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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배터리 / 카도미즈 / 다정도 병인 양.2025-09-08 13:40




01.




그해 봄은 유난히도 빨리 펴서 아주 천천히 저물어갔다. 시간을 타지 않고 홀로 영원할 만치 느긋했다. 예년과 달라 엘니뇨다 뭐다 이상기후 운운할 만했지만 평온한 계절이었기에 다들 안주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덕분에 모두가 충분히 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분홍색 꽃잎 한 장씩을 머리에 이고선. 계절이 춘풍을 붙들다 못해 끝자락을 질질 끌어 하루하루가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미즈가키 슌지가 새 출발한지도 한 달이 넘었다는 뜻이다. 


그래, 미즈가키 슌지가 말하는 것은 새 출발이다. 온화한 계절과 온화한 새 출발. 그의 오랜 고민과 갈등과 결단은 새 출발이라는 단어 하나로 순식간에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심지어는 고교데뷔라는 말까지 했던 것 같은데 카도와키 슈고가 듣기에는 너무 창피한 말이라 듣자마자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레드 썬. 그래서 그건 없던 게 됐다. 무슨 소리야, 슌. 언제 그런 말을 했었어?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너. 카도와키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친구의 치부를 감춰주는 척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다행인 일이다. 미즈가키 슌지의 명예를 위해서도, 카도와키 슈고의 수치심을 위해서도. 

새 출발이니 고교데뷔니, 미즈가키가 부러 그렇게 말했음은 분명하다.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면서 고민, 갈등, 결단, 기타 등등 질척한 것들은 농담 아래로 슬쩍 치워버렸다. 그렇게 미즈가키의 고등학교 진학은 그저 장난스런 새 출발의 하나가 됐다. 그 학교에 야구부가 있느냐 없느냐는 새 출발의 잔가지의 하나에 불과해졌고. 정작 그게 제일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들린다, 들려. 저 멀리서 카라키가 억울함에 땅을 치며 고함치는 소리가. 야, 우리 진심 담았던 얘기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그냥 그저 그런 안부인사 된 거지.

오랜 습관이었다. 옛날 언젠가부터 켜켜이 쌓아온 습관. 습관은 얇게 한 장 한 장 포개다 어느덧 정수리 높이에 이르렀다. 미즈가키 슌지는 진지한 얘기일수록 가볍게 치워버리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물며 카도와키 슈고의 앞에서라면 더 그랬다. 카도와키 슈고는 어림짐작했지만 어림짐작 한 채로 어물쩍 넘어가줬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카도와키가 묵과한 탓에 습관은 더더욱 두터워지고 잡다해졌다. 미즈가키가 저렇게 우스갯소리로 운을 떼거든 꼭 쓸데없는 얘기들이 사족처럼 덧붙여진다는 뜻이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에 핵심은 없다. 순 잔치레고 겉멋이다. 인생의 꽃은 고교시절이거든. 화려하게 출발해야지. 예전의 나와는 다를 거다. 큰소리를 쳤는데 카도와키 슈고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3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았다. 6학년짜리 꼬마가 할 법한 얘기는 아니지만 그때도 미즈가키 슌지는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 있었다. 중학교부터가 인생의 꽃 아니겠어. 청춘은 교복을 입으면서부터야. 반 뼘은 더 긴 교복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하던 말이다. 정작 청춘 운운했던 미즈가키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입에 담배를 물었었다. 이 역시 얼마 전 6학년이었던 꼬마가 할 짓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청춘이 이렇게 퀴퀴한 것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설마 미즈가키가 찍으려던 청춘드라마의 테마가 반항이었던가. 


그로부터 3년이 지났다. 청춘이 시즌제긴 했는지 새 출발 타령은 여전했지만 유치한 반항의 유행은 한물갔다. 새로 찾아온 유행은 그보다 시시껄렁한 일상물이다. 그리하여 청춘의 새 출발치고 별일은 없었다. 학교에 가고 적당히 수업시간을 버티고 집에 와서는 간식이나 주워 먹으며 빈둥거렸다. 드라마틱한 요소란 일절 없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달라진 건 교복뿐이다. 결국 미즈가키가 말하던 청춘, 인생의 꽃, 그런 건 다 만화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백 번 새 출발을 해봤자 현실은 그곳에 닿지 않는다. 그럼 그렇지. 한 달 만에 미즈가키는 쉬이 납득했다. 어차피 수선만 크게 떨었다 뿐이지, 기대도 안했다. 읽던 만화책일랑은 다 치워버려야겠다. 그도 그럴 것이 순 야구만화들이었다. 쓰던 야구 용품들은 죄 박스에 담겨 창고에 처박혔으니 야구만화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야구의 청춘을 또 이렇게 묻는구나. 새 청춘, 새 출발한다던 작자가 이미 청춘 다 보낸 늙은 아저씨마냥 중얼거렸다. 카도와키 슈고에게는 그 말이 조금 쌉싸름하게 들렸다. 




미즈가키가 만화책을 정리할 때, 카도와키도 같이 있었다. 놀러온 겸, 돕는 겸 몇 권 얻어가려고 그랬다. 만화책들 중엔 분명 카도와키의 용돈을 보탠 책도 있었으니까. 그땐 책을 같이 사고 같이 보고 어느 한쪽의 집에 보관하는 일이 허다했었다.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테지만 소회를 맛보기엔 아직 이르다. 곧 맛보게 될 소회를 모른 채 둘은 잠자코 책을 정리했다. 그러다 잡히는 권을 파라락 넘겨보기도 했다. 처음엔 훌렁훌렁 넘기기만 하다가 몰두하기 시작했는지 종이 넘어가는 게 점점 느려졌다. 나중엔 정리하는 시간보다도 만화책 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청소는 완전히 뒷전이 되었다. 펼치자마자 코시엔이었으니 눈 떼기도 힘들었을 거다. 역시 만화 속 청춘이 최고다. 열정이 있고 우정이 있고 사랑도 있고. 백 번을 새 출발 한다 해도 닿지 않을 곳. 만화 속에선 하루가 48시간인지 별 걸 다한다.

미즈가키는 이따금 피식피식 웃었다. 웃음소리는 넘어가는 페이지와 부딪혀 건조하게 파닥거렸다. 다시 보는 만화가 웃겨서가 아니라 카도와키 슈고와 이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어이없고 비웃겨서였다. 이 변함없는 휴일이 징글징글하기 이전에 카도와키를 떼놓겠다던 그간의 지랄 생쑈가 더 부끄러웠다. 부드럽게 말해서 부끄러운 거였고 속내 고대로 말하자면 쪽이 다 팔렸다. 이 쪽에 비하면 농담으로 고교데뷔 말하는 거야 쪽팔림 축에도 못 들어가겠다. 

얼굴 달구는 시뻘건 감정이 겨우 가실 즈음에야, 한 발 늦은 징글징글함이 찾아왔다. 하필 다음 권을 카도와키가 들고 있어서 그거 달라 기다리다보니 그랬다. 카도와키는 읽는 게 더뎠다. 그림을 보고 말풍선을 읽고 다시 그림을 봤다. 같은 컷 보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보는 미즈가키가 지겨우리만치 신중한 독서였다. 


“슈고, 빨리 봐.” 

“어어…”


허투로 들었는지 말은 뭉그러진다. 발로 밀어 봐도 꿈쩍을 안했다. 이건 틀렸다. 미즈가키는 높게 쌓아 놓은 만화책 꼭대기에 정수리를 처박았다. 그 채로 만화책을 보는 카도와키를 곁눈질했다. 영락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청소하기는 싫고. 징글징글하다, 징글징글해. 기다리는 동안 미즈가키 슌지는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카도와키 슈고의 총량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즈가키 슌지라는 한 인간이 평생 동안 감당해야 할 카도와키 슈고의 분량이 있고 그걸 다 소진해야만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카도와키 슈고의 양이란. 가늠해 봐도 어쩐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을 카도와키 슈고와 함께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미즈가키도 반은 포기했을 수도 있다. 카도와키도 이따금 웃는다. 그가 웃는 건 순전히 만화가 재밌어서다. 책은 한 장 한 장 느리게 넘긴다. 눈이 말풍선을 느리게 훑는다. 팔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놓아 봄바람이 들어왔다. 오래 끄는 계절 중에서도 꽃은 피고 졌다. 꽃 진 자리 위에 푸른 싹이 움텄다. 미즈가키는 고개만 기울여 성의 없이 콜라를 마셨다. 드디어 카도와키가 한 권을 다 봤다. 책을 덮더니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재미있다고 했다. 


“설마, 야구만화라서 그렇겠지. 넌 야구면 다 재미있잖아.” 


미즈가키는 뚱한 대답을 했다. 아마 이 대화부터 뭔가 잘못됐던 것 같다. 아니, 후회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만화책을 정리해서 그런 거다. 그러니까 왜 괜한 짓을 해서.

딱 그날 카도와키 슈고와 미즈가키 슌지는 연애를 시작했다. 미즈가키는 그날이 봄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기억과는 달리 실제로 봄은 그 후로도 몇 주간 더 지속되었다. 바야흐로 연애하기 참 좋을 때였다. 끝내주는 청춘이로고. 




연애의 이야기를 해보자. 미즈가키 슌지는 의외로 연애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안 해봐서. 야구부 구르는 그 와중에도 실컷 방탕하게 잘 놀았다지만 노는 것과 연애는 완전히 궤가 달라서, 미즈가키는 같이 놀기는 좋은 애지만 같이 연애하기 좋은 애가 아니었다. 미즈가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다. 딱히 그걸로 초조해하진 않았다. 연애라고 해봤자 적당히 노는 일의 연장선이겠지, 하고 만만하게 본 탓이다. 이 만만한 계산은 모두 적당히 잘 놀고 적당히 귀여운, 중학교 적 자신을 잘 모르고, 야구는 더더욱 몰랐으면 하는 또래 여자애를 상대로 한 가정이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만만한 게 맞았다. 펜대를 백 번 돌려봐도 그랬다. 

그렇다면 상대가 성실을 머리꼭대기에서부터 뒤집어 쓴 것만 같은 착한 애에, 적당히 귀여울 뻔하다가도 만 데다가, 중학교를 넘어 아이적 부터의 미즈가키 슌지를 알고 있고, 야구를 알다 못해 고교인생을 전부 코시엔에 꼴아 박은 소꿉친구의 경우라면 말이다.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심지어 그게 카도와키 슈고라면 더욱 더. 펜대는 빙글빙글 굴러가다가 멈춘다. 이 정도는 계산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미즈가키 슌지의 화려한 고교연애계획은 이로서 다 망해버렸다. 발렌타인데이도 화이트데이도 진작 다 지나가서 다행이다. 무슨 무슨 데이랍시고 카도와키 슈고에게 달콤한 것 하나라도 받았으면 아주 미쳐버렸을 거다. 그놈의 완벽한 청춘이 뭔지. 그놈의 만화가 뭔지. 


이건 순전히 만화책을 보다가 이 못지않은 카도와키 슈고의 완벽한 새 출발, 완벽한 고등학교 시절을 만들어 보자는 기획에서 출발했다. 새 출발 노래 부른 건 미즈가키였지만 완벽한 청춘에 더 가까운 건 카도와키 슈고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싹수가 보이는 놈을 밀어야지. 미즈가키는 흥정하듯 말했다. 카도와키로선 청춘이 덤터기로 팔려가는 기분이었다. 청춘에 그렇게 각별한 감정 가지지도 않았는데도. 


“자, 그래서 우정, 노력, 승리가 있는데 여기서 뭐가 부족하냐….”


숫제 점쟁이 아니면 장사꾼이었다. 그리고 장사꾼이 혼자 장사하다 그대로 말려버렸다. 어쩌다 말렸느냐면 만화책에선 우정, 노력, 승리 그리고 사랑이 나오는데 우정도 승리도 노력도 카도와키가 알아서 할 테고 그럼 남는 게 사랑뿐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옆집 사는 소꿉친구라면 더욱 완벽할.


“그럼 나네.”

“아하하!”


캐스팅은 손쉽게 이루어졌다. 미즈가키는 낄낄 웃었고 카도와키도 덩달아 낄낄 웃었다. 만화책에선 소꿉친구가 스탠드에 앉아 주인공을 응원하고 있었다. 미즈가키도 따라 응원하는 척을 했다. 그다지 닮진 않았다. 그럼에도 카도와키는 만족했다. 흥정은 흔쾌히 이루어졌다. 고등학생에 야구에 소꿉친구와 연애. 그야말로 완벽했다. 

카도와키가 만화책 몇 권을 들고 돌아간 직후, 미즈가키는 당장에 기어가듯 제 방으로 돌아가 콜라컵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내가 여기 술을 탔었나. 이른바 꼴같잖은 후회였다. 불행히도 콜라는 멀쩡했다. 








02.




카도와키는 만화책 몇 권을 들고 집에 갔다. 덜 읽은 나머지 만화책이었다. 가지고 싶다기보다는 그저 뒷내용이 궁금해서 가져가는 것 같았다. 잠깐 빌려가는 정도의 가벼운 감각으로. 그만큼이나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선 손을 흔들었다.


“잘 읽을게, 자기야.”

“그래 자기야. 잘 가고, 좋은 꿈꾸렴. 가급적이면 내 꿈.”


카도와키가 하도 자연스럽게 인사하기에 미즈가키도 반사적으로 올라타고 말았다. 아, 이럴 때도 유머를 잃지 못하는 미즈가키 슌지. 가엾은 슌지. 배 잡고 웃던 농담은 자연스럽게 방 밖을 빠져나왔다. 카도와키 간다기에 얼굴 보이려 잠깐 방 밖을 나온 카나가 오빠들의 살갑기 짝이 없는 인사를 보고선 질색인 표정을 지었다. 원래 한창 그럴 나이다. 오빠들이 숨만 쉬어도 징그러울 나이.


“징그러워.”

“그런 표정 하지 마라. 지금 너보다 내가 더 참담해.”

“퍽이나. 즐기던데.” 

“흐름을 탄 거지… 근데 혹시 네가 콜라에 술 탔니?”

“무슨 소리야? 술 먹었어?”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카도와키 슈고가 이렇게까지 위트있는 인간인줄은 몰랐다. 그래서 나머지 만화책은 창고로 가지 못했다. 모두 타는 쓰레기가 되었다. 술 한 방울 안 섞인 멀쩡한 콜라 마신 미즈가키는 그날 밤 만화책을 죄 내다 버렸다. 하여간 만화가 문제다, 만화가 문제야. 버리는 내내 다 산 늙은이처럼 몇 번이고 혀를 끌끌끌 찼다. 묶어 내놓는 것보다도 혀 차는데 더 정성을 들였을 일이다. 책임을 죄 만화 쪽으로 돌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만화가 문제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실없는 장난을 친 거다. 예전과 다름없이.


