아했다. 시마, 너 가끔 되게 이상하게 당당한데, 나는 그거 좋았어. 뭐, 지금도 좋다고. 시마 카즈미는 당장 두 팔로 엑스자를 그렸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열렬하게 불복했다. 땡. 땡. 땡. 땡. 땡. 이건 무효야. 심판이 필요했다. 이 시비는 제삼자를 개입시키고 나서야 이부키 아이의 판정승으로 결론이 났다. 당연히 차례는 시마 카즈미 앞으로 돌아갔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머리를 쥐어 짜낼 시간이었다. 판정에 불복한 대가로 옐로카드 한 장 또한 덤으로 얹어 돌아갔다. 물론 처음의 규칙상 옐로카드는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게 되자 이부키 아이가 급조해서 만들어낸 페널티다. 옐로카드가 쌓이면 과연 어떻게 될지, 벌칙이 무엇인지 시마 카즈미는 모른다. 알았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아 입을 다문다. 




이부키 아이가 옐로카드를 내민 게 꽤 묘수로 작용했다. 이후 게임은 약간 아슬아슬한 선상을 탔다. 이른바 스릴이라 하겠다. 그리고 시마 카즈미는 스릴 안에서 안전성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보다도 훨씬 치졸해졌다. 사소한 곳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이를테면 빈 맥주캔을 잘 구기는 것마저 연애 중 좋았던 점으로 카운트되었다. 전화하면 3콜 이내로 받는 것?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에는 이부키 아이가 아랫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삐 소리를 냈다. 삐빗. 이거야말로 무효야. 시마 카즈미는 그의 치사함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이런 생활의 사소한 거 하나하나 좋았다는 얘기야. 너 그걸 모르는구나. 포장은 그럴듯하다. 오래된 빈티지 가게에 쌓아둔 소품처럼 흐리게 바라 주홍색 빛이 난다. 이내 노란색으로 점점이 번져나간다. 얼핏 보면 멋들어지기까지 하다. 호시절이었던 것만 같고 다 좋았던 것만 같다. 게다가 시마 카즈미가 이부키 아이 앞에서 그 연애 시절에 대해 좋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부키 아이는 시마 카즈미의 말솜씨 반, 뿌듯함 밤에 홀라당 넘어가 희미하게 납득한다. 너 모르는구나. 무지를 나무라는 데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다. 그렇지. 내가 얼굴뿐만이 아니라 센스에 손끝까지 전부 괜찮은 남자긴 하지. 와. 기가 막혀서. 시마 카즈미는 아직 이부키 아이 얼굴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입 벙긋하지 않았다. 이부키 아이의 무한한 자신감에 대해선 다섯 번째 턴에 언급했으므로 더 말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은 이렇다. 같은 일을 하는 데다가 근무 일정까지 맞아서 좋았단다. 쉬는 날이 겹치기 마련이니까.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게임 시작부터 나올 만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전 애인에게 하는 말로는 참 쓰레기 같은 이 칭찬은 바로 다음으로 너희 집 소파 정말 좋더라, 가 나오는 바람에 도긴개긴이 됐다. 너, 내가 아니라 소파를 사랑했구나. 소파를 열심히 고르지 말 걸 그랬다. 정말 열심히 고르고 고른 소파는 순식간에 후회 덩어리가 됐다. 이로써 게임은 발안자인 이부키 아이의 손에서 벗어나 엉망진창으로 비탈길을 굴러 내려갔다. 술을 잘 마셔서 좋았더라고 했다. 개중 정상적이다. 분위기는 없었어도 둘이 맥주 따서 마시던 소소한 시간은 분명 즐거웠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돌아온 건 동갑이라서 좋았다, 였다. 둘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틀렸다. 사실 나이 따위는 연애에 아무 상관 없었을 것이다. 이 오류에 대해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눈먼 장님처럼 밟고 지나갔다. 밥 먹느라 게임이 멈췄던 것도 있다. 막상 테이블 위로 밥이 올라오면 게임에 대해선 깡그리 잊어버렸다. 거의 내팽개치듯 했다. 시마 카즈미가 제일 먼저 그렇게 했다. 이부키 아이는 순순히 따랐다. 어디까지나 시간 때우기, 여흥 거리였음이다. 

시마 카즈미가 내내 떨떠름해 했을지언정, 이부키 아이는 충분히 즐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왜, 이런 걸 하느냐 물었더니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시마쨩이랑 ‘우우훗’한 얘기하는 거 재밌거든. 망설이지도 거창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눈도 저 멀리 돌려버렸다. 지나가는 구름을 셌다. 별 이유 아닌 양, 소솔소솔 솔바람이 귓바퀴로 지나가는 어투였다. 그에게는 가끔 과하게 낭만적인 면이 있었는데 이 다정함이 그날따라 시마 카즈미의 안쪽의 무언가를 쿡 건드렸다. 보들보들한 어느 부분을. 검고 축축한 콧등이었다. 꾹 들이대고 습기 어린 숨을 킁킁 내뱉더니 이내 앞발을 들고 박박 파 내려갔다. 구덩이가 도장을 찍은 듯 오래 남았다. 

