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모음
어떤 이는 집을 두고 왔었지
어쩌다 집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집에 대한 얘기라기보단 고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조가에 있던 황비호의 집 얘기도 나왔다. 황천화나 황천상이나 고향 하면 떠올릴만한 게 어린시절 보낸 그 집 밖에는 없었다. 더욱이 황천화는 집 떠난 지가 어언 몇 년이라 그동안 뭐가 변했고 뭐가 그대로더라 하는 얘기가 퍽 들을만했다. 태공망은 모든 걸 처음 듣는 듯했다. 황비호와 안면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굴어 이상하다 했더니 정작 집은 가본 적이 없단다. 거긴 은신처고 집은 아니었지, 하고선 물끄럼 말꼬리를 흐렸다. 슬쩍 흘려버려서 그 뒤에 무슨 얘기가 있는지는 묻지 못했다. 조가에 들어가면 다시 집에 갈 수 있느냐고 천상이 물었다. 확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황비호는 식솔들만을 챙긴 채 집을 버려두고선 조가를 떠났고 무성왕이 야반도주했다던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가뜩이나 없는 민심에는 인심조차 남질 않아서 과연 그 집이 무사할 수 있을까 묻는다면 글쎄다, 였다. 집주인도 버린 집, 그것도 무성왕의 집. 뭐라도 건지겠답시고 부랑자들이 밀려들어왔을 것은 분명하다. 무성왕이 그간 암만 마음 곱게 썼더라도 멀쩡한 집 멀쩡하게 놔둘 정도로 동네 인심이 넉넉하진 못했다. 이런 얘기를 황천상에겐 해주지 않았다. 그래 가거든 집으로 가자고만 했다. 하는 김에 태공망에게도. 사숙도 같이 가 볼라우? 우리 집 안 가봤다며. 태공망은 황천상만큼 어리지 않아서 귓바퀴에 발라주는 사탕에 넘어가지 않는다. 가만 황천화를 본다. 과연 그 집이 아직도 남아 있기는 할까, 하는 얼굴이다. 동심 박살에도 정도가 있지. 표정으로만 말하는 게 황천상에 대한 일말의 배려다. 영감탱이의 현실적인 의의제기는 무시하기로 한다. 황천화는 말을 이었다. 그 집이 어떠했는지를. 그 또한 어릴 적 머문 집이라 아마 지금의 집과는 많은 거리감이 있을 것이다. 심었던 나무는 이제 그 크기가 아닐 것이고 자주 놀았던 마당 한켠에는 새 곳간을 지었을 수도 있다. 천화의 빈 방은 어찌되었을지도 모르겠고 천상도 이제 자신의 방을 가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황천화는 과거 제 기준에 빗대어 집을 이야기했다. 조그만 연못에 놓아기르던 잉어에 대해서. 사시사철 달리 열리고 달리 피던 꽃에 대해서. 물 길러 가는 오솔길과 차고 놀았던 돌멩이, 당시엔 까마득하게 높았던 서까래에 대해. 그 집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들어가거든 돌아보며 뭐가 달라졌는지를 같이 얘기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으므로. 그 때 황천화는 단지 그 집이 더 이상 남지 않고 터만 있으면 어쩌하나 그 걱정을 했다. 단지 그 걱정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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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십이 선인이란 게 원체 빼어난 바가 각각 달랐다. 관심사가 좁았고 하나만 잡고 외길로 파고 내려가기를 잘하는데다가 싫증내는 일조차 없어서, 각 분야의 달인이라 할 만한 자들이 십이 선인 자리에 올랐다. 각각 면면만 떠올려도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도덕진군이 몸을 잘 썼다. 몸 잘 쓰는 선인들이야 많겠지만 몹시 건전한 방향에서다. 그는 전사라기 보단 스포츠맨이었고 그래서 그의 이상은 숭고한 올림픽정신 그 어드메에 있었다. 여기서 올림픽이 뭐냐 물으면 그런 거 있다고 대충 둘러대야만 한다. 아직 올림피아제조차 시작되기 전이다. 선인들이 달리 선인들이 아니고 선인계가 달리 선인계가 아니었으므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는다. 