일주일 후 동네 어귀에서 우연히 만난 카도와키 슈고가 ‘어이, 자기야.’ 하고 인사하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어찌나 소름 돋던지 미즈가키는 듣자마자 아주 아찔해졌다. 이 친구가 유머를 배운 건 좋은데 어째 맺고 끊는 타이밍을 잘 모르나 보다. 중학교 때 다른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걸 가르쳐 놨어야 했다. 


“아…. 그때 그게 계속 이어지는 거였어?”

“당연하지.”

“슈고 네가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농담은 이렇게 질질 끌면 인기가 없어. 재미가 없거든.”

“왜. 난 농담 아니라 진짜로 해도 좋아.”


말하는 본인이 생각해도 웃기긴 한지 말인지 웃음소리인지를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히 들었다. 진짜로 해도 좋아. 웃음을 참지 못해서 자꾸 피식거리는 카도와키의 어깨에서 큰 보스턴백 끈이 흘러내렸다. 가방 모서리는 죄 헤지고 흙투성이다. 교복에 책가방에 보스턴백에 이거저거 멘 걸 보니 이제사 연습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지고 난 햇빛이 아직도 목덜미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가방을 추슬러 메고 햇빛을 목덜미에 두르고선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야구소년이었다. 미즈가키도 그랬을 때가 있었지. 불과 몇 개월 전인데도 어쩐지 벌써 먼 옛날 같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흙먼지 뒤집어 쓴 야구소년과 청춘과 연애. 선히 그려진다. 


“허… 진짜라.”


미즈가키는 말을 흐리며 그 끝에 지그시 무게를 실어 밟는다. 유독 무겁다. 턱이 턱 꺼질 것만 같다. 그럼에도 굉장히 잘 어울리긴 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멋진 클리셰긴 했다. 그러니까 만화책도 사서 모았지. 그게 자신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묵직하게 흐려지는 말의 어미를 카도와키는 미처 듣지 못한다. 


“가야겠다. 저녁 먹어야 해서. 다음에 놀러와.”

“나 바빠.”

“그래도 주말 중에 하루정돈 시간 날 거 아냐. 나중에 보자. 자기야.”

“허어. 저거 저거 저 자식 말 이쁘게 하는 거 봐라.”


카도와키 슈고가 저 멀리 멀어져갔다. 충실하게 하루를 임하고 나서 따뜻한 저녁밥을 기대하는 뒷모습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매일같이 헤어질 때마다 봐 왔던, 잘 알고 있는 뒷모습. 미즈가키는 배웅하는 듯 마는 듯 오래고 봤다. 카도와키가 저녁 어스름 너머로 사라지고도 그 골목 어귀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만화책을 정리하던 날, 무심결에 생각했던 카도와키 슈고에 대한 총량이 다시금 머리를 두드렸다. 인생에 정해진 카도와키 슈고의 분량이 있다면 지금 이걸로 전부 소진하길 바란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친구고 팀메이트고 연인이고 간에. 짝, 소리 내서 손을 모았다. 손을 모으는 행위는 마치 저녁별에 비는 기도를 닮았다. 적어도 그만큼은 간절했을 것이다.


그 주말, 미즈가키는 현관문을 연 카도와키를 보자마자 안녕, 자기야. 하고 인사했다.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과연 그렇게 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카도와키는 아주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만족한 듯 깔깔 웃었다. 웃음소리 화통하기도 했다. 한 손에는 읽다 만 만화책을 들었다. 어지간히 맘에 들었나 보다. 만화도 마음에 들고, 자기야 인사도 마음에 들고.


“행복하냐. 그래, 네가 행복하면 난 됐다….”  


그래, 이건 어떤 의미의 승낙이었다. 그리고 카도와키는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왜 그라운드에선 눈만 찡긋해도 다 알아먹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게 미즈가키 슌지로선 못내 징그러웠다. 연애로 시작한 장난이 이제 장난 같은 연애가 됐다. 이 변화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중어중 넘어갔다. 경계는 불분명했으나 미즈가키의 ‘안녕, 자기야’가 어떠한 도화선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다 보니 연애를 해봤자 별반 달라질 건 없었다. 둘 사이가 그럴진대 연애한답시고 하루아침에 메뉴가 마요네즈 크로켓에서 파스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나마 눈에 띄게 바뀐 게 핸드폰 주소록이었다. 미즈가키는 카도와키의 핸드폰을 뺏고 대번에 제 이름 뒤에 하트부터 붙여 놓았다. 제 이름 뒤에 넣으려니 영 깜찍하고 간지러워 죽을 것만 같았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연애는 먼저 내색하는 놈이 지는 거다. 그래서 카도와키가 졌다.


“와. 본격적인데.”

“내가 한 번 하면 진짜로 하지. 두고 봐라. 넌 죽었어.”


까만 하트 흰 하트 참깨처럼 골고루도 박아 놨다. 카도와키는 이제 꼬리가 제법 길어진 미즈가키의 이름을 액정 위로 문질러봤다. 손가락으로 문질러봤자 하트는 지워지지도 않는다. 조금 실감이 날 것도 같았다. 이후로도 카도와키는 종종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물끄러미 보다가 손가락으로 미즈가키의 이름 위를 더듬었다. 무언가 특별한 행위처럼, 그게 그가 그의 인생에 할당된 미즈가키 슌지의 분량을 소비하는 방법인 것처럼. 그리고 나서야 심호흡 하고 메일을 보냈다. 물론 그 행위가 진짜 사랑에서 기인한건 아니었을 거다. 그럼에도 늘 그렇게 했다. 

허나 암만 더듬어봤자 메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는 죄 각진 글씨들뿐이라 미즈가키는 카도와키가 메일을 보내기 전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저 자기 핸드폰에 뜨는 카도와키 이름 뒤 하트를 보며 혀를 빼물고 마는 것이다.




유일한 변화에 대한 얘기는 끝났다.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하트 붙은 주소록과 ‘자기야’를 제외한 전부다. 그들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며 겪은 변화에 비하면 이까짓 변화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때때로 메일이나 주고받고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거든 근황이나 물었으며 어쩌다 한 번씩은 서로의 방에서 퍼져 누웠다. 카도와키 방 책상 위로 굴러다니는 경식구나 벽에 붙은 메이저 야구 선수 포스터를 애써 외면하면서. 미즈가키는 포스터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돌리느라 책꽂이에 꽂힌 책 순서를 전부 외워버렸다. 책 순서는 늘 똑같았다. 정리를 잘 하거나 아예 책을 빼서 본 적이 없거나 일 텐데 후자일 게 뻔했다. 그중에는 카도와키가 미즈가키 집에서 가져온 만화책도 있었다. 역시나 꽂힌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재미있게 읽었으나 그게 다라는 것처럼. 만화에 나온 고교야구도 연애도 이제 실제 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보며 대리만족할 필요가 없다는 듯. 그렇게 카도와키의 관심사에서 멀리 떠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미즈가키는 가지런히 꽂힌 책등을 보다 물었다. 지금 만족하느냐고. 

카도와키는 가만 생각했다. 아니 감정으로부터 할 말을 천천히 골라냈다. 꽤 진지하게. 천장을 한 바퀴 훑었다. 시간이 그만큼 째깍째깍 지나갔다. 골라내려니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게나 뜸들인 후에 툭 하고 나온 말이란 겨우 이거다. 


“막상 연애도 하다 보니 썩 할 만 하더라.”

“헤에.”


미즈가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성의 없는 추임새를 넣었다. 영화 감상문도 이것보단 길겠다. 워낙 말하는 데 재주가 없어 고르다 보니 지나치게 단순해졌다. 단순하지만 미사여구를 걷어낸 만큼 어쨌든 진심에는 가장 가깝다. 막상 하니 진짜로 할 만 했다. 카도와키 슈고는 변하지 않는 일상에 일단 만족했다. 애인이니 뭐니 하는 장난이라도 미즈가키는 받아쳐 줬고 어물어물 다시 근처에나마 주저앉아줬다. 그 해 겨울의 폭풍 같은 감정들을 서로가 모른척하며. 그것만으로도 카도와키는 지금 이 상태도 꽤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관계의 이름이나 형태가 어떻게 변하든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쪽이다. 장난으로서 연애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가 그랬다. 어차피 핵심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친구든 팀메이트든 연애를 하든 그는 꾸준하게 그의 인생에 주어진 미즈가키 슌지의 분량을 소화하는 중이다.  

이 모든 생각이 전부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진심에 가장 가까웠지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빙산 아래를 볼 마음이 없는 미즈가키 슌지는 그래 너답다 하고 말아버렸다.


“내가 너무 풀어줬네.”


그래 할 만 하다 말이지. 그리고선 곧바로 기가 막히게 뻔하고 유치찬란한 데이트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카도와키 슈고랑.


데이트플랜을 따오기란 쉬웠다. 우리 또래 남들 다 하는 거 하면 된다. 그건 곧 미즈가키가 고등학생이 되며 상상해봤던 데이트와도 같았다. 상대가 작고 귀여운 여자애가 아닌 카도와키 슈고가 되었을 따름이다. 미즈가키의 꿈과 계획과 동경에 상당히 타격이 오는 데이트기도 했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기 위함이라면 얼마든지 하겠다. 미즈가키 성격이 좀 그래먹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 주 일요일, 미즈가키는 카도와키와 

여자애들 사이에서 핫하다는 카페 한복판 테이블에서 파르페를 두고선 마주앉게 되었다. 아직 아슬아슬하게 봄 한정이라서 테이블 보 부터 파르페까지 온통 분홍색이 가득이다. 봄 꽃 같은 초콜릿이 잘게 올라가 있다. 미즈가키는 그걸 생크림과 휘휘 섞었다.   


“자기야, 한 입 먹을래?”


카도와키는 눈이 닿는 모든 것마다 간지러워 고개를 어떻게 가누지도 못했다. 커피 하나 겨우겨우 시키긴 했는데 그것마저 꽃무늬 가득한 커피잔에 나와 이걸 마셔야 하나 고민이 컸다. 미즈가키가 커피에 시럽을 가득가득 부어 주었다. 살가운 손길마다 단내가 가득 났다. 


“내 친구고 애인이지만 너는 가끔 웬수 같아…”

“그래, 그래 계속 그렇게만 생각해. 잘하고 있어.”


그동안 네가 연애를 너무 쉽게 했지. 카도와키는 처음으로 연애란 게 참 순탄치도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 걱정을 하기에는 몹시 일렀다. 


“이걸 다 먹고 나서 할 일은 말이다. 타로점을 보고 쇼핑몰에 간 다음에 아, 스포츠용품점엔 안 갈 거야. 거기 있는 층 근처엔 가지도 않을 거라고. 음… 영화를 봐도 되고. 이것도 로맨스 영화를 보는 거지. 영화를 보면 스티커 사진을 찍은 다음에… 밥? 라면 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자기야.”


긴긴 계획이 엄숙한 선포처럼 카도와키 귀를 때렸다. 하나같이 달콤하기 짝이 없었다. 사는 게 참 쉽지가 않다. 말만 저렇게 했을 따름이지 실제로 저기서 직접 한 것은 영화 보는 것 정도밖에 없었는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쫙 흘렀다. 영화 보면서 먹은 팝콘도 카라멜 팝콘이라 한동안 입에서 단내가 빠지질 않았다. 숨 쉴 때마다 코 아래에선 핑크빛 단내가 아른거렸다. 간지러움 가시라고 몇 백번씩 배트를 휘둘렀다. 스윙은 날카롭게 벼려지기만 했다. 사이사이 봄바람이 끼어들었다. 그날 저도 닭살 돋아 죽겠는데도 웃음 멈추지 않는 미즈가키 목소리가 꼭 이랬던 것 같다. 







03.




연습은 뛰는 것으로 시작한다. 몇 년 동안 매일의 연습이 그래왔기에 카도와키 슈고는 익숙하게 뛴다. 뜀이란 단순하다. 일정하다. 그 단순함은 카도와키의 마음에 드는 편이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리고 단내. 요즘은 단순함을 깨고선 이상한 게 하나 끼어들었다.

미즈가키가 잔뜩 별러 끌고 다닌 데이트 이래, 아직도 발구름에서는 며칠 전의 단내가 훌쩍 올라오곤 한다. 훅 들이마신다. 폐가 한껏 부풀고 혓바닥은 입천장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모래 먼지도 입 안에 가득이다. 모래 맛 나는 먼지를 어금니로 짓이기고서야 카도와키는 겨우 안심을 한다. 데이트의 맛이 그 단내였다면, 야구의 맛은 모래 맛이다. 까끌까끌하게 짓이기면 데이트도 파르페도 전부 가물가물해지는 기분이다. 훅 내쉬고 바로 다음 발을 내딛었다. 땅을 박찬다. 왼발, 오른발. 애써 눌러놨던 게 무색하게도 단내가 다시 인중을 치며 올라온다. 카도와키와 함께 뜀을 뛴다. 뜀을 뛰며 마치 설탕을 바싹 졸인 것 같은 텁텁함으로 코를 찌른다. 

그날의 데이트를 말하자면 꼭 이런 맛이다. 파르페에 올라간 분홍색 생크림이고 카라멜 팝콘이고 전부 같은 맛을 낸다. 시시때때로 올라와서 부끄럽게 한다. 그럴 때 카도와키는 그냥 참고 뛰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멀리멀리 달렸다. 마치 어디로부터 어딘가로 도망가듯이. 그렇게 뛰다 보면 결국 제자리였다. 암만 뛰어봤자 그라운드 돌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집합이다. 십 수 개의 발구름이 우르르 땅을 울린다. 단내는 발구름에 깜짝 놀란 듯 저 멀리 도망간다. 미즈가키 슌지의 얼굴도 어디론가 도망간다. 달리는 사람들 안에 미즈가키 슌지의 얼굴이 없다는 건 조금 어색하다. 유격수의 자리를 보거든 흠칫흠칫 놀라곤 한다. 위에서 생크림이 천천히 역류하는 기분이다. 도망간 줄 알았더니. 모든 것은 발끝에서부터 올라오고 아래로부터 역류한다. 




카도와키가 아는 그 유격수는 매일이 한가하다. 동아리를 하지 않는 오후란 꽤 긴 것이라서, 하교를 하고도 해가 쉽사리 지지 않는다. 하루하루는 한가하게 다채롭다. 오후의 느긋한 햇빛 아래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뭐든 이란, 우르르 몰려서 번화가를 쏘다니거나, 고등학생 구색을 맞춰 도서관을 가서 책이라도 펼쳐 보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집에서 굴러다니면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말한다. 평소에 안 봤을 드라마라도 기꺼이 본다. 시간은 많으니까. 팔자가 늘어졌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끔 흥얼흥얼 유행하는 씨에프 노래를 따라 불렀다. 간식은 이미 거덜냈다. 아마 카나가 오거든 화를 낼 테지만 뭐 어떠랴. 일찍 오지 않은 애가 잘못이지.