그래서 다음 턴이 왔을 때,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가 섹스를 참 잘해서 좋았더라고 했다. 그냥 잘한 것도 아니고 ‘참’ 잘해서. 이부키 아이는 사레들린 마냥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콱 밝으려다가 반사적으로 무릎에 힘을 빼서 급정거엔 조금 못 미쳤다. 뒤통수가 좌석 시트에 부딪혔다. 탄력 있게 튕겨 올랐다. 퉁, 퉁, 퉁. 어우, 어우, 어우. 딱 튀어 오르는 만큼이다. 


“운전 좀!”

“내 잘못이야? 이번은 아니지! 운전 중에 그런 자극적인 얘기를 하면 어떡해!”


이부키 아이가 더 크게 놀랐다. 기함했다. 당장에라도 옐로카드를 낼 기세였다. 옐로카드라니 대체 무슨 규칙을 어겨서. 바보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시마 카즈미는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고 있었다(다른 때에는 전혀 아니었다는 뜻이다). 답변은 더없이 게임 취지에 부합했고 이부키 아이는 별수 없이 옐로카드를 거둬들였다. 일단 태도상으론 그랬지만 입술 모서리가 우물우물했다. 삐뚤어지다가 앙다물었다. 어깨가 자꾸만 치켜 올라갔다. 어우, 참 잘했대. 우쭐거렸다. 대놓고 깔깔대며 좋아했다간 시마 카즈미의 빈정이 상해서 다시는 어울려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애써 참고 담담한 척했다. 물론 의연한 이 모습은 순전히 이부키 아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시마 카즈미 보기엔 엄청 티가 났다. 눈썹 끝으로부터 손가락 끝까지 전부. 온몸을 배배 꼬는 것이 아주 몹쓸 꼴이었다. 눈썹을 찌푸렸다.

그다음부터는 한결 쉬워졌다. 한 번 극단적인 끝에 다다르고 나니 더는 빼거나 거칠 것이 없어졌다.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이제 서로의 장점이 아니라 그저 좋았던 한때, 시간이 되었다. 어느 한순간을 멈춰 놓고선 잔뜩 확대하고 집요하게 이야기했다. 영원히 박제될 시간이었다. 본래 이부키 아이가 기억하는 방식이 그러했고 그들의 본업이 경찰이기 때문이었다. 직업병이었다. 이부키 아이가 기억하는 세밀한 근경과 시마 카즈미가 기억하는 객관적인 원경이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을 줄이야. 내심 서로에게 감탄했다.




그때 말이야. 대개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너랑 아침에, 전시를 보러 갔을 때. 나 사실 전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이부키 아이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시마 카즈미는 관대하게 넘어가 줬으나 그라고 해서 뭐 전시를 잘 봤던 건 아니었다. 리스트를 만들고 나니 고상한 부류의 데이트 중 전형적인 게 전시라서 갔을 뿐이지. 문외한 둘이 미술관을 적당히 돌고 나온 것에 불과했다. 이부키 아이는 사전 지식은 배제한 채 그림만 보고 작가를 유추했고 공상에 불과한 추리는 시마 카즈미의 입맛에 들어맞았었다. 그리고 퇴근하고 영화 봤을 때 말이야. 아니, 그 영화가 뭐였더라. 정작 영화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영화관의 분위기만 기억났다. 낡은 영화관이었다. 어쩌다 보니 퇴근한 아침 충동적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시설은 허술했고 먼지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곰팡내가 났다. 상영관도 작았다. 좌석은 대부분이 비어 있었다. 텅 빈 공간 자체로 자연스러워서 의식하고 보아야만 검은 뒤통수 한둘이 겨우 보였다. 둘의 존재감도 낡은 공허함에 묻혀 곧 사라졌다. 그런 극장에서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 안 나는 영화를 집중해서 보았다. 어쩌면 고개를 삼십도 각도로 올린 채 화면을 바라보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했던 건지도 모른다. 대사는 전부 귓구멍을 타고선 멀리멀리 흘러가 버렸고 그런데도 그 순간을 언급할 정도로 좋아했던 건 이것 또한 전시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데이트였기 때문이었다. 부대끼는 속에 억지로 쑤셔 넣는 팝콘과 팔걸이를 넘어 슬금슬금 다가오는 이부키 아이 손가락도, 영화 끝까지 스크린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꼬여오는 손가락을 톡톡 치던 시마 카즈미의 능청마저도.