아, 그 올림픽! 손에 손잡고! 아차, 그것까지 말하기엔 지금이 너무 이르다. 도덕이 하는 수행이 그랬다.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하는데 몸을 어떻게 쓰느냐에 초점이 주로 맞춰졌다. 건강한 정신은 덤이다. 덤 치고는 많이 얹어주긴 했는데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 그가 들인 제자이니만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거야 뻔히 보였다. 도덕이 새 제자를 들였다고 했을 때, 태공망은 자연스럽게 성화를 들고선 올림픽 스타디움을 도는 그와 그의 새 제자를 떠올렸다. 그들이 도는 트랙 뒤로 수백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많이 이르다. 천 년도 이르다. 어쨌든 평화로다 평화. 원래 올림픽이란 평화를 전제로 하는 일이다. 그들의 상황을 볼 땐 평화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지만. 굳이 은까지 굽어보지 않더라도 금오와의 관계만 봐도 그랬다. 하긴 그럴수록 이런 정신이 소중할 지도 모르겠다. 태공망이 시간까지 꼬아가면서 올림픽정신을 논한 이유는 다 도덕의 새 제자 때문이다. 분명 도덕의 새 제자라는 스포츠맨이 내려올 줄 알았는데 스포츠맨이 아니라 전사가 내려왔다는 말이다. 보기만 하면 아주 역전의 노장이 따로 없다. 스승과 제자라는 게 분명 일대일 다이렉트 전수일 텐데 대체 그 짧은 사이에 도덕의 어느 가르침이 길을 잃어서 올림픽 선수가 아니라 쌈닭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니 쌈닭은 좀 너무하지 않아??? 황천화가 정당한 의의를 제기한다. 엄청 억울한 얼굴인데 그렇게 억울할 것까진 없다. 태공망은 말도 많이 안 했다. 묵묵히 손가락만 들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 저 너머에서 나타가 날고 있다. 저 나타가 덤비는 걸 다 받아준다는 데서 자네가 쌈닭이란 거야. 이게 또 부정은 안 된다. 황천화도 할 말이 썩 없어지는 것이다. 마지못해 입을 다문다. 그래서 태공망의 생각도 무사히 다시금 올림픽 트랙 위를 돌게 된다. 온 유어 마크. 다소 길은 잃었으나 도덕의 가르침이 아주 가지는 않아서 그래도 황천화가 몸을 곧잘 썼다. 왜 내려올 때부터 봐라, 관문에서 뛰어내리면서 돈 회전수만 세어 봐도 십 점 만점에 십 점이다. 태공망이 거기에 박수를 쳤던가? 안 쳤나 보다. 그거 아쉽네. 그땐 너무 바빠서 그랬나 보다. 바빠서. 그의 움직임은 요령 없이 정직한 힘과 기술로만 이루어진다. 도덕의 가르침은 여기까지다. 후부턴 삼천포로 샌다. 그 움직임으로 보패 들고 냅다 찢어발기더라. 그래서 쌈닭이라 한다. 태공망은 쌈닭이라 말했지만 어쨌든 황천화의 그건 무성왕인 황비호로부터 온 호승심일 것이다. 핏줄이라는 게 이리 진해서 얼굴 빼고는 여러 가지 잘도 물려받았다. 본인은 잘 모르는 눈치지만. 선천적 핏줄과 후천적 교육을 합치고 나니 황천화는 몸 잘 쓰는 쌈닭이 되어 있었다. 적어도 태공망 눈에는 그랬다. 화룡표를 넘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본디 모든 물건에는 제자리가 있는 법이고 그렇다면 화룡표는 태공망보다는 황천화의 손 쪽이 어울린다. 살아있는 불 자체에 가까운 보패에게 재갈을 물리고 목줄을 쥔다. 채찍질하고 방향을 잡는다. 이 과정에는 일말의 낭비조차 없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힘의 가감과 휘두르는 보패를 따라 움직이는 팔과 태공망이 모를 콤마의 세계에서의 판단. 내지르는 것과 접어 들어가는 것. 위로 뛰거나 발을 끌고 걸어 넘어뜨리는 동세. 가벼운 몸짓과 일순 몰아 박아 찌르는 무게감. 전신에 흐르는 약동감. 한 마디로 하자면 경쾌라고 할만 했다. 그래, 경쾌했다. 오래 보고 싶기도 했지만 언제고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하는 싸움터에서는 그게 사치였다. 역시나 제 스승과 함께 성화나 들고 스타디움이나 천천히 돌았으면 좋았을 텐데. 뒤로는 비둘기를 한가득 깔고선 말이다. 탄식을 하고 만다. 땅 꺼지겠다고 뭐라 하는 황천화에겐 쌈박질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니라서 그렇다, 라고 둘러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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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구르는 자갈 하나