“이게 신선놀음이지.”


즐겁다 말은 하는데 한없이 무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텔레비전의 조명이 희미하게 반사된다. 간혹 노랗고 간혹 푸르다.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섞여 뭉그러진다. 의미 없이 스쳐가며 일렁이는 영상들을 한참 보다가 미즈가키는 소파 아래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는다. 얼추 시간 됐겠지 생각하며 핸드폰 주소록을 뒤진다. 많은 주소록 중에 하트를 찾기란 쉬웠다. 


- 자기야 오늘 연습도 힘들었지 화이팅♡ 


손가락만 빠르게 움직인다. 그러다 에헤이- 혼잣말하며 탄식한다. 핸드폰을 보고 있어도 귀는 트여 있다. 지금 드라마 진행이 영 별루다. 


“내용 하고는… 작가 누구야?” 


손가락이 더 빨라진다. 그래서 그 화는 고스란히 카도와키 슈고가 받았다. 미즈가키가 메시지 보내는 시각이란 카도와키가 연습을 거의 마칠 무렵이다. 메시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간다.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을 때, 집에 갈 때, 카도와키가 연습을 끝낼 때, 잠을 잘 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하지 않던 일이다. 하물며 고등학교가 떨어져서도 아니고, 이건 다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한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즈가키가 기왕 말린 거 어디 한 번 해보자, 하고 작정을 했을 때부터. 


부실에서 카도와키가 핸드폰 보다 비명 지르는 게 아주 한두 번 일이 아니어서 이제 부원들은 그러려니 한다. 선배 중에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어보긴 했었다. 


“카도와키 너 어디서 돈이라도 빌렸었냐?”

“아니요…”


돈이 아니라 딴 걸 빚진 것 같다. 농담 하나를 빚지고 장난 하나를 빚졌다. 이건 돈 갚으라 독촉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걸 갚으라 독촉하는 메시지다. 그것도 사랑으로. 닭살이 돋는다. 맘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놈이다. 그래, 처음부터 그랬었지. 미즈가키 슌지는. 카도와키가 알기로는 그랬다.

정작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미즈가키는 대놓고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정하다 못해 닭살이 흘러넘치는 메시지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지금도 봐라. 카도와키는 제가 지나가서는 안 될 길이라도 지나온 줄 알았다.


“지겹지도 않냐. 오늘 같은 날까지 얼굴 봐야겠어?”

“자기야, 그거 알아? 몇 달 전만 해도 우린 매일 얼굴 봤었어. 하루 종일 붙어살았다고.”


일부러 자기야, 라고 말해본다. 얼굴이 더 구겨진다. 오늘은 자기야 놀이는 할 기분이 아닌가보다. 아니면 매일 얼굴봤었다는 내용이 맘에 안 들거나. 

매일 야구도 했었어, 라고 말하면 뭐라고 말할까? 그런 얘기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시치미를 뗄까, 비웃을까. 아님 문자를 잔뜩 늘어놓고선 멀리 도망갈까. 




돌고 돌아 그라운드고 한 바퀴 돌아 홈이다. 그리고 돌고 돌아 주말이다. 데이트 또한 돌아오기 마련이다. 카도와키는 과감하게 데이트라 하기로 했다. 이인승 자전거를 탔으니 그럴 만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커플 자전거니까. 그걸 타고 공원을 몇 바퀴고 빙글빙글 돌았다. 얌전하게 타는 방법이라고는 몰랐다. 많은 그림 속 커플자전거란 이리 저리 핸들을 꺾어가면서 느긋하게 나아가는 와중 허리를 끌어안고 등에 살포시 귀를 가져다 대는 정겨운 장면을 뜻한다. 미즈가키가 장황하게 늘어놓았고 카도와키는 알아서 이인용 경륜으로 이해했다.


“데이트도 참 별 거 없네.” 

“너 정말 뭘 하든 전투적이구나. 거기에 전심전력.”


미즈가키가 혀를 내둘렀지만 그도 그쪽이 훨씬 맘에 들었을 것이다. 말만한 사내애 둘이 타고선 전력으로 밟으니 자전거는 아주 씽씽 나갔다. 아무도 힘을 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커플 자전거의 아름다운 그림을 얘기했던 미즈가키마저. 본 건 있다고 커다란 솜사탕을 사서 탔는데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마구 내달렸다. 손에 쥔 솜사탕 덩어리가 흩어져 구름처럼 날아가던 모습 하나는 볼만했다 하겠다. 잔디가 푸르게 푸르게 뒤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시야 뒤편이 계속 파아랬다. 그저 밟았다. 귓바퀴에서는 내내 쌕쌕 소리가 났고 공원 내에 한가롭게 달리는 자전거들을 전부 따라잡고 나서야 둘만의 치열한 레이스는 끝이 났다. 그랬더니 제자리였다. 자전거를 빌렸던 공원 초입. 요즘은 모든 것들이 빙글빙글 도는 것들뿐이다. 미즈가키가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했다. 핸들에 겨우 기대섰다. 솜사탕이 날아가고 남은 빈 막대기를 여전히 들고 있었다. 


“한 입도 못 먹었어. 인간적으로 이건 네가 사내라.”

“…그럼 타코야키 먹자.”


단 걸 피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미즈가키는 그걸 기가 막히게 꿰뚫어 봤다. 입술 끝이 꿈틀거렸다.  웃음이라도 참는 듯했다.


“슈고. 자기야. 날아간 건 솜사탕이야. 타코야키가 아니라.”


꼭 이럴 땐 자기야다. 자기야, 라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미즈가키는 기어이 솜사탕을 새로 얻어먹었다. 심지어 분홍색이었다. 자기가 샀을 때는 흰색이었으면서 말이다. 하늘하늘하게 찢어 카도와키 입에도 집어넣어준다. 그야말로 설탕덩어리다. 입안에 닿자마자 실체도 없이 녹아버린다. 사라진다. 생크림 위로 솜사탕이 얹어진다. 위장은 단맛으로 겹겹이 꽃이 핀다. 생크림이 흐르고 빼빼로의 기둥 위에 초코칩 쿠키의 집을 세우고 위로 솜사탕 구름이 떠다닌다. 미즈가키 뱃속에서는 이 헨젤과 그레텔에서나 나올 목가적인 풍경이 그려지지도 않는 건지 좋다고 먹는다. 정말로 좋아서 먹는 건지. 기억상의 미즈가키는 단 것에 이렇게까지 환장하진 않았다. 


“너도 참 대단하다… 그냥 내가 싫어하니까 먹는 거지.”

“그럼, 그럼.”


마요네즈 먹을 때만큼 행복해 보인다. 아주 상대 엿만 먹일 수 있다면 양잿물도 마실 위인이었다. 카도와키는 자주 이런 식으로 제가 알던 미즈가키 슌지와 보고 있는 미즈가키 슌지를 매치하고, 비교해본다.

그래 이건 의심이다. 최근 들어서야 하는 생각이다. 이전에는 미즈가키의 행동에 큰 생각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의심은 문득문득 고개를 든다. 뱃속에는 과자집이 세워져 있고 어금니에는 그라운드의 모래 먼지가 씹힌다. 그렇다면 의심은 어디에 있을까. 의심은 혓바닥 아래에 있다. 힘줄 같다. 도사리다 가끔 튀어나온다.  

오래된 친구는 가장에 능하다. 가장은 얼굴 가죽 하나로도 충분하다. 얇은 가죽 하나로 척척 감추고 가린다. 웃는다. 입술 사이로 틈이 생겨 벌어진다. 안쪽은 깜깜하다. 그리고 웃음소리.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래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즈가키 슌지는 거짓말을 잘 한다고. 그럼에도 요즘에야 새삼 깨닫는 중이다. 아마 가죽 이면의 순수한 맨 얼굴을 본 적이 있기에 그리하리라. 예전보다 멀어진 거리감도 한 몫 거들었다. 한 발짝을 물러나야만 제대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래야만 전체적인 형체가 눈에 잡힌다. 카도와키 슈고에게는 미즈가키 슌지가 그렇다.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러다가도 영영 모를 것도 같고. 그래서 생크림이 역류하고 코 밑에 단내가 도는 연애를 억지로나마 계속하는 거다. 거리감을 바꿔보려고. 


“그래. 다들 그렇게 하는 거거든,”


미즈가키는 다 안다는 듯이 말한다. 다 먹고 난 솜사탕 막대기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제대로 들어갔다. 텅. 비어있는 쓰레기통에선 쇳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깊다. 마치 본인을 버리는 듯, 쉽고 깊다. 


“그러니까 슈고. 제대로 보고 싶었으면 더 멀리 떠났어야지.”


정말로 이럴 때는 딱 모르겠다. 혓바닥 밑이 순 의심으로 간질간질 한다. 에에취.




이 좋은 날씨 공원에도 나와봤고 자전거도 탔고 솜사탕도 먹었다. 볼일은 다 봤다. 남은 일은 뭐냐면 집에 가는 거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총총총 걷는다. 미즈가키 걷는 게 유독 가볍다. 집에는 서둘러서 돌아간다. 밖에서 놀아봤자 다 돈이고 고작 소꿉친구와의 데이트에 용돈을 탕진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꿉친구는 원래 집에서만 놀아도 충분한 법이다. 그놈의 연애하느라, 그놈의 데이트 하겠답시고 나와서 문제지. 집까지의 대화는 늘 하던 얘기다. 자기야, 는 둘다 성심껏 의무적으로 붙여본다. 쓰면 쓸수록 엿 먹이기 좋은 말이라. 둘 다 사용법을 완벽하게 익혔다.


“자기야. 집에 들러서 밥 먹고 갈래?” 

“아니.”

“엄마가 아쉬워 할 텐데.”

“아서라, 시험이야.”

“너 공부한다고?”

“자기야. 우리학교 잘 모르는구나. 빡쎄.”


미즈가키 슌지가 다른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확 와 닿았다. 그래, 다른 학교에 다녔다. 명문이라는 소리는 들어봤었다. 야구명문이 아니라서 흘려들었을 따름이다. 야구부조차 없는 고등학교가 이렇게까지 친숙한 이름으로 다가올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매일 그라운드에서 그 부재를 느꼈으면서도 이것은 조금 새삼스럽다. 발밑에 닿는 무대가 천천히 미즈가키 슌지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느낀다. 외로운가? 그런 것도 같다. 오직 미즈가키 슌지만이 아무렇지도 않다. 오래 전부터 그걸 준비해 왔던 사람이니만큼. 눈을 가늘게 뜨고선 카도와키의 당황을 살핀다. 


“어이구. 아쉬워 죽겠어서? 그렇게 내가 좋아 죽겠으면 바래다줄게.”


미즈가키가 히죽거렸다. 카도와키의 당황이 마음에 든 거다. 어르는 건 마치 애 어르듯 한다. 어차피 거리도 얼마 안 되면서 선심은 한 가득이고. 당연하지만 거리가 얼마 안 되니까 선심 쓰는 거긴 하다. 종종종 걷는다. 카도와키는 걸음이 약간 느려진다. 데이트의 클라이막스는 집까지의 에스코트 아니겠는가. 그간 보는 드라마만 많아진 미즈가키가 하는 소리다. 카도와키는 그러려니 한다. 

정말로 미즈가키는 카도와키의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사실 둘 사이에선 잘 없던 일이다. 마중을 해 봤자 문 밖이나 겨우 나가보고 말지. 서로의 집까지 간다는 것은 곧 같이 들어간다는 뜻과도 같았었다. 하지만 미즈가키는 그대로 대문 앞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카도와키가 들어가기를 기다리면서. 카도와키는 이 에스코트가 퍽 어색했다. 혼자 들어가기가 좀 그랬다. 


“잘 가.”


인사하고 들어가려는 때였다. 이름이 불렸다.  


“슈고, 잠깐 이리 와 봐.”


카도와키는 등을 돌렸다. 손목이 잡혔다. 그냥 가볍게 잡고선, 미즈가키가 카도와키를 올려다봤다.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살짝 올려다봐야 했다. 눈이 마주쳤다. 사이의 공기가 길게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카도와키는 조금 아찔해졌다. 이게 무슨 무드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이래서 오는 길에 드라마 얘기를 했던 건가. 지독하고 지독한 미즈카기 슌지. 

미즈가키는 카도와키가 정말로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웃었고 눈을 치뜬 채 키스했다. 뒤꿈치를 조금 들어 올리는 발돋움으로도 충분했다. 한숨부터 입술에 닿았다. 새털처럼 가볍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연인보다는 애들에게 하는 애정 어린 인사에 가까웠다. 훤히 트인 집 앞 골목에서 해도 충분할 정도로. 


“슈고.”


자주 들었다. 어릴 적 불리던 그 이름과 한없이 닮았다. 슈고. 그때는 부르는 소리의 뒤끝이 살짝 높았었더랬다. 지금처럼. 어린 아이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난생 처음 보는 키스보다도 그 다정한 부름이 당황스러웠고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이 당황스러웠다. 소리는 먼 옛날 들었던 소리이되 보이는 얼굴은 전혀 달랐다. 미즈가키 슌지는 연애할 때 이런 얼굴을 한다. 솜사탕이, 생크림이, 쿠키가 천천히 역류해 올라온다. 


“잘 가.” 


너는 그래도 괜찮아?

물어보려다 참아버렸다.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 그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04.




카도와키가 무엇을 물었든, 아마 제대로 된 답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미즈가키에게 답할 마음이 없었을 테니까. 아니 그전에 그에게 답이 있기나 했을지 부터가 의문이다. 그는 카도와키를 혼돈으로 몰고 간 이 짧고 즉흥적인 인사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미즈가키에게는 답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쳤다. 그렇다, 시험이었다. 탱자탱자 신선놀음 하는 애도 땀 흘리며 야구하는 애도 고등학생이긴 마찬가지다. 다들 시험엔 예외가 없어서 울며불며 고등학교 첫 시험을 봤다. 여기서 미즈가키는 ‘울며불며’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차분하게 시험을 쳤고 펜을 쥐고 차곡차곡 답을 써 넣었다. 시험지 가득 빼곡하게 채운다. 대부분은 정답일 게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인간관계와는 아주 다른 점이다. 인간관계에는 답이 없지만 시험에는 정확한 답이 있고, 오답이 있다. 깔끔하다. 이런 잡념을 가질 정도까지 차분했다. 