한참 후에 이부키 아이가 덧붙였다. 과장되게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눈동자가 도로로록 굴러갔다. 


“앗! 시마. 생각났어! 그거, 멜로영화였어.”


무슨 대단한 말을 하려나 싶더니. 들어주지 말 걸 그랬다. 시마 카즈미 소름이 다 돋았다. 뭐 할 말이 있었겠는가. 그땐 우리 사이에 멜로가 있긴 있었네.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그렇지. 멜로가 있었지. 이부키 아이가 맞장구쳤다. 


“지금에야 스릴러지만 말이야.”

“스릴러?”

“네가 그랬잖아. 이제 우리 사이엔 공포, 스릴러, 액션뿐이라고. 지금 고르라면 스릴러를 고르겠어. 음…. 그래. 지금은 그런 기분이야.”

“뜻이 맞으니 다행이군.”

“아니 전혀 안 맞거든. 시마는 스릴러를 좋아하는 거고, 나는 지금 싫은 걸 빼다 보니 이렇게 된 거고.”



오늘은 액션(블록버스터) 기분이 아니라서. 내일은 그런 기분이 되겠지만. 덧붙였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마 카즈미는 내일도 액션은 사양이었다.

멜로영화란 것까지 알았음에도 영화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배우조차도. 떠오르는 장면은 햇빛이 떨어지는 파란 하늘이 다다. 어느 영화에서도 한 번씩은 나올 법한 흔한 장면이었다. 팝콘의 소금기 있는 버터 냄새가 입 안 전체를 잠식할 것 같아서 더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극장에 대한 기억이 시마 카즈미에게 남았다면 영화에 관한 것은 온전히 이부키 아이만의 것이 되었다. 게임은 다음 판으로 넘어간다. 일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났을 때, 시마 카즈미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장르의 개척이었다. 멜로도 공포도 스릴러도 액션도 아닌 로드무비였군. 이거.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고 핸들을 돌리며 가끔은 차에서 내려 달려야만 하는 로드무비. 이 장르에서도 어김없이 하늘은 나온다. 날씨가 더럽게 맑았다. 목적지도 없고 코스가 정해져 있는데 무슨 로드 무비야. 이부키 아이가 창을 열었다. 멜론빵호와는 다르게 버튼 하나만 눌러도 창은 부드럽게 내려간다.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이마부터 훑어 내려갔다. 멋진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끈하고 텁텁했다. 이에 지지 않을 만큼의 더운 숨을 토했다.




돌아온 이부키 아이의 턴에서 그는 사귀었을 때의 시마 카즈미가 훨씬 더 살가웠다고 했다. 시마 카즈미는 또다시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결백을 주장하는 건 아니었다. 애당초 이건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에게 살가웠던 적이 없었다. 


“사귈 때 내가 다정했어? 이부키. 네가 취했던 거야. 그건.”

“시마쨩…. 그게 더 상처야.”


상처받은 척했지만 납득하지는 않았다. 판정은 여전히 이부키 아이에게만 유리하게 기울었다. 시마 카즈미가 이 일로 게임에 보이콧을 선언해 게임은 한동안 중단되었지만, 게임을 대신한 끝말잇기에 지친 이부키 아이는 기어이 게임을 부활시켰다. 말했잖아. 이대로 없던 일로 만들기엔 아쉽다고. 미련이 그득해 보였다. 연애가 아니라 연애담 그 자체에. 핑계인 분실물을 찾으러 시마 카즈미 집에 쫓아와서도 완만하게 턴이 오갔다. 실없었다. 드러누워서, 혹은 앉아서, 아니면 각자 무얼 보다가 툭툭 내뱉었다. 이부키 아이가 광고를 보다가 툭 던지면 시마 카즈미가 한참 후에야 이부키 아이를 보내며 함께 던져버리는 식이었다. 그럼 이부키 아이는 귓구멍 안쪽으로 말 한마디를 고이 안고 집으로 갔다. 귓바퀴가 팔랑팔랑했다. 발걸음이 한껏 가벼웠다.




보이콧 기간을 제외하고도 게임은 꽤 길게 이어졌다. 가뜩이나 짧은 연애 기간, 내놓을 만한 장면들이 점점 떨어져 갔다. 샅샅이 훑고 나니 막판에는 내놓을 것들도 변변찮아 졌다. 시시한 추근거림을 거듭하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의 안경마저 입에 올리고 말았다. 네 물건 우리 집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거.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워서 이상하더라고 했다. 마치 삶에 쿡 끼어 들어오는 이부키 아이 그 자체 같았더랬다. 그는 그때에도 테이블 아래에 끼어있는 이부키 아이가 덜렁덜렁 들고 왔다가 자연스럽게 흘리고 간 잡지 표지를 보고 있었다. 전자제품 관련 잡지였다.