나이는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누구는 수행한 지 일백 년밖에 안되었더라고 겸연쩍은 듯 말한다. 뭐가 쑥스러운 건지는 당최 모르겠다. 황천화가 처음 곤륜산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앞으로 펼쳐질 세월이 얼마나 까마득할지 그때는 들으면서도 잘 몰랐다. 뭉뚱그려지는 숫자들은 너무나 막연하기만 했다. 손가락 열 개로 열 번을 세고도 부족해서 그대로 양 손을 내려버렸다. 그의 스승은 신경 쓸 것 없다고 껄껄 웃었다. 정작 그렇게 말한 스승마저도 나이가 어마무시 했었다. 그가 살아왔을 삶이 역시나 잘 와 닿지는 않았다. 나이에 대한 생각일랑 접어두었다. 황천화가 선인들의 세월에 대해 제대로 체감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몇 백 년이 더 지난 후로부터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답보하게 되자 체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몸뚱이가 죽었어도 의식은 살아있어서 반쪽짜리 영생을 이어갔다. 마냥 무료하더니 어느 순간 가속도가 붙어서 백 년이 우습게 지나갔다. 와, 이게 정말로 무섭구나. 속도감에 어질어질했다. 손가락을 꼽았다. 손가락으로 어떻게 세는지 이제야 알았다. 손가락 하나를 백 년으로 치는 거다. 접어 보니 다섯 개가 족히 접힌다. 겨우 짬이 차선가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는데도 제법 폼이 붙었다. 선문답 비슷한 것을 하기도 한다. 그 선문답 말인데 적당히 떠오르는 말 아무거나 주워섬기는 거란 걸 백 년 채우고 알았다. 그래서 황천화도 속에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주워섬긴다. 신계에서의 대화는 봉래도 선인들의 대화와는 조금 다르다. 대부분이 과거 속에 머문다. 그들 모두 과거를 살다 온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돌림노래 같은 면이 없잖아 있다. 새롭게 쌓이는 건 적고 과거는 한껏 부풀고 눈앞의 시간은 영원에 가까이 있다. 기억을 긁어낸다. 살아온 과거만 해도 까마득해서 아무리 긁어도 긁어도 끝이 없다. 그럼 무슨 얘기를 할까. 그 어마어마한 과거 중에서. 선인들은 영원을 살고 그렇기에 기억이란 취사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엄중하게 고르고 고른 기억들이란 건 대부분 아무것도 아니었던 장면들이다. 극적인 사건들보다는 사소한 순간들을 잘라낸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장면들을 기억함으로 그들의 까마득했었고 앞으로 영원한 생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저 평화로웠던 것으로만 남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듯이. 그래서 어떤 사건을 묻거들랑 그들의 대답은 대부분 ‘아, 그런 일도 있었지 참.’ 이런 식이다. 황천화는 그런 대답들을 많이 겪었다. 들으면 절로 심드렁해지고 만다. 그럼 이것도 몇 백 년이 더 지나면 별 거 아니었던 이야기가 되나요? 황천화가 묻는다. 그가 말하는 ‘이것도’의 범위는 아주 좁다. 황천화의 삶에서 끌어올릴 만한 사건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황천화는 그 중에 제일 큰 것을 주저 없이 퍼 올린다. 글쎄. 지금도 별 거 아니었던 일일수도 있지. 