마지막 문제의 답을 적고 펜을 내려놓은 순간, 봄은 완전히 가버렸다. 미즈가키는 새삼 계절의 경계를 체감했다. 공기는 뭉그러져 봄바람인지 여름바람인지도 모르게 아른거린다. 계절의 경계가 이다지도 희미했다. 눈감지 않으면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시험도 끝났다. 봄은 끝났지만 아직 여름은 올락말락했다. 계절이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한가한 하루하루다. 이번 시험으로 미즈가키는 벼락치기에 일가견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냈다. 이젠 더더욱 평소 공부 따위 하지 않는다. 남들이 뭐라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테다. 그러니까 따로 공부를 왜 하니?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선생님말씀만 잘 들어도 되는걸. 수업시간에 공부 안 하니? 궤변만 부쩍 늘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한가하다. 한가할 뻔 했다. 카도와키 슈고만 안 봤더라면.


“엑.”


카도와키 슈고가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유니폼이 아닌 교복을 입은 채로,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지는 뻔했다. 이 학교에 카도와키가 아는 사람이 미즈가키 말고 더 있겠어. 미즈가키는 저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어졌다. 도망칠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도망은 못 가고 대신 발이 천천히 느려졌다. 이 낯선 조우를 한사코 일분이라도 미뤄보려는 부질없는 몸짓이었다. 카도와키가 아직 미즈가키가 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미즈가키는 한껏 꾸물거리며 카도와키를 구경했다. 카도와키 구경하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미즈가키가 멀찍이서 구경하는 것쯤은 유별나지도 않았다. 하교길에 대단한 이벤트 하나 나기도 했다. 미즈가키는 작게 탄식했다.

구경날 만도 했다. 카도와키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덩치도 있는데다가 얼굴도 단정한 편이다. 오늘은 운동복이 아니라 교복도 제대로 걸치고 있어서, 더욱 허우대가 살았다. 온통 같은 교복들 사이 홀로 불쑥 튀어나온 교복차림은 모양 또한 많이 달라서 더욱 튀었다. 그 광경은 굉장히 좋은 쪽으로 이질적이었다. 한 마디로 썩 봐줄 만하다는 뜻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 장면처럼. 정문을 지나가던 학생 두엇이 카도와키를 힐끔거렸다. 자기일이 아닌데도 어쩐지 들뜬 얼굴이었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 것이다. 여기는 워낙에 범생이들 학교라서 이런 이벤트가 귀하다. 시선을 받거나 말거나, 카도와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가 그간 키운 것은 태반이 무던함과 대범함이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익숙함이 카도와키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한다는 건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카도와키는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본다. 엄지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토도독 자판을 친다.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이라고 하려 했는가 보지? 아니나 다를까, 미즈가키가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요란한 진동이 일었다. 미즈가키는 진동을 억지로 잠재워보려는 듯 휴대폰을 꾹 쥐어보았다. 메시지는 열어 보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몇 걸음이다. 몇 걸음만 걸으면 이제 카도와키가, 그래, 이렇게.


“슌.”


더없이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로.




“슈고, 걸어. 그대로 걸어. 가.”


미즈가키는 바로 카도와키를 떠밀었다. 카도와키는 쉽게 떠밀려 갔다. 방금 전 영화의 장면이 무색하게 학생들 틈에 섞인다. 고백이나 데이트 따위가 아니었음에 학생들의 관심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다들 섞인 채로 갈 길 간다. 그네들이 모르는 게 있는데 데이트가 맞긴 하다. 둘만 아는 데이트라서 그렇지. 꾸물거린 것과는 달리 미즈가키는 얼굴을 보자마자 일부러 과장된 너스레를 한껏 떨었다.


 “무슨 일이야, 슈고. 나 진짜 감동해서 울 뻔 했네. 지금 눈물 맺힌 거 보여?”

“아니. 안 보여…”

“자기가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해서 그래. 근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행차신지?”

“시험이거든.”


카도와키 학교의 시험기간이 다른 학교들보다는 조금 늦었다. 코시엔을 노려 봤자 모두가 고등학생인지라 본분을 다하느라 시험기간에는 부활동과 연습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고, 그 김에 미즈가키와 같이 하교하고 싶었다는 거다. 예전엔 매일같이 그랬듯이. 매일같이 하던 일들이 이제는 매우 귀해져서, 카도와키는 기회를 소중히 여긴다.


“나 이 버스는 처음 타봐.”

“그래… 처음 타봐서 좋겠다.” 


그래서 신나니, 우리 아가. 버스 요금 내는 방법은 아니? 미즈가키가 배배꼬아 비아냥댔다. 엉덩이라도 토닥토닥 때려줄 기세로.  


“넌 꼭 그 쪽으론 이상하게 나가더라.”


카도와키가 작게 투덜거렸다. 예전부터 미즈가키의 이런 농담은 아주 적응하기 힘들었다. 옛 추억을 함께하자고 왔는데 꼭 이상한 것만 그대로다. 쉬운 게 없다. 쉬운 게 하도 없어서 그랬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나란히 흔들리다가 카도와키는 슬그머니 미즈가키 손끝을 건드렸다. 손끝을 툭 건드렸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천천히 쥐었다. 이윽고 손 전체를 아귀에 틀어쥐었다. 카도와키 손엔 약간 버거운 크기였다. 한 번 꼭 쥐었다가 풀었다. 풀어 하나하나 윤곽을 덧쓰듯 그리더니 슬그머니 손깍지를 꼈다. 힘을 주니 손가락 사이사이가 꽉 조여져 왔다. 체온은 미지근했다. 미즈가키는 그 모든 행위를 무감동하게 내려다 봤다. 화가 났다거나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말로 특별한 감정이나 아무 생각이 없음에 나오는 얼굴이었다. 너무 익숙해 나태해지기까지 한 그 얼굴을 카도와키는 잘 안다. 그래, 우리는 서로가 너무나 익숙하지. 봐라. 카도와키가 깍지 낀 손등을 미즈가키의 엄지손가락이 둥글게 쓸었다. 여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익숙함이란 무서운 거다.




그리고 본격적인 고교야구 철이 왔다. 카도와키는 이걸 내내 기다려왔지만 미즈가키 또한 기다려 왔다. 봄이 끝나면서부터는 학수고대 했을 것이다. 일기예보에서 최고기온이 20도를 부쩍 넘어가면서는 매일 그렇지,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여름을 좋아했다고. 카도와키 기억에 미즈가키가 여름을 좋아하던 기억은 없었다. 그는 원래 여름이고 겨울이고 극단적인 계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교야구 하면 여름이거든.”

“네가 그렇게 고교야구를 좋아했다고? 그럼 하지 그랬어.”

“자기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난 이제 촌스럽게 운동장에선 땀 안 흘려.”


여기선 미즈가키가 가운데 손가락을 바짝 세웠다. 난 네가 하는 게 좋은 거야. 이 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었으니까.

거짓말인 쪽으로 얘기를 하자면, 여름이 되고 본격적으로 지역예선을 시작하면 카도와키가 바빠질 게 뻔했으니까 그게 좋았다. 여기서 카도와키가 아직 1학년이라는 얘기는 통하지 않는다. 부원이 모자라지 않은 보통의 고교야구에서 1학년이 즉전력이 되는 일은 드물다지만 이건 카도와키 슈고다. 카도와키 슈고가 굴러들어왔는데 그걸 안 쓰고 배겨? 그런 감독이 있다면 미친놈이지. 안 봐도 선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는 이미 입학하기도 전에 주전이었고 올 여름의 기대주였다. 학교를 넘어 온 현의 고교야구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현에 남은 카도와키 슈고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하여간 카도와키는 바빠졌다. 그럼 쓸데없이 학교로 찾아온다거나 하는 여유는 사라질게다. 카도와키가 고역스러워했던 데이트도 뜸해질 테고. 미즈가키는 카도와키 자주 안 보게 되서 그거 하난 딱 좋았다. 딱 좋았다가도 이렇게까지 진절머리 내는 자신을 생각하면 또 끔찍해졌다. 카도와키 슈고 말고 자신이. 일희일비 하는 것이야말로 붙들려 있는 증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닌 쪽은 굳이 하지 않겠다.




지역예선이 시작되었으니 이야기는 청춘야구만화로 되돌아온다. 카도와키가 좋다고 가져갔던 만화책 말이다. 애초에 이 연애는 만화에서의 완벽한 페이지를 카도와키에게 가져오기 위해 시작한 것 아니었던가. 뜨거운 청춘의 페이지는 막 시작하려는 참이고 야구는 카도와키가 그냥 잘 하면 된다. 그리고 잘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스탠드에서 주먹 꼭 쥐고 바라봐주는 소꿉친구다. 대부분의 만화에서 그리하듯이.


“시합 보러 올래?”


그래서 카도와키는 물어봤다. 미즈가키가 입을 다물었다.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말문이 막힌 것도 아니다. 튕겨나가듯 해야 할 말들은 태산처럼 있는데 그게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왜, 카라키가 나 끌고 오라고 쑤석거리디? 아이고 네가 또 잊어버렸나 본데 난 모범생이라 야구 보겠다고 수업 째지는 않아. 네가 야구할 그 시간에 평범한 학생들은 평범하게 수업한단다. 너 아직도 우리 같은 학교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지? 카도와키가 듣고선 쉬이 납득할 대답들이었는데도. 대신 한참이 지나고서야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소꿉친구…애인…이 봐주는 야구경기……와…….”

“그래. 그거.”


미즈가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모르고 카도와키는 긍정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긍정이 미즈가키의 퇴로를 꽉 막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려고 우리 사귀는 거 아니었어?”

“아…그랬지…그랬었지…. 와……근데 이건… 진짜….”


마찰열 때문인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당장 내일이라도 일어날 현실로 훅 앞당겨지자 뒤늦게 체감이 되었다. 거절할 수 있는 모든 변명들은 사그라들고 가능성만이 뒤통수 뒤에 남았다. 뒤돌아보기라도 하면 바로 볼 수 있는 명장면으로서.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야 이건 내가 시작하긴 했지만…. 진짜…. 과한 거 알지…….” 


농담은 농담이어야 재밌는 거다. 너무 만화다. 너무 드라마다. 우리 둘이서 이 감동적인 장면을?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우리 둘이? 코가 매워서 콧등을 절로 잡게 된다. 카도와키 슈고가 진짜 코시엔이라도 갈까봐 덜컥 겁이 났다. 시골의 무명고등학교가 새로 들어온 신입생 루키로 인해 코시엔에. 이건 또 얼마나 만화 같은가. 미즈가키는 카도와키 슌지의 이름이 걸리면 쓸데없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고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객관성을 잃어버려서 정말 카도와키가 당장이라도 코시엔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은 것은 스탠드 위에 장면뿐이지. 펜스를 넘어가는 공과 스탠드에서 그 포물선을 바라보는 자신.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도는 카도와키가 스탠드 어딘가를 더듬는 모습. 기적처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아니, 수업 아니더라도… 시간 맞으면 보러 와.”


온갖 정해진 상상을 하는 미즈가키와는 달리 카도와키는 침착했다. 그저 가볍게 건네는 인사치레처럼 말했다. 티내지 않는 진심이 부담스러웠다. 



그 다음날 미즈가키는 교복을 하복으로 갈아입었다. 짧은 소매에 팔을 꿰어 넣으니 이윽고 여름이었다. 가방을 멨다. 스포츠 신문에는 토막으로 지역예선이 시작되었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카도와키의 메세지는 그보다도 더 후에 왔다. 꽤 진지했는지 자기야나 하트 같은 농담조차 없는 메시지였다. 간결한 시간표와 상대 학교의 이름이 있는 게 다였다. 미즈가키로서는 낯선 학교들이었다. 보자마자 휴대폰을 닫아버렸다. 그럼에도 첫 시합의 날짜만큼은 눈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이었다. 

그날은 수업이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여러 번 펜을 돌리다가 내려놓았다. 펜을 돌리는 궤적마저 야구배트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쉬는 시간에 반친구들과 떠들다가 슬쩍 뉴스거리처럼 얘기해 보기는 했다. 


“오늘부터 야구 한다더라.”

“그래? 덥겠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 야구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미즈가키는 비로소 편안해졌다. 편안해져서 시합 시작 전엔 카도와키에게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마치 부적 같은 메시지였다. 카도와키가 실제로 부적으로 여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세 시간 정도 후, 이겼다는 답은 되돌아왔다. 그것을 몇 번 반복했다. 카도와키의 학교 이름이 마지막으로 남을 때까지. 그동안 미즈가키는 단 한 번도 구장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카도와키 슈고는 코시엔에 갔다. 만화에나 있을 법한 기적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될 일이었다. 신문에서는 사진까지 실어 기사가 났다. 정말 미즈가키가 가서 보기라도 했다면 만화 속 페이지가 그대로 재현될 뻔 했다. 미즈가키는 신문을 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그렇지. 안 가길 잘했지. 








05.



절로 상상이 간다. 눈이라도 감으면 곧바로 그려낼 수 있다. 그라운드의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가 선명하다. 어쩐지 자신의 발끝부터 보인다. 스파이크를 신고 있다. 쓰고 있는 모자로 인해 스파이크 앞코에 동그랗게 그늘이 졌다. 모자 안쪽으로 땀이 흐르는 것마저 느껴진다. 무슨 일이람. 경식야구라고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고개를 든다. 그라운드다. 너무나 익숙한. 사방이 뙤약볕에 이지러진다. 시야를 좁히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때면 유난히도 외야가 넓어 보였다.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펜스 위로 날아가는 공. 모두의 시선이 공을 쫓는다. 미즈가키도 목을 쭉 뺐다. 천천히 아주 가파른 포물선을 그린다. 함성이 전광판을 두들기고 점수가 찰칵 돌아간다. 9회 초 3대 1. 그의 앞으로 카도와키 슈고가 뛰어간다. 착실하게 1루를 밟고, 2루를 밟고, 유격수 자리에 있는 미즈가키와 눈이 마주친다. 카도와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햇빛 아래 눈동자가 다갈색이었다. 이건 꿈이야.

미즈가키는 눈을 떴다. 역시나 꿈이다. 야구의 신이 있다면 정말이지 좀 봐줘라 싶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방학이라고 낮잠을 잔다는 게 지나치게 잘 잤다. 휴대폰에는 부재중 연락이 몇 통 와 있었다. 전부 카도와키였다. 메시지도 와 있었지만 확인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내 기다린 듯, 신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슌!”

“그래그래, 알아. 많이 보고 싶었지.”