“이상한 게 좋았던 점이야? 그거 룰 위반이야.” 


이부키 아이는 궁시랑거렸다. 햇볕 쬐어 바싹 마른 몸을 뒤집었다. 하지만 시마 카즈미가 이상하다 퉁 쳤던 감정 자체가 좋았던 거라고 어물거리자 대충 눈감고 넘어가 줬다. 시마 카즈미는 판정이 이부키 아이에게만 유리하다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이부키 아이도 어쩔 수 없이 시마 카즈미의 억지에 완만하게 넘어가 주는 일이 많았다. 깐깐하게 굴다간 두 번째 보이콧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꺼리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하기 그지없는 게임이다. 시마 카즈미가 쓴 웃음 지었다. 


“허. 그래도 계속할 생각인가 보지?”

“그러엄.”


게임의 끝은 보이콧이나 중첩되는 옐로카드나 룰 위반이 아니다. 내놓을 말들이 다 토하고 한 달분의 상자는 바닥을 드러내고야 만다다. 할 말이 없어져 게임은 끝이 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반에 잡다한 우스갯소리가 오갔던 것에 비해 게임 종막에 다다를수록 본래 취지에 가까워졌다. 


“너 집에 돌아갈 때 손 한번 잡았다가 떼고 갔던 거 알아? 귀여웠지.” 


이부키 아이는 정말 인식하지 못했던 듯했다. 눈이 튀어나오려 했다. 꼬리를 미세하게 떨었다. 뒤늦게 찾아오는 수치심에 손 마디마디를 꿈틀거렸다.


“세상에. 내가 그랬어? 설마.” 


시마 카즈미가 몇 안 되게 깜찍하다 여겼던 수작질이었는데…. 강하게 부정했다. 순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으로서 이부키 아이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이 뒤늦게야 판명이 났다. 정말로 다 지나서야. 그렇다. 닥닥 긁은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진심이다. 이것들을 말하기 위해 이 긴 게임을 해왔던 것만 같았다. 게임은 아주 기나긴 마음의 준비였던 셈이다. 천천히 땅을 다지는 것처럼. 진심은 서서히 올 거라 예상했던 그 지점에서도 훨씬 뒤, 어느 날엔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수 차에서였다. 둘 사이의 중요한 얘기는 기수 차에서만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양 대다수의 진짜는 거기에서 오가곤 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온갖 소음이 지나가는 가운데 이부키 아이 목소리 홀로 나직했다. 이부키 아이가 첫 운을 떼는 순간 시마 카즈미는 당장이라도 무전이 들어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현실은 매정하여 찰나의 세계는 아무 사건 없이 무진장 평화로웠다.


“네 심장 소리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 사귀지 않으면 이거 힘들더라. 부끄럽잖아?” 


아, 그럴 때가 있었다. 시마 카즈미의 가슴을 베고 누워 이부키가 가늘게 숨을 쉬던 때가. 아주 가끔 그랬다. 시마 카즈미의 집이거나 이부키 아이의 집이거나 했다. 팔로만 큰 몸을 끌고 기어 와서는 정수리를 냅다 박았다. 힘을 전부 빼고선 온전히 무게를 실어버렸고, 그래서 퍽 무거웠다. 깔린 귀는 한껏 짜부라졌을 테지만 그런 귀로도 아마 잘 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의 최대한 죽인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미약하여 시마 카즈미조차도 실제 듣는 소리인지 상상하는 소린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알고 있다. 우리는 숨죽여 각자의 악몽을 더듬었다. 짧은 연애 기간을 유지했던 핵심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스스럼없이 심장을 베고 누울만한 사이가 연애밖에 생각나질 않아서였다. 어쩔 줄을 몰라 내뻗는 손길마저도 일환이었을까. 

게임의 유희가 둘둘 말린 진심은 퍽 가벼웠다.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 바싹 마른 낱알 되어 흩어졌다. 장난처럼 포장에 포장을 덧대놓고도 이부키 아이는 부끄러운 양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덩치로 이 좁은 차 안에서 하는 짓이 영 깜찍하게 보이진 않았다. 의도한 행동들이 다 그렇지 뭐. 그런데도 말이다. 비어가던 상자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를 창 쪽으로 쭉 밀어버렸다. 밀수록 팔꿈치에선 힘이 빠져서 시늉만 됐다.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입막음이기도 했다. 고이 밀쳐진 채로 창에 뭉그러진 이부키 아이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시마 카즈미에게 아주 익숙한 금속 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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