그의 스승은 애매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숙였다. 가늠은 하지만 확신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것조차 별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꽤 평탄했다. 말은 고맙지만 애석하게도 황천화에게는 아직은 별거다. 조금 별거다. 아무것도 아니었지,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담배 한 대 찾는다. 천천히 숨을 쉰다. 풍랑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남는 게 시간이다. 잦아들기 마련이다. 이미 속에 풍랑 일어봤자 옛날처럼 거칠지가 못했다. 그에게도 시간이 지나긴 지났나 보다. 당시의 가장 격렬했던 감정들부터 마모되는 걸 보면 과연 오래 살았던 선인들이 거짓말은 안했다. 그도 이제는 꽤 고요해졌다. 스승이랑 비슷한 얼굴 할 때도 있다. 잠깐에 불과하지만. 근데도 가끔씩 송곳처럼 푹 찔러온다. 그러면 바깥으로 섰던 날이 죄 안으로 선다. 그 옛날엔 바깥으로 섰었지. 이런 식으로 무뎌져 가는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불같던 감정들이 가속도 붙는 시간에 닳아간다. 둥글게 마모된다. 그러다 쪼개지고, 쪼개지고, 쪼개지며는. 그런 후에야 남는 것들이 자잘한 소품들일 거라고, 천천히 이해하는 중이다. 그야말로 사소한 순간들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기억들. 아직은 떠올리기엔 힘에 겹지만, 좀 더 훗날에 떠올릴 삶의 단편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얼마나 쪼개고 더 쪼개야 당신이랑 한 얘기 떠오를지는 모르겠다고, 영원 저 먼 곳 봤다. 어차피 남은 것은 시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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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쩌다 이리도 닳아버렸는지
희한한 세상이다. 세상이 혼란하기는 혼란한가 보다.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는 또 얼마나 파란만장해 질런지. 세상은 요지경이고 눈앞이 뱅뱅 돈다. 그러다 금방 안개 너머로 흐려져 간다. 쓸려나간다. 새는 시간의 이면을 난다. 내딛었던 발은 고대로 되감는다. 요란뻑적지근했던 모든 것들은 되감는 발바닥 아래에 고스란히 고인다. 그리하여 허무하리만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되었으므로. 잠깐 꼬였던 불순물을 털어내고선 역사는 다시 엉망진창일 시간들을 향해 달려 나간다.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걸 모른다. 황천화도 뭘 모르긴 마찬가지다. 사지가 괜히 피곤하다. 참 큰일 일어났던 것 같은데 기분만 그렇다. 싸움 끝난 허허벌판 평지만 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게 큰 일이 났긴 났었다. 마가사장이 그 난장을 쳐놨으니. 다만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감은 전혀 없으나 경험만은 남아서 기억 속에서 가볍게 혼선이 일어난다. 걸쭉하게 뒤섞인다. 아리까리한 것이 한바탕 꿈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꿈이라면 너무 잤다. 그러니까 아직도 잠에서 헤매는 것일 테다. 사숙 얼굴이 막 둘이었다가 셋이었다가 한다. 아니, 셋은 아니지 참. 분명하게 둘이었으니 둘이었던 뭔가가 있기는 있었나보다. 그 말하다 괜히 빈축을 샀다. 낮술 먹었구만. 아니 진짜 둘이었는데. 이 사숙과 저 사숙 저 사숙과 이 사숙. 진짜 사숙과 가짜 사숙. 희미한 기억 속, 똑같은 얼굴이었음에도 뚜렷하게 나누어진다. 그것이 조금 의외다. 낮에 꿈꾼 셈, 흘려보내기엔 약간의 껄적지근함이 남는다. 손거스러미처럼 솟아올라 거치적거린다. 사숙이 둘이나 있었단 말이지. 피곤하게. 어디 가서 나쁜 짓 하지 마라. 