낮잠을 잔 탓인지 목소리는 조금 잠겨 나왔다. 그다지 다듬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카도와키 앞인데 다듬어봤자 뭐하랴.


“끝났어? 끝났겠지.”

“응.”


카도와키 목소리는 조금 상기돼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피커 너머 들려오는 숨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굳이 듣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여기서 미즈가키는 한 발 더 나가보기로 했다. 눈꺼풀 이면이 아직도 뜨끈했으므로. 분명 아까 전광판 점수가, 그랬다.


“3대 1?”

“봤어?”


놀란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오. 그냥 찍어봤는데 그대로 맞아버렸다. 꿈이 용하네. 용해 봤자 좋을 일도 없지만. 무의식이라도 야구와 이렇게 얽히는 일이 달가울 리가 있나. 이 감정은 슬며시 지르밟는다. 숨소리 하나에도 티 나지 않도록. 


“난 모르는 게 없거든.”

“어떻게?”

“다 사랑의 힘이지.”

“슌, 사랑해…”


듣자마자 미즈가키는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목소리 하나 닿을 새라. 휴대폰은 푹신한 베개 위로 폭 떨어졌다. 소리를 죄 먹어치웠다. 조용해졌다. 




고시엔이라는 게,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심드렁했다. 다 자연히 그렇게 될 일이었다. 그동안의 미즈가키의 세계가 그렇게 돌아갔듯이. 미즈가키 하나 떨어져 나갔다고 해서, 혹은 어떠한 시합 하나로 훼손당하는 일이 있다고 해서 세계가 돌아가는 법칙 자체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법칙이라는 거다. 아직까지도, 이 지경이 되어서도 미즈가키 슌지는 카도와키 슈고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끌고서 산다. 참 미련하게도 말이다. 

다만 이건 미즈가키의 세계에서나 당연한 일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겐 고시엔 진출 자체가 큰일이었다. 평범한 야구부들 중 하나였던 학교를 단번에 고시엔까지 끌고 올라간 데에는 자연히 이목이 집중했다. 중학야구와 고교야구는 주목도 자체가 다르다. 신문에 심심찮게 이름이 등장했다. 카도와키 슈고의 코시엔 진출은 한동안 동네를 넘어서, 현 내에서 꽤 소소한 화젯거리가 됐다. 동시에 일전 스카우트건도 다시 물위로 올라왔다. 이걸로도 얘기는 풍성해진다. 화젯거리인지 자랑거리인지 아님 그저 가십거리인지, 어쨌든 질릴 정도였다. 응원의 말에 질리는 게 아니라 그들의 행위 자체에 질려 버렸다. 더러는 그럴 줄 알았다고, 카도와키 슈고를 믿고 있었다고 했다. 미즈가키가 하는 말과는 같되 속 알맹이는 아주 다른 언어였다. 차라리 손바닥 뒤집는 게 더 어렵겠다. 카도와키는 시합보다도 주위의 관심 때문에 지쳐버렸다. 공은 무섭지 않은데, 사람은 무서운 게 맞나봐. 중얼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어.”

“알기야 진작 알았지.”


당장이라도 사람들을 피해 고시엔으로 떠나고 싶은 듯했다. 아직 오사카로 가기까지는 3일이나 남아 있음에도 합숙 짐을 벌써부터 싸고 있었다. 보스턴백의 아가리를 커다랗게 벌려 놓고 온갖 옷을 쑤셔 넣었다. 그 요란을 보고 있자니 미즈가키로선 그러니까 진작 떠나버렸으면 좀 좋았어, 하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카도와키가 짐 싸다 말고 다 팽개치고선 드러누웠다. 기껏 각 잡아 접은 티셔츠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허공에 붕 뜨다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았다. 주워보니 근처 가게 이름이 초록색 글씨로 날염되어 있다. 3년쯤 전 사은품으로 상점가에서 뿌린 티셔츠가 분명하다.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런 걸 왜 챙기는 거야? 다른 옷 없어?”

“그게 편해.”

“넌 오사카에 가서도 여기 망신을 시키려는 거야?!”

“와, 슌지. 너 지금 동네 사람들이랑 똑같은 얘기 했어.” 


카도와키가 바로 돌아누웠다. 정말로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귀까지 틀어막았다. 쓸데없이 완고한 자세였다. 미즈가키는 그 큰 덩치 위로 올라탔다. 몸무게를 실어 뒤트는 몸뚱이를 찍어 누르고 귀를 막은 손을 억지로 뗐다. 천근같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들어올렸다. 틈이 생기자마자 입을 밀어 넣었다. 빠르게 속삭였다.


“자기야. 동네 망신시키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저거 치워.”


하는 김에 수건도 다 갖다 버렸으면 좋겠고. 속삭이는데도 카도와키는 영 탐탁치 않아했다. 몸을 흔들어서 그 위에 몸을 실은 미즈가키마저 기우뚱했다.


“안 치우면?”

“뽀뽀해주지.”

“허.”


애인이어서 할 수 있는 끔찍하게 사랑스러운 제재였다. 카도와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그런 장난은 상상조차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못할 게 뭐가 있어. 애인인데. 바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딱히 대중없이 찍어 눌러 입술이 카도와키 관자놀이에 닿았다. 그것도 살갗이라고 뜨끈했다. 들이마셨다. 카도와키에게선 야구냄새가 난다. 그것은 낡은 가죽냄새와 햇빛에 바랜 먼지 냄새다. 미즈가키가 오래 전부터 버리고 털어내고 싶어했던 바로 그 냄새. 카도와키는 깔깔 웃으며 다시 몸을 뒤틀었고 미즈가키가 흔들리는 바람에 이 사랑스런 제재는 곧 애들 레슬링에 진배없어졌다. 한 바퀴 굴렀다. 주먹 만한 어릴 적에는 곧잘 그러고 놀았더랬다. 그걸 머리깨나 큰 아직까지 하고 있다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다만 이제는 그때보다 덩치 큰 어른인데다가 미즈가키가 그렇게까지 다정하지 않았으므로 레슬링은 좀 더 추잡해졌다. 어디까지나 카도와키가 티셔츠를 버리질 않아서였다. 추근거림에 카도와키는 기겁했으나 곧 상황을 받아들였다. 몇 번 엎치락뒤치락 하더니 몸을 축 늘어뜨리고 달게 받아들였다. 순종적인 개와도 같았다. 더러는 마주 안아 같이 입을 맞대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키스란 걸 의식하지 않으려 숨을 여러 번 밭게 쉬었다. 그 정성이 착해서 몇 번이고 입을 떨어뜨려 주었다. 착하지. 착하고 착한 카도와키 슈고.




그로부터 3일 후 카도와키 슈고는 고시엔으로 떠났다. 여름방학의 한복판이었다. 과연 뜨거운 청춘에 뜨거운 야구다웠다. 그에 비해 상당히 미적지근하기 짝이 없는 미즈가키는 예의상의 배웅만 했다. 이른 아침 동네 초입까지의 짧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가방을 나눠 들었다. 가방은 묵직했다. 티셔츠도 수건도 모두 제대로 가방 안에 들어갔다. 미즈가키는 그게 자신이 든 쪽의 가방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바람치고는 썩 소박하지 않은가. 고시엔에서의 야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로 했다. 어느 바람이건 함부로 했다가는 괜히 후회할 것 같았다. 카도와키는 뭔가를 바랐을까? 떠나기 직전 미즈가키를 물끄러미 바라본 걸로는 그렇게도 보였다. 미즈가키가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잘 하고 와, 라고 말했음에도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카도와키의 등을 돌려 억지로 떠밀고 나서야 기묘한 순간은 사라졌다.




미즈가키 슌지는 고시엔에 가지 않았고 그 나름대로의 한가한 여름방학 며칠을 보냈다. 카도와키가 고시엔으로 떠나지 전과 이후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고시엔의 소식을 연신 떠들어댔다. 열기란 금방 전염되는 것이어서 듣는 귀가 다 후끈해졌다. 텔레비전을 꺼도 고시엔의 잔상은 남아 있었다. 그럴 때면 카도와키가 없는 동네를 거닐었다. 단 한 사람이 빠져나갔을 뿐인데 동네는 순식간에 색이 빠져 한적해졌다. 아 이게 바로 카도와키 슈고가 없는 세상이었군. 이 풍경을 매일 볼 수도 있었다. 잘 안돼서 이지경이 됐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쉬운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러했다. 카도와키를 밀어냈던 골목 어귀에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금방 고개를 돌렸다. 집에 갈 땐 간식이라도 사가지고 가야겠다. 일없는 산책이 되지 않도록.

더러 전화가 왔다. 더러라기보다는 매일 왔다. 카도와키 슈고는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오사카에 있는 동안 미즈가키와 전화통화를 몇 번이고 했다. 그 치고는 핸드폰을 유용하게 쓴 축이다. 그래서 통화가 재미있었냐 하면 그다지 라고 하겠다. 정직한 통화내용은 마치 텔레비전의 요란한 고시엔 소식과 열기를 직접 귀 안으로 처넣는 것만 같았다. 몇 분 통화하고 나며는 금세 귀가 얼얼해졌다.  

간간이 카도와키 슈고는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치 애인처럼.


“…아 그게 맞지.”


애인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반박하려다 미즈가키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카도와키는 애인이 맞았다. 요 며칠 카도와키 슈고가 옆에 없어서 그만 깜박했었다. 되도록 생각 안하려 했다는 쪽이 더 맞겠지만. 저 너머에서는 미즈가키가 혼자 고뇌하고 설득하는 걸 들으며 낭랑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꼭 애인 아니더라도 보고 싶은 건데.


“어 음…. 슈고. 오사카에서는 모두 그런 식으로 말하니? 그 동네 정말 무섭구나….” 


카도와키는 숨넘어갈 듯 웃고는 잘 자라고 했다. 전화는 으레 그런 식으로 끊어졌다. 늘 잘 자라는 인사말을 남기고선. 그게 못내 간지러웠다. 전화기를 놓고선 귀를 문질렀다. 며칠이나 갈까. 달력을 보고 날짜를 헤아렸다. 가장 뜨거운 여름은 날짜로만 치면 며칠 되지도 않는다. 과연 끝까지 가느냐가 문제겠지만.




그래, 문제다. 갓 진출한 신참 학교가 뚫기에 고시엔의 벽은 높았다. 카도와키는 전국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부원들은 처음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 카도와키조차 아직 1학년이었고. 초전돌파가 요행이었다. 카도와키 슈고는 2회전에서 탈락했다. 이만하면 잘했다고 다들 희미하게 납득하면서도 분함은 어쩔 수가 없어서 울었다. 날이 뜨거워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며칠간이라고 했으나 실은 아주 짧은 여행이었다. 캐스터는 더 이상 카도와키 학교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미즈가키는 덤덤하게 들었고 역시나 귀가 뜨거워질라 빠르게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날은 전화가 오지 않았다. 차라리 왔으면 좋았을까. 전화는 오지 않고 열대야가 심해 미즈가키는 잠을 오래도록 설쳤다. 고시엔의 모든 여기가 죄 방으로 몰려온 듯 후끈거렸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그래서 낮에 온 전화를 미처 받지 못할 뻔했다. 잠에 취한 목소리에 카도와키가 웃었다.


“잤어?”

“그래.”


습기 가득할 줄 알았던 통화는 의외로 덤덤했다. 전부 짭짤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열기가 훅 빠진 채로 주고받는 이야기에서 비로소 카도와키의 속내음이 드러났다. 썰물에야 드러나는 갯벌의 맨바닥처럼. 


“좀 더 오래 있으면 여기 와주지 않을까 했었어.”

“…슈고 네가 이렇게 두뇌파일줄은 몰랐었네.”


미즈가키는 혀를 내둘렀다. 카도와키 말이 맞았다. 체류해서 혹시 짐이라도 모자랐으면 미즈가키가 그 먼 길을 날라다 줄 게 뻔했다. 분명 카도와키 어머니가 놀다 올 겸 부탁한다고 억지로 짐을 맡겼을 테고, 미즈가키는 그걸 절대 거절하지 못했을 테니까. 진심으로 노렸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말대로 되지 않아서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제서야 떠나던 날 카도와키의 기묘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같이 가주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다.

카도와키가 늦게나마 선물을 얘기했으나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말했다. 고시엔 기념품이라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하물며 고시엔 흙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06.



짧고 치열한 여정이었다. 카도와키 슈고가 고교 야구의 성지, 여름의 한복판으로부터 돌아왔다. 얼굴이며 팔이며 가릴 것 없이 벌겋게 탄 얼굴로 말이다. 들고 갔던 짐은 그대로였다. 보스턴 백과 에나멜 가방 두 개. 거기에 얹어 기념품이랍시고 소품 몇 개 사온 것이 전리품이다. 물론 모래 한줌 또한 잊지 않았다. 


“후.” 


동네 초입에서 더운 숨을 뱉었다. 그가 갔던 곳이 여름의 한복판이었을 뿐이지 요코테라고해서 여름이 지나치는 건 아니었다. 요코테 또한 오사카 못지않은 여름이다. 그러니까 카도와키는 여름으로부터 여름으로 돌아온 셈이다. 가방을 멘 채로 손부채질을 했다. 온 몸이 끈적끈적했다. 당장이라도 씻었으면 하는 생각이 가득했는데도 발이 여간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다. 아주 천천히.




그가 여름의 한복판으로부터 질질 끌고 돌아온 공기가 유난히도 눅눅했으므로, 미즈가키는 카도와키가 돌아온 걸 바로 알아차렸다. 슈고가 돌아왔다. 감이란 건 때론 곤혹스러울 정도로 예민하다. 애써 무시하고 싶을 정도로는 그렇다. 책을 한 권 읽었고, 컵라면을 꺼내 먹었다. 오락프로그램을 보며 웃다가 억지로 낮잠까지 잤다. 여느 때와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이 핸드폰을 들고선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했고 그러고 나서야 미즈가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감을 끝내 무시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원래 감이라는 게 다 그렇잖은가. 그는 카도와키가 걸음마다 뿌렸을 것이 분명한 눅눅한 공기를 슬슬 따라갔다.  

카도와키의 집에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카도와키가 방 한복판에 드러누워 사지를 쭉 뻗고 있었다. 거 봐라, 감이 틀리지 않지. 그는 말 그대로 온몸을 바닥에 널어놓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선 선풍기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선풍기 날개 돌아가는 사이로 풍경이 짤랑 울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여름의 정취요, 여름의 한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다 눈치 까고 왔음에도 미즈가키는 순간적으로 얘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만큼이나 지금과 이 공간과 카도와키가 서로 맞물리지 않았고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고시엔과 그라운드가 조금 더 어울렸다. 이런 방바닥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지를 늘어뜨리고 누워 있을 게 아니라.

카도와키는 아무 미동이 없었다. 딱히 잠자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눈을 감고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곱씹고 있던가. 마치 도 닦는 것처럼.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다. 분한건지, 슬픈 건지, 지친 건지, 담담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미즈가키로선 그다지 잡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즈가키는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고 카도와키를 방해하지 않았다. 더위 위로 가벼운 침묵이 떨어졌다. 선풍기만 윙윙 돌았다. 그것 따라 생각도 맴을 돌 텐데, 카도와키는 참 잘도 누워있다.  

카도와키의 감정 따위 오리무중이라고 시침 뚝 떼기엔 미즈가키에게도 전국에 간 경험이 있긴 했다. 전국에서 돌아온 경험도 있고. 있기만 하다. 속으로 반문한다. 그거 완전 코찔찔이일적에 갔다 온 거 아냐? 중학교 때의 전국대회 기억 같은 건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카도와키가 그때의 일이라도 들먹거리며 공감을 구하려거든 당장 둘러댈 망각을 목젖 아래 짤랑짤랑 매달아 놨다. 물론 이 망각들은 죄 거짓말이다. 잊어버릴 리가 있나. 잊어버릴 리가… 없지.


미즈가키가 뻔한 거짓말들을 곶감처럼 주렁주렁 달아 놓는 사이 카도와키가 눈을 떴다. 똑바로 천장을 봤다. 그리고 목을 꺾어 미즈카기를 돌아 봤다. 딱히 놀란 눈치는 아닌 것이 진즉에 알고 있었나 보다. 미즈가키도 질세라 내려다 봤다. 삐딱하게 팔짱도 꼈다. 오랜만에 보는 주제에 해야 할 인사는 하지 않고 대신 눈싸움만 고요히 오갔다. 서로 보고는 있되 시선이 미묘하게 엇나가는 기분이었다. 그건 미즈가키가 방에 들어온 순간 반사적으로 카도와키와 이 공간을 유리시키던 느낌과도 흡사했다. 희미하게 알 것도 같았다. 카도와키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이고 몸이고 이것저것 헛돌고 있었다. 미즈가키도 모르는데 답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이제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야.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모르는 사람은 말을 해야 한다. 눈치 없는 척.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척, 늦은 인사를 건넨다. 


“왔어?”

“응.”


그리고 카도와키는 눈을 내리깔았다. 미즈가키에게 답을 구해야 할 것이 아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계속 생각할 것이다. 답답하게도. 하여간 넌 너무 느려. 아직까지 감정을 정리하고 있으면 어떡해. 꼭 정의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체로도 충분하잖아. 미즈가키는 그가 여태 꺼내지 않은 거짓말 서 말과 함께 이 말들마저 삼킨다. 뱃속이 꽉 찬다. 더부룩하다. 오랜만에 본다고 간식을 주렁주렁 챙겨주실 텐데, 그 간식은 못 먹고 갈 것 같다. 아쉽게 됐다. 

미즈가키가 선풍기 날개를 따라 빙글빙글 잡생각을 하는 사이, 카도와키가 미즈가키의 손을 잡아끌었다. 밑으로, 밑으로, 바닥으로.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미즈가키는 못 이긴 척 끌려 내려가 카도와키 옆에 드러누워 줬다. 카도와키는 그냥 손님치레하기가 귀찮으니 그랬던 것 같았다. 둘은 그래서 나란히 누웠다. 도로 눈을 감았다. 이미 낮잠 거하게 자고 왔던 미즈가키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천장만 봤다. 흰 천장에서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별도 비도 구름도. 목을 세우자 창밖의 하늘이 거꾸로 보였다. 여전히 카도와키의 손을 잡은 채였다. 손바닥이 금방 축축해졌다. 이건 소꿉친구로서의 위로일까, 연인으로서의 위로일까. 알쏭달쏭했다.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천장 벽지에서는 그의 바램을 들어줄  별이 없었다.




정적은 차분하게 지나갔다. 생각은 길었겠지만 이윽고 갈무리의 때는 왔다. 누워있던 침묵의 시간이 충분히 길어서 그럴만했다. 아직 1학년이기도 했고. 카도와키는 의외로 산뜻하게 툭 털고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손바닥의 땀을 비벼 닦았다. 덥기는 더웠나보다. 그렇게 귀엽게도 잡아놓고선 가증스럽긴. 빈 손바닥이 새삼 시원해져서, 까닥거렸다. 


“친절하게 위로의 뽀뽀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카도와키가 털고 일어나서야 미즈가키는 빈정거렸다. 말하고도 스스로가 웃긴지 낄낄 웃었다.


“그건 별로 안 고마운데.”

“만화에서는 그렇게 하거든.”


카도와키 방의 책장을 훑는 척하며 미즈가키가 되받아쳤다. 책장을 보는 척 하는 건 으레 습관이 되었다. 그랬지, 다 만화책 때문이었다. 문제의 만화책은 여전히 그대로 꽂혀 있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 순서조차 똑같았다. 아주 직접 만화의 한 장면을 구가하느라 펼쳐 볼 일도 없었나 보다. 그래, 올해 여름은 다 끝나버렸구나. 체감한다. 만화책의 한 권을 아예 닫을 때가 온 거다. 그래도 현실의 좋은 점은 바로 다음 권이 있다는 점이다. 한 단락이 끝났다 해서 시간은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여름도 정지하지 않는다. 카도와키 슈고에게는 아직 여름이 남아 있고 여름방학 또한 남아있다. 실질적인 여름방학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야구소년의 여름이 아니라 그냥 여름 말이다. 


“이제 나머지 여름엔 뭐해?”

“데이트를 해야지.”

“또오?”


말꼬리가 늘어진다. 카도와키는 조금 질린 얼굴이다. 그래봤자 체념은 빨랐다. 그는 이전에 그랬듯 혹은 늘 그래왔듯 온순한 개처럼 당면한 모든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차라리 싫다고 했으면 미즈가키도 선심 쓰는 척 좋다고 물러나 줄 텐데, 그게 안 된다. 남은 방학은 꼼짝없이 카도와키 얼굴이나 보며 지내게 생겼다. 순전히 미즈가키 주둥이의 재앙 하나로. 그리하여 당면한 문제에 맞닥뜨린다. 여름방학 때 하는 데이트란 뭐가 있을까.  


“바다 아니겠어.”


파도소리, 갈매기,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 정론이다. 바다라면 많이 가 봤다. 그야말로 정통 피서지 아니겠는가. 꼬마였던 카도와키 슈고와 미즈가키 슌지는 매 해 여름마다 바다에 갔었다. 가족끼리이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이기도 했다. 얕은 물에서 튜브도 타 봤고 파라솔 밑에서 아이스크림도 먹어 봤으며 심지어는 수박 깨기도 해 봤다. 눈 아래 펼쳐지는 새파란 물결, 물결, 물결. 넘실넘실 비치는 카도와키의 얼굴. 여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또 징글맞아졌다. 오래된 친구란 그렇다. 시간은 차곡차곡 누적되고 그동안 할 만한 일들이란 전부 해 본 것이다. 이제는 다른 일을 찾아야하는데, 그게 여의치가 않다. 바다는 조심스럽게 접어두었다. 그렇게까지 데이트에 정성을 들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이에 한 몫 거들었다. 범위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축제 하더라.”

“그랬어?”


카도와키는 야구만 하느라 미처 몰랐다. 그럴 때가 되기도 했지, 중얼거린다. 축제라. 아직도 일상이 귓가에서 저 멀었다. 아른아른했다.


“끔찍하게 단 빙수를 먹고 불꽃놀이를 보는 거야.”

“그거 그럼 평소에 하던 거랑 별로 다를 게 없는 거 아냐?”


카도와키치고는 제대로 된 지적이 들어왔다. 미즈가키는 머리를 굴려봤다. 축제와 커플이라. 그간 보아왔던 여러 가지 눈꼴신 그림들이 얼핏 지나간다. 미즈가키도 때 되면 자연스럽게 할 줄 알았더랬다. 이런 놈이 아니라. 다른 애랑.  


“유카타…는 입을 놈이 없고. 그거 내 로망이었는데.”

“유카타가 로망이라고?”

“아니 그쪽 말고. 축제 때 유카타입은 애인 쪽이.”


카도와키는 유카타 얘기를 처음 들었다. 농담이든 진심이든 은밀한 취향 있는 줄은 알았지만 얘도 참…. 


“너한테 그런 변태 같은 로망이 있는 줄은 몰랐다.”

“유카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특별한 날 힘내서 입었다는 그게 좋은 거거든? 생각났다, 생각났어. 그거 진짜 좋은데. 왜, 머리도 틀어 올려 묶고. 난 그럴 때 목덜미 드러나는 그게 그렇게 좋더라.”


카도와키는 구구절절 미학을 논하는 목덜미를 빤히 봤다. 햇볕에 타지 않은 목이 형광등 아래 허옇다. 길고, 손에 잡으면 한 손에 들어올 듯이. 충동이었다. 손가락 끝이 절로 까닥거렸다.    




딱히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 둘은 축제에 가긴 갔다. 나름 생각해서 다른 형태를 짠다는 게 입구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만나서 같이 가면 평소와 다를 게 없을 테니까. 일종의 변화구다. 기껏 쥐어 짜내고도 허무하긴 하다.

그리고 미즈가키는 이 변화구를 몹시 후회하게 되는데, 카도와키가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이후로는 카도와키의 유카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몹시 생소했다. 백스텝 밟고 뒤로 돌아서서 마구 뛰어가고 싶어질 만큼은 그랬다. 슬며시 뒤로 밟는 발걸음을 카도와키가 잡아챘다. 


“로망이라며?”

“그래…. 그랬었지….”


얘가 코시엔 흙을 밟더니 돌아버렸나. 하하 웃었다. 어깨선이 야시장의 전구 조명을 받아 노랗게 그려졌다. 어른에 부쩍 가까워지는 어깨다. 그래, 이런 게 로망이던가. 손을 잡으면 소매 안으로 낙낙하게 들어가는 것이 로망이던가. 인파속에 쉽사리 묻혔다. 어깨에 닿는 느낌이 까슬까슬했다.








07.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슬금슬금 드는 생각인데, 연애를 하는 상태로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이 좀 맛이 가는 모양이다. 핑크색 엔도르핀이 솟는다고 해야 하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는다고 해야 하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분에 취해 휘청거리게 된다.  달고 단 꿈이 깨어서도 희미하게나마 지속된다. 비록 반 이상은 장난인 연애라지만 그것도 연애랍시고 미즈가키가 그랬다. 카도와키가 연애 할 만하다고 했던 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내 이렇게 취해 있을 수만 있다면 정말로 할 만할 지도 모른다. 

사람의 적응력이 놀랍다는 생각은 이미 집어치웠다. 사람의 적응력보다는 단연코 사랑의 힘 쪽이 위다. 그러니까 놀라운 건 사랑의 힘이다. 대단도 하네. 혀를 내둘렀다. 비꼬는 것도 있겠지만 순수한 감탄의 의미에서다. 

생각은 여기까지 달려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잠깐이나마 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이건 사랑도 적응력도 엔도르핀도 아니다. 그냥 더위를 먹은 거다. 더위를 먹다 못해 새빨갛게 익은 거지.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니 냉정한 판단은 이만하면 됐다. 이성은 다시 기우뚱 기울었다. 저 넘실거리는 핑크빛 안개 위로. 더위와 엔도르핀 위를 두둥실 떠올라 부유하는 머리는 혓바닥을 자유롭게 했다. 고삐 풀린 혓바닥이 자꾸만 방정맞게 굴었다. 죄 헛소리였다, 헛소리. 미즈가키는 어쩌다 길에서 중학교 동창을 만나거든 이런 얘기도 했다. 으레 하는 인사에 슬쩍 섞었다. 


“아 요즘? 슈고 그놈이랑 연애해. 정말 끈적끈적한 관계란다.”


그나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황이다. 제법 재미있는 농담이었나 보다. 듣는 놈들 중에 아주 웃지 않는 놈이 없었다. 웃느라고 어깨를 부산스레 들썩였다. 너 고등학교 가더니 많이 늘었다, 하는 식으로 등을 두드리는 놈도 있었다. 제가 한 농담이라지만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유머러스의 대명사 미즈가키 슌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떨어졌나. 연애한다는 말 하나로도 쉽게 웃기는 걸 보면. 투덜대며 깡통을 걷어찼다. 쓰레기통 근처에 뚝 떨어졌다. 되는 일이라곤 없다. 다시 주우러 갈 기분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우발적 사고는 바로 그 즈음에 일어났다. 여름방학 말미, 개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아서였다. 사실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될 일이었겠지만, 그들 사이가 평범한 연인은 아니었기에 이건 사고 쪽으로 분류되었다. 미즈가키는 무조건 이 쪽으로 밀고 싶었고, 카도와키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둘 다 똑같이 이랬던 걸 보면 사고가 맞긴 맞았다. 

아마 미즈가키가 이날만큼 줄담배를 피운 날도 없었을 것이다. 호흡하듯 담배를 피웠고, 무는 담배마다 입에 착착 말려 들어갔다. 혓바닥 위로 두텁게 쌓였다. 나름 몇 년을 피웠다고 피웠는데도 이건 또 각별한 맛이었다. 아마도 향후 몇 년 간은 못 잊을 것 같다. 훅 빠니 훅 타들어갔다. 뱃속에서는 담뱃불이 울렁거렸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꿉꿉하고 착잡했다. 창문을 열고 훅 내뱉었다. 볼이 후끈후끈하니 죄 얼굴로 뱉어낸 것만 같았다. 하늘에 침 뱉는 기분이었다.


“아, 이런 장면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러다 퍼뜩, 하고 떠오르는 것이다. 기시감이랄 것도 없었다. 지나치게 상투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도 식상해서 어느 장면이라고 특정해서 짚어내지도 못한다. 원래 섹스 후 장면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않은가. 특히나 예기하지 않았던 섹스라면 더. 그래, 섹스 후엔 그렇게나 담배 말리는 게 이 때문이었다. 미즈가키는 숨 대신 담배 연기 들이마시면서 절감했다. 그래, 카도와키 슈고와 내가 섹스를 하긴 했구나. 아직도 등골이 저릿했다. 