손발톱 잘 깎고. 모아서 버리고. 태공망이 제 손을 펼쳐 물끄럼 본다. 봐봤자 장갑이라서 보일 것도 없는데도 한참을 본다. 장갑 아래 있을 짤막한 손톱들을 떠올리는 듯하다. 사실 얼마나 짧고 둥글지 황천화로선 모를 일이다. 본 적도 없어서. 잘 깎는데. 그게 전부다. 맥이 풀린다. 그러면서도 아주 바보취급하지 않는 게 좀 의외기도 하다. 멍청한 소리 제일 많이 하는 주제에 남 멍청한 소리 하면 제일 먼저 물고 늘어지기 바쁜 사람이다. 태공망이라면 좀 더 대놓고 비웃을 줄 알았다. 그 얘길 했더니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어쩐지 나도 긴가민가해서. 같은 술을 먹었나 보지. 아닌 게 아니라 똑같이 아리까리해서 그랬다. 보통 요란뻑적지근한 것이 아니더니 여럿 같은 꿈을 꿨다. 그것도 눈 빤히 뜬 채로. 꿈은 꿈이요 몽상은 몽상이요 곧 물러갈 것들이라 벌써부터 윤곽이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형체를 잃고 이야기를 잃는다. 단편적인 장면들만 남는다. 그것도 금방 점점이 흩어진다. 내버려두면 그대로 사라질 백일몽들을 황천화는 좀 더 붙들어 본다. 사숙이 둘씩이나 있었는데 말야. 그런가. 태공망은 이미 많이 놓았다. 사라진 기억들엔 미련이 없다. 붙잡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므로. 가는 대로 보내버리고 만다. 황천화가 겨우겨우 붙드는 기억엘랑 의지한다. 고개를 끄덕인다. 멋대로 더 해보라는 뜻이다. 이것도 사숙 저것도 사숙일 정도로 똑같은 사숙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구분이 될 정도로 달랐을까. 그건 모르지. 황천화는 팔짱을 끼고 좀 더 기억을 더듬어 본다. 태공망은 사실 그보다는 황천화 몸뚱이부터 어떻게 건사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르려고 한다. 쟤는 지금 싸움 끝났다고 풀어졌지 아주 풀어졌어. 황천화도 그렇고 나타도 그렇고 이놈 저놈. 박살난 풍읍과, 아 뒷일 수습하는 것만 해도 큰일이다. 몽상에 머무를 정도로 한가하진 못해서 자꾸 맞닥뜨린 현실 쪽에 생각이 기운다. 닥친 일이 하도 태산같이 많아서 헛웃음이 다 나오겠다. 진짜로 실실 나왔다. 허… 아니, 뭐 사람이 그렇게 닳을 수도 있나… 그런 느낌인가. 태공망이 딴생각 하느라 황천화 기색을 놓친 사이 황천화가 무심결에 툭 내뱉는다. 동의를 구한다기보다는 그저 혼잣말이었다. 저조차 의식하지 못한. 어쩌면 그가 그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고. 이미 사라진 시간대의 생각을 가져와 뱉으려니 자신의 생각이 아닌 양 붕 떠오른다. 기억 속을 헤집어 붙잡아도 하필 이걸 붙잡나. 누구더러 닳았다고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이게 진짜 뭐지? 말한 본인도 잘 이해하지는 못했다. 정확한 설명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계속 옅어져만 가는 기억이 그를 오리무중 속에 빠뜨리고야 만다. 결국에는 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도록. 그런 기분이 들었는데…뭐지? 닳았다니 어디 그게 사람한테 쓸 말이야. 사숙은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남 멍청한 소리 하면 제일 먼저 물고 늘어지기 바쁘다고 했다.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다. 태공망이 엉뚱한 소리 하나에만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거 억울하네? 닳긴 누가 닳아. 어디가 닳아. 말하는 거에 따라 성희롱으로 알아듣겠어. 아 진짜. 꼬투리 물고 늘어지는 걸 이리피하고 저리피하는 사이 정말로 기억이 싹 날아가 버렸다. 끝내 남은 것은 찰나의 공백뿐이다. 찰나에는 아무도 눈 두지 않는다. 찰나는 그저 찰나일 따름이다. 꿈은 모두 끝나서 이윽고 마가사장이 떠난 현실에 눈 돌린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까마득하다.
그가 이 찰나를 이해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한참 뒤의 일이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모두 사라졌고 그리하여 기억조차 남지 않았으되 희한하게 느낌은 남아서 그도 모르는 위화감으로만 존재했다. 아니 그랬었나 보다. 정말로 그조차 몰랐다. 없던 일을 어찌 알겠어. 없던 일은 우습게도 있던 극소수에게만 있던 일이 됐다. 아주 먼 훗날에서야 겨우. 어쩌면 이제야 있던 일이 되면서 무언가가 되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불현듯 떠올리는 것이다. 시조 욕을 한 백 마디쯤 하는 태공망을 보다가 아, 그 때 그 느낌이 이거였구나 하고선. 한없이 가짜 태공망에 가까운, 바로 그 사람인 작자를 보고서야. 그때의 사숙이 이 사람이 되기까지 얼마나 한없이 닳고 닳았어야 했는지를 헤아리려다 그만 두기로 한다. 그건 좀 슬플 것 같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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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관한 일화
봉래에서도 몇 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라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든 좋은 일을 만들어냈다. 논의된 사항도 아니었고 그래야 한다는 지시 또한 없었으나 그래야만 한다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오래 도 닦은 자들이 뭐가 다르기는 달랐다. 곧 이런 저런 핑계로 잔칫상이 차려졌다. 좋은 일이 별 거 있나. 먹는 것이 제일이다. 잔칫상 앞에서 반찬 투정하는 놈들은 나타가 죄 두들겨 팼다. 투정할 만도 했고 맞을 만도 했다. 메뉴는 순수한 의미로 순 샐러드 바였기 때문이다. 요괴선인들은 인간고기를 원했다. 나타는 그냥… 비장한 채식주의자라기 보다는 두들겨 팰 수 있는 놈들이 많아서 좋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잔치는 나타 혼자만의 잔치로 끝이 났다. 하늘에선 용이 자주 날았다. 번쩍번쩍 했다. 그에 대해 금교전의 전 주인은 아무 생각 없었다. 어차피 싸움 좋아하기로는 마찬가지라 다소 흐뭇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브라보! 박수치며 와인잔을 비웠다. 하여간 둘만 행복했다. 몇 번 잔칫상이 차려지고 엎어졌다. 풍악이랍시고 노래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할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뻔했다. 등선옥이 토행손의 목줄을 잡고선 기어이 결혼을 해 냈던 것이다. 봉래에서 처음으로 치뤄지는 결혼식은 그야말로 결혼식의 이데아이자 집대성이었다. 드레스, 턱시도, 샹들리에, 꽃과 대리석, 양탄자, 벨벳 쿠션, 흰색 레이스와 고운 크림을 입은 웨딩 케이크.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들은 전부 생화였다. 빛바랜 분홍색이었다. 손바닥을 펴고 있으면 산들산들 가라앉았다. 호희미가 꽃잎 잡은 채로 두 손을 꼭 쥐었다. 멋져! 나도 이런 거 하고 싶어! 그치? 잔뜩 상기되어 돌아보는 통에 사불상 등골이 다 쎄해졌다. 등선옥이 던진 부케는 호희미가 받았다. 큰 곡선을 그리며 허공에서 떨어지는 걸 달려가 품에 안았다. 꼭 안느라 꽃이 다 구겨졌다. 부케를 받으면 3개월 내에 결혼해야 한대. 정말이야? 부케를 더욱 구겨가며 함박 웃었다. 3개월은 무슨 당장 내일이라도 결혼하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호희미가 부케를 던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결혼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연애의 1부터를 차근차근 밟느라고 그랬다. 호희미의 뜻이라기보다는 사불상의 뜻이었다. 호희미와는 다르게 사불상은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질 않았다. 이제 막 성년이라 다행이다. 내세울 방패라도 생겨서. 방패가 생겨봤자 결혼 날짜를 일정기간 미루는 정도밖에는 못했다. 호희미는 배포가 커서 그걸 다 기다려줬다. 사실 누구 배포가 큰지도 잘 모르겠지만. 시간은 약이고 선인들에게 가장 만만한 게 시간이다. 그래서 기다려봤자 언젠가는 하게 되어 있다. 봉래에선 다시금 좋은 일이 생겨서 좋았고, 호희미는 결혼식을 해서 좋았다. 사불상은 그냥 다들 좋으니 좋은가 보다 했다. 호희미도 부케를 던졌다. 그건 어디로 갔더라. 내가 하나 씨벼왔거든. 황천화가 손목을 한 바퀴 돌리더니 편다. 무슨 마술같이. 손바닥 위에 단 한 송이만 남아있었다. 호희미 부케는 작은 꽃들 한아름 묶어놨던 거라 꽃도 작았다. 앙증맞았다. 황천화의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태공망은 물끄럼 언밸런스한 손바닥 위를 봤다. 이건 언제 이렇게 씨벼왔대. 그것도 딱 하나를. 저도 모르게 탄식이 터진다. 자네 결혼하고 싶은가? 누구랑? 아, 헐.
영감탱이 이렇게나 분위기를 안 맞춰 준다. 꽃은 찰나처럼 시들 것이고 사랑은 그보다는 좀 더 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랑이 꽃보다도 보잘것없으니 찰나의 꽃으로도 사랑을 표할 수 있는 것이다. 황천화는 복잡한 생각보다도 그냥 꽃이 이뻐서 좋았다. 꽃도 이쁘고, 사숙도 이뻐 죽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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