경위 자체는 심플하다. 섹스 자체가 따지고 보면 아주 단순한 행위이듯이. 여름방학이었고 카도와키 슈고의 코시엔은 끝났다. 동아리는 한가해졌다. 이른바 휴식의 기간이었다. 시간이 많아졌다. 너무 많았다. 너무 더웠고. 그리고 그들은 명목상의 애인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아니 평소보다도 훨씬 긴 상당수의 시간을 붙어 있어야 했는데,(그것 또한 하나의 엿 먹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동안 유리잔 안의 얼음은 몇 번이고 녹았다. 얼음은 모서리부터 둥그러져 무너졌다. 천천히 무너지는 그것에게는 어떠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선풍기 방향을 발로 바꾸며 미즈가키가 돌아누웠다. 도로 카도와키가 방향을 바꿨다. 고요한 쟁탈전이었다. 오래된 선풍기는 방향을 바꿀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미즈가키 발이 선풍기 앞에서 미끄러졌다. 얼음 하나가 손톱 만해지더니 완전히 녹았다. 

평소같으면 얼음이 두개 정도 남으면 둘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방을 버리고 나가곤 했다. 그놈의 망할 데이트를 하러. 미즈가키는  카도와키와 친구처럼 붙어 있느니 차라리 애인처럼 노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친구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오래된 친구 말이다. 그 오래된 친구 카도와키는 단지 더워서 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와서도 부채질을 여러 번 했다. 아무렴 방 보다야 냉방 되는 카페가 훨씬 나았다. 게임센터도 괜찮았고.


다만 이날은 예외적이었다. 얼음이 하나가 남고 이윽고 다 녹아 없어졌음에도 방에 붙어 앉아 선풍기 방향만 연신 바꿔대고 말았다. 유리잔 가득 보리차만 찰랑거렸다. 이게 문제였다고 하겠다. 맺힌 물방울이 이윽고 흘러내리듯, 불어난 물이 넘치듯. 언젠가는 그리 했었을 것처럼 자연스럽게.

미즈가키가 선풍기 대신 맨발로 카도와키 등을 툭툭 건드린 것이 우발적 사고의 시작이었다. 엄지발가락이 흰 티셔츠에 주름을 잔뜩 그리며 흐물흐물 내려갔다. 


“자기야.”


으레 하는 달콤한 부름이었다. 말 꼬리로 한껏 가지고 노는 말들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너무 더워서 길게 말할 기력도 없었다. 대신 미즈가키는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카도와키 슈고의 어떤 점을 건드렸는지는 잘 모른다. 지금에 와서도 잘 모르겠다. 아마 카도와키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 싶었다. 그런 섹스였다. 저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잠시 망각하고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섹스. 카도와키가 더위에 찌들다 못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미즈가키쪽으로 천천히 무릎걸음 했다. 몸이 기울어져 입술이 닿았다. 미즈가키는 별 말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카도와키가 단 한 번도 미즈가키가 장난삼아 입 맞췄을 때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게 그간 했던 장난의 업보려니 하고선. 쌓아온 업보가 크긴 컸다. 그래서 미즈가키는 넌 대체 언제부터 섹스하는 법을 알았느냐고 우스갯소리조차 하지 못했다. 꽤 회심의 일격이었을 텐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새도 없이 그대로 흘러갔다. 느긋하고도 급했다. 몇 번이고 헐떡이며 등을 끌어안았다. 결과가 줄담배다. 미즈가키는 한참을 뻐금거렸다. 놀랄 노자다.

그동안 친구만 해봐서 속궁합이 좋은 줄은 미처 몰랐네….

줄담배 끝에 다다른 결론은 허무하게도 이것이었다. 꽤 괜찮았다. 물론 미즈가키도 처음 하는 섹스라 딱히 비교할 대상이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만하면 좋았다고 생각했다. 친구만 해서는 평생 몰랐을 일인데. 허허, 웃었다. 다소 넋이 나간 생각이었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아 천만 다행이었다. 미즈가키는 마지막 담배를 껐다. 어느덧 담뱃갑이 텅 비어 있었다. 집에 가야겠다. 카도와키가 물끄러미 미즈가키를 봤다. 사라져가는 연기를 쫓았다.




이 일이 어떠한 전환점이 되었을까? 가속하거나, 유턴하거나, 멈추거나.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속도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여름방학은 고작 하루 남아버렸다. 

남은 기간 동안 카도와키는 엉성하게나마 방학숙제를 전부 해냈다. 얼마나 엉성하냐면 코시엔을 봐서 겨우 참작될 만한 정도였다. 그 한계선에 대해서는 미즈가키가 알려줬다. 미즈가키는 숙제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꼼수를 가르쳐 줬다. 대충 공백만 채우는 거다. 카도와키는 못 내켜했지만 이젠 물리적인 시간 자체가 없었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토 달기엔 펜 놀리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프린트 종이 위로 손가락 그림자가 졌다. 눈이 따라갔고 미즈가키가 낮게 읊조리는 대로 펜대가 부지런히 돌아갔다. 영어로 쓰고 있는 것은 지문이 아니라 팝송 가사다. 미즈가키가 읊조리는 가사에도 점점 멜로디가 붙었다. 옳지, 잘한다. 어차피 대충 영어로 공백 없이 채워만 놓으면 읽어 보지도 않고 넘어갈걸.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카도와키는 베끼면서도 어찌나 양심이 찔리던지 지난번 이 방에서 섹스하던 것보다도 지금 이 일이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비하면 프린트 종이 위에 손가락 건드리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서도 왼손은 공백을 짚어주는 미즈가키의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미즈가키는 뭐라 하지 않고 손가락을 슬그머니 치웠다. 카도와키는 도망가려는 손가락을 쫓아갔다. 모든 행동이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하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꺾인 채로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손가락. 잡혀서도 그다지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미즈가키는 그저 여상하게 봤다. 이후 카도와키는 이런 종류의 스킨십에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가벼운 접촉에도 농도가 훨씬 짙어졌다. 원래 몸으로 익히면 습득이 빠른 편이다. 그게 연애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지만. 미즈가키의 장난에 맞춰주는 건지, 지가 내켜서 하는 건지 미즈가키 슌지는 조금 헷갈린다. 헷갈릴 정도로는 카도와키가 잘했다. 잡힌 손가락은 그대로 둔 채 중얼거린다. 여전히 말투는 여상했다. 


“슈고, 넌 뭐든 잘 하네. 최선을 다하고.”


하마터면 카도와키는 미즈가키의 말이 노래 가사인 줄 알고 받아쓸 뻔 했다. 펜이 잠시 멈췄다. 아주 잠시 멈칫했을 뿐, 제대로 된 영어가사를 다시 이어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게 방학숙제 얘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상대가 너니까.”

“하하.”


카도와키는 대다수의 상황에서 그러했듯이 진심으로 대답한다. 최선을 다해 말을 고르며. 돌아오는 건 완전히 성의 없는 웃음소리였다. 허공을 툭툭 치고는 말았다. 잡혀 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 보니 세상 노래 대다수는 사랑 노래다. 지금 카도와키가 대충 써 넣는 팝송도 그렇고. 죄 사랑 노래고 연애노래다.


“연애하면 이런 타입이었군.”

“이상해?”

“아니 뭐.”


어쩐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너무 상상 그대로라 시시하기도 하다는 듯. 그리고 굳이 덧붙인다. 


“아, 섹스 잘할 줄은 몰랐다. 그쪽으론 완전 숙맥일 줄 알았거든. 카도와키 슈고가 언제 이렇게 커서….”


자못 감회스럽기까지 한 어투였다.


“야.”


지나치게 장해하는 저 어투를 지적해야 할지, 내용을 지적해야 할지, 묻어버리기로 한 사고를 꺼내 들쑤시는 걸 지적해야 할지, 카도와키는 골이 아팠다. 하지만 지적해야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빠르게 지나가는 말들이었다. 미즈가키는 바로 이어갔다. 여전히 흥얼거렸다. 


“나는 사귀다 헤어지면 남이 되는 타입의 사람이야. 쿨하지 않거든 완전 질척질척해.”

“나는……사귀다 헤어져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처음으로 해 보는 연애였으니까. 그런데 이게 언제 끝날 지 카도와키도 모르고 미즈가키도 모른다.








08.



그게 언제였더라. 곰곰이 되돌아본다. 중학교 2학년이던가? 가물가물 흔들리는 시간을 정확하게 바로잡는다. 중학교라 하니 괜히 아련한 기분이 든다. 고작 1년 전만 해도 똑같은 중학생이었으면서 말이다. 아직은 미즈가키 슌지가 모든 것을 그럭저럭 제대로 갈무리 할 수 있었을 때였다. 어디까지나 아직까지에 불과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 어설프고 위태로운 봉합이 언제까지고 가능할 줄만 알았더랬다. 티내지 않고 묻는 것이 진짜 어른스러운 거라고, 속으로는 자못 으스대기까지 했었다. 정말로 어린애 같은 짓이었다. 그래, 아마 그쯤이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고, 동시에 어른이 싫었고, 그만큼이나 철은 없었으면서 생각은 많았던.


그날 미즈가키는 카도와키와 함께 운동장 가장자리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애써 그늘을 찾아 기어들어가 시험지를 펼쳐놓고선 그 위에 주저앉았다. 콜라로 가볍게 건배를 했다. 막 시험이 끝난 참으로, 그 기념을 위한 건배였다. 물 떨어지는 콜라캔은 꽉 차있어서 청량한 소리보다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콜라는 미즈가키가 샀다. 자판기까지 뛰어가는 내기에서 져서다. 다시는 슈고랑 몸 쓰는 내기는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콜라를 쓰게 삼켰다. 카도와키는 옆에 앉아 꼴깍꼴깍 잘만 마시고 있었다. 엄청 후련해보였다. 이러니저러니 결과가 어떻다 해도 시험이 끝난다는 건 그런 거다. 고등학교 수험이야 한참을 남은 남 일이었고, 그래서 성적 따위는 바로 잊어버렸다. 모두가 그랬다. 미즈가키는 큰 짐이라도 덜어낸 듯 우르르 떼 지어 나가는 애들의 뒤꽁무니를 일별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쉽고, 다들 시내나 쇼핑몰이나, 하여간 놀기 좋은 곳들을 찾아갈 것이다. 이런 신나는 날 학교 한 구석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건 미즈가키와 카도와키뿐이다. 텅 비어가는 학교에 단 둘이 남은 이 호젓함이 싫진 않았다.

학교에 남자고 한 건 카도와키다. 그라운드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은 시험기간이라 그라운드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시험기간에야 착실하게 지켜왔지만 시험 마지막 날에 이르자 카도와키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왜 굳이 마지막 날까지? 더 기다리기에는 좀이 많이 쑤셨고 안달이 나기까지 했다. 집 마당으로는 부족했고. 그래서 하는 일종의 투정이자 시위다. 시험도 끝나 딱히 막을 이유도 없겠다, 조금 버티고 있으면 그라운드에서 배트라도 휘두르게 해 주지 않을까 하는 요량으로 카도와키는 남았다. 속이 빤히 보이는 짓이었다. 그 빤히 보이는 어린애의 욕심이 기특해서라도 그라운드는 카도와키에게 못 이긴 척 개방될 것이다. 그래서 미즈가키는 함께 남아주었다. 나가는 애들에 어울려 노래방이나 오락실에 갈 수도 있었지만 그냥 이쪽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네 덤으로 나도 몸 좀 풀지 뭐. 카도와키에게는 이렇게 말해 놨다. 카도와키는 대놓고 반가워했다. 누군가가 동조해준다는 것, 그게 바로 팀의 상승효과지. 그렇고말고. 

다만 이 시위 자체는 아주 지루했다. 기다리는 동안 담배라도 물고 싶었지만 그럴 정도의 깡은 없었다. 순간의 객기로 인해 들들 볶였던 기억이 끔찍하게도 선명했다. 깔짝깔짝 콜라를 머금고 입을 다시기만 했다. 카도와키는 그라운드 쪽을 흘끔거리며 운동장을 빠져나가는 동급생들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카도와키의 시선을 얼핏 눈치 채고는 손을 흔들었다. 카도와키와 같은 반 애일 텐데, 미즈가키도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애였다.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있었다. 둘은 두 발짝 정도의 거리로 나란히 서 있다가 카도와키에게 인사를 하고선 다시 걸어갔다. 교문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두 발짝에서 반 보 정도로 가까워졌다. 저 어색하고도 견실한 거리감을 보니 감이 딱 잡힌다. 미즈가키 입이 씩 벌어졌다. 


“쟤네 둘이 사귀나 본데.”

“그럴 것 같더라.”


카도와키가 말했다. 연애 화제에 제가 일부러 끼어들다니 별일이었다.


“웬일이냐. 네가 그런 얘길 다 하고. 드디어 성에 눈을 뜬 거니? 장해 죽겠네.”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어쩌다보니 고백하는 걸 봤거든.”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했다. 카도와키 자신이 훔쳐보거나 고백 장면을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는 걸 거듭해서 피력하고서야 목격담은 이어졌다. 어차피 뻔할 장면이었고 실제 그랬다. 사람들 잘 오지 않는 교정 구석에서 어색하고 숨막히는 시간을 공유하는 두 사람. 그럴듯한 멘트와 계획을 세웠겠지만 계획대로 돌아가는 건 하나도 없었을 테고, 다소 더듬기까지 했을 것이다. 고백이란 게 원래 다들 그런 법이다. 그럼에도 뻔하기에 멋진 거겠지. 카도와키도 그래서 보기 좋았더라고 말했다. 우연하게나마 보게 된 것은 미안하지만. 아무튼 고백 장면을 보인 것을 계기로 같은 반이겠다 한두 번의 상담을 했다. 카도와키가 연애상담에 뭐 해줄 말이 있었겠나, 그건 상담이라기보다는 넋두리에 가까웠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도움이 된 모양이다. 카도와키에게 인사한 것은 그 결과를 넌지시 말해준 것이렷다. 다 잘 되었다고. 다소 풋풋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을 때다. 카도와키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눈이 살풋 가늘어졌다. 


“나는 연애를 한다면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오래 하고 싶어.”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할 수 있는 애랑.

속삭이듯 덧붙여졌다. 허상만치 가벼웠다. 꿈결처럼 작았고. 하지 않았던 양 사그라졌다.


“그 좋아할 수 있는 애가 뭔데? 이상형을 말해야 할 거 아냐.”

“음… 글쎄…”


미즈가키가 카도와키의 연애관을 들은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정말로 정석이구나 생각했다. 그조차도 막연한 허상인 것을 알아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저 멀리서 감독이 카도와키를 불렀다.

그리하여 이 일은 금방 잊혀졌다. 그리고 세상 모든 연애가 뜻대로 되지 않듯이 그로부터 약 일 년 후 카도와키 슈고를 뒤집어 버린 미인은 카도와키의 이상형과는 전혀 상관없고 카도와키가 정말 정말 정말 좋아할 수 있을 애와는 더욱 거리가 먼 도시에서 온 애송이 1학년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걸 연애라고 할 수나 있나? 그나마 연애라고 하면 미즈가키와의 연애일 텐데, 이것 또한 카도와키가 말하던 연애와는 전혀 달랐다.




미즈가키가 2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때 일을 회상하는 이유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 바보 같은 연애의 끝을 보기 위해서다. 사람이 어디 한평생 장난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카도와키가 과연 이 장난의 끝이란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카도와키는 사귀다 헤어져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건 중학교 2학년일 적 그가 스치듯 뱉어버린 이 얘기와 흡사하다. 

그렇구나. 슈고는 정말 정말 정말로 오래 연애를 하고 싶다고 했구나. 끝이라고는 생각해 볼 일 없는 연애를. 나는 시작하면서부터 내내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인사하고 교문 밖으로 사라졌던 반 보 거리의 두 중학생을 생각해 본다. 그 애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던가. 뭘 어떻게 되긴. 지금쯤 고등학생이 되었겠지. 




용돈을 털고 털어 사탕을 큰 걸로 몇 봉지 샀다. 아예 많이 샀다. 내친 김에 껌도 세 박스를 샀다. 담배를 끊기 위해서다. 담배가 멋있어 보일 나이는 진작 지났다.  아직 담배가 허락되지도 않은 나이면서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소위 얼리어답터, 힙스터들이 돌아가는 게 다 이런 식이다. 남들이 하나 둘 건드려보기 시작할 때, 아 나는 이미 해봤었는데 그냥 그래, 라고 거들먹거리는 게 그들의 일이다. 미즈가키도 그런 시시껄렁한 무리 중의 하나다. 고등학교 들어와 담배 피는 불량한 학생들이 늘어나자 왠지 흡연이 시시해진 것이다. 더는 멋있어 보이지도 않을 흡연을 질질 끌고 있는 건 확실히 중독 때문이다. 슬슬 끊어야지, 끊어야지 염불만 외우다가 겨우 실행에 옮겨 보기로 했다. 학업 스트레스로 결국 담배를 물었다던 같은 반 친구마저 보고 나자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나란히 맞담배를 피느니 나는 담배 끊으려고 노력중이야, 하고선 피하는 게 훨씬 그럴듯했다. 힙스터들의 일이란 참 공감할 수 없는 세계라 카도와키는 눈만 깜박거렸다. 다만 금연만큼은 환영할 만했다. 그래서 미즈가키의 얘기에 전혀 공감할 수 없음에도 막연히 고개만 끄덕였다. 다소 열심히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걸 넘어서 카도와키는 미즈가키가 계산한 후에 뒤따라 같은 사탕 한 봉지를 샀다. 산 사탕봉지는 그대로 미즈가키의 사탕 꾸러미 위에 얹어 주었다.


“이건 내 응원.”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미즈가키가 떨떠름하게 인사치레했다. 카도와키 덕에 사탕 한 봉지가 더 늘었다. 그리하여 도합 막대사탕 여섯 봉지에 껌 세 박스다. 무조건 이걸 다 먹기 전까지는 끊어낼 심산이었다. 플러스 알파 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실 너는 사탕을 사 줄게 아니지.”


묵직한 봉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연애 시작하고도 5개월 차, 카도와키 슈고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래. 이런 거지. 자기야.”


그는 능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아주 조금만 숙이면 되었다. 입술이 닿기까지는. 카도와키는 처음으로 그간 미즈가키와의 키스에서는 담배 맛이 난다는 걸 인식했다. 아주 미세하고 숨결 저 먼 이면에서 거칠거칠하게 도사리고 있는 향이었다. 카도와키는 흡 들이키고 얼굴을 기울여 좀 더 깊게 입 맞추었다. 혀를 파고들어도 닿지 않았다.


사탕 한 봉지는 일주일 만에 동이 났다. 그렇게 큰 봉지였는데도 말이다. 텅 빈 봉지를 보자 허탈함에 웃음마저 나왔다. 허, 허허? 계산이 전혀 안 맞았다. 담배라고 해 봐야 하루에 한 갑도 피지 않았었는데, 담배 피는 대신 사탕을 먹는 거라면 비슷하게 줄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탕은 두 배, 혹은 세 배의 속도로 줄어들었다.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혓바닥에 열이 있나. 카도와키가 미즈가키 혓바닥을 손가락으로 쭉 빼 보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혀가 잡은 채로 눈을 지그시 마주치고선, 속삭였다. 목소리 톤에서는 성적인 뉘앙스가 뚝뚝 떨어졌고, 손가락으로는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침이 손가락을 타고 마디 끝에 다다를 무렵엔 이미 진득하게 키스하고 있었다. 카도와키는 사탕 대신의 키스를 곧잘, 그리고 자주 해냈다. 적어도 한 봉지 이상의 값은 톡톡히 해줬다. 혀가 뽑힐 정도로 키스하고 나면 당장은 담배 생각이 뚝 사라졌다.

껌도 사탕보단 훨씬 나았다. 적어도 껌은 입안에서 녹아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껌은 하루에 한 통 정도만 줄어들었다. 미즈가키, 너 껌 씹고 있는 거냐? 수업 중 선생님의 경악한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덜 줄어들었을 게다. 

그리고 미즈가키는 아직 삼 일에 한 번 정도는 담배를 폈다. 더는 못 견딜 지경이 되면 연달아 줄담배를 물었다. 한 번에 4, 5대 정도는 훅 피워버리고 입가심으로 사탕을 까서 물었다. 단맛과 함께 허탈한 감정이 파고들었다. 기상천외한 맛이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


두 봉지 째의 사탕은 벌써 절반이 사라졌다. 사탕 소진은 이렇게나 빠른데 카도와키 슈고를 소진하는 건 쉽지가 않다. 인생에 정해진 카도와키의 분량이 있다면 지금 전부 소진하게 해 달랬더니. 아무도 바람은 들어주지 않았고 미즈가키의 꿈은 그저 컸다. 택도 없었다.

바보 같은 미즈가키 슌지. 바보 같은 카도와키 슈고.

미즈가키는 사탕을 사면서 이 사탕을 다 먹거든 담배도 병신 같은 연애도 전부 끝내기로 마음먹었더랬다. 카도와키가 얹어 총 6봉지가 된 사탕을 다 소진하면 말이다. 적어도 그렇게 될 줄 알았었다.  

헤어지면 어떻게 되냐고? 고등학생이 되냐고? 미즈가키 슌지가 진작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는 헤어지면 남이 되는 타입이라고. 연애를 안 해 봐서 헤어져 본 적도 없지만 그런 타입이 되기로 정한 건 바로 그때다. 








09.



중학교 2학년, 카도와키가 말하던 정말 오래 오래 오래 오래의 끝은 과연 어딜까. 그 끝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탕은 자꾸만 사라져간다. 이제는 사탕 봉지 안쪽 깊숙이 손을 넣어 봐도 텅 빈 공간을 한참 긁고 나서야 겨우 사탕 하나에 닿을까 말까다.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세워 끌어낸다. 그러면 빈 공간 만큼의 허탈함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온다. 사탕과 함께 허탈함을 집어삼킨다. 허탈함이란 공백이다. 공백을 삼켰으니 금방 속이 허해져 절로 담배를 물게 된다. 금연이 다 무색하게도. 꽁초를 비벼 끄고, 다시 사탕의 포장지를 뜯고, 달짝지근한 향으로 입가심을 한다. 당장이라도 키스를 할 것 같아서다. 그리하여 카도와키와 하는 키스에서는 담배 맛도 사탕 맛도 아닌 요상한 맛이 난다. 하도 요상하고 찜찜하여 질척하게 혀를 섞고 나면 으레 담배를 피우고 싶어진다. 같은 행동들은 의미 없이 반복된다. 이런 굴레다. 너무나 뻔한 식으로 굴러간다. 먼지 같은 잡다한 습관들이 붙어 몸집이 불어난다. 예를 들면 사탕 껍질을 벗길 때부터 튀어나오는 혓바닥이나 키스할 때 목 뒤로 돌아가는 뜨끈한 손가락에 눈썹을 찌푸리는 일 따위의 작은 행동들.

사탕과 달리 입맞춤은 닳지 않는다. 키스는 닳지 않고 담배는 계속 사고 있으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순 허탈함뿐이고 사라지는 건 사탕뿐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미즈가키 슌지가 이 바보 같은 연애놀음에 조금 질렸음을 뜻한다. 그는 원래부터 천성이 다소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쉬이 질린다. 카도와키 슈고에게는 참 미안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음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연애 쪽이 야구보다야 백배 천배는 더 낫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집합은 기억도 못 할 아기 때부터 시작해 공유해 왔던 모든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 남은 것이라곤 연애뿐이라.


“너도 참 너다.”


그즈음의 미즈카기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 사탕 막대를 손가락에 담배처럼 꿰고선 휘두르면서. 달짝지근한 딸기향이 카도와키의 코끝을 스쳤다가 멀어졌다. 코 아래가 벌써부터 끈적거렸다. 카도와키가 낚아채기 전에 말은 훌쩍 흘러갔다. 의미 없이 지저귀고 떠나는 작은 새소리 같았다. 곱씹을 새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분명 무언가는 선명하게 들렸다. 흘러가 버린 말이 아니었다. 그 이면의 지친 기색이었다. 그것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메아리치듯이. 몸을 떨면서. 




매사에 충동적이고 다소 잘 질리는 미즈가키 슌지는 결국 사탕에도 질려버렸다. 거의 바닥을 보이던 사탕 봉지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카나가 지나가며 한두 개씩 집어먹었었는데 그래도 아주 바닥나지는 않았다. 줄어는 들되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처럼 사탕봉지는 굳건히 거실 한켠에 머물렀다. 사탕을 다 먹으면 이 짓도 끝내야지 했던 다짐 또한 허물허물 문드러졌다. 그냥 넋두리만 마냥 이어졌다. 끝내야지, 끝내야지. 질렸으니까. 다짐은 번복되고 거듭되었다. 숙제는 오늘에서 내일로 그리고 그 다음으로 미뤄졌다. 금연시도는 마침표를 하염없이 미뤄가며 불분명하게 종식되었다. 사탕을 그렇게나 먹어대고 턱이 아프도록 껌을 씹어댔건만 담배는 끊지 못했다. 피우는 개피를 현저하게 줄인 게 다다. 보람도 없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이 정도 선이 미즈가키에게는 제일 어울리는지도 모른다고, 미즈가키는 스스로에게 엉성한 합격점을 내렸다. 이 또한 후하면서도 엉성한 평가다.

카도와키 앞에선 잘 끊어낸 척했지만, 괜한 허세가 그다지 통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도와키가 미즈가키와 몇 년 인연이랴. 미즈가키는 카도와키를 꽤 쉽고 아둔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 미즈가키가 카도와키를 파악하는 것만큼은 카도와키도 미즈가키를 어느 정도는 훤히 들여다보았다. 게다가 지금은 미즈가키와 키스하고 더 나아가서는 물고 빠는 사이다. 그는 미즈가키 혓바닥 아래 도사린 담배 향을 용케도 잡아냈다. 쌉싸름함을 꿀떡 삼켰다. 알아차리고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굳이 지적하지 않은 건 그 나름의 배려, 혹은 매너라고 치겠다. 연애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카도와키 슈고는 이토록 장해졌다. 이쯤하면 온 동네의 남친감이다. 맨 야구 바보인줄만 알았는데…. 감회가 다 어릴 정도다.


“자기야, 넌 나중에도 문제없겠다. 다 컸네, 다 컸어. 내가 다 키웠어. 나도 정말 장해 죽겠어. 사람 하나 만들어낸다는 게 이런 기분이지, 암.” 

“그러는 너는 분위기 깨는 데 뭐 있어, 진짜…”


카도와키가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미즈가키는 제가 부모라도 된 양 카도와키가 젠틀맨이 다 됐다고 칭찬하지만, 다음번 연애를 잘할 수 있을 거라 격려하는 애인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지금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은 예행연습을 도와줬을 뿐인 것처럼 말이다. 제가 봤던 만화책이 그런 내용이었던가? 아니다. 만화책의 청춘은 이보다는 더 산뜻하고 싱그러웠었다. 


“어차피 그 만화책, 이젠 보지도 않으면서.”


미즈가키가 받아쳤다. 그는 아직도 카도와키의 방 책꽂이의 꽂힌 책의 순서를 기억한다. 몇 달 동안 변하지 않는 순서, 변하지 않는 위치,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청춘 야구 만화 따위야 처음부터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카도와키가 젠틀맨이 다 되는 동안 미즈가키가 얻은 유일한 교훈이라고는 이것이다. 카도와키 슈고는 절대 소진되지 않는다. 그가 오래, 오래, 오래, 오래, 가는 다정한 연애를 원하는 이상. 카도와키 슈고가 카도와키 슈고인 이상. 카도와키 슈고가 미즈가키와는 달리 인내심 있고 끈질기며 질리지 않고 꾸준한 사람인 이상. 아이스커피에 빨대를 처박고 백 바퀴는 휘젓다가 겨우 납득하고는 만다. 

미즈가키가 납득하는 사이, 카도와키는 한발 앞서 반쪽짜리 2학년이 되었다. 여름대회가 끝나 3학년들이 은퇴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3학년들은 아쉬움에 몇 번 어깨를 들썩이다 마지못해 수험행렬에 합류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3학년들의 빈자리를 메꾸며 새 팀은 만들어진다. 비슷한 듯 다른 팀이었지만 여전히 주축은 말할 것도 없이 카도와키 슈고다. 그가 입학했을 때부터 정해진 일이었으므로,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역시, 스타는 대우가 달라.”


팀의 개편 얘기를 들은(카도와키의 근황이라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즈가키는 다소 비아냥거리듯이 말한다.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게 진심으로 비꼬는 게 아니었음은 카도와키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놀리는 것보단 마땅히 그럴 일이다, 조금 더 가깝다. 오직 미즈가키 슌지만이 모든 이례를 당연시한다. 숨 들이마시듯 저 너머로 넘어가는 공의 궤적을 들이마신다. 카도와키로선 그 당연함이 부담스럽거나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여태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매미 소리 한참 물러갔는데도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 미즈가키는 빨대만 휘저으며 얼음만 마냥 녹이는 중이다. 생크림과 음료와 초코시럽과 녹은 얼음이 섞여 유리컵 안은 진창이 됐다. 끔찍하게 뒤섞여 질척이는 음료를 미즈가키는 잘도 마셨다. 그걸 보는 카도와키가 도리어 질색했다. 온 얼굴이 다 구겨졌다. 얼굴만으로도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먹느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렴 못 먹을 것도 없지. 원래 이런 질척질척한 걸 뒤섞어 먹는 게 내 일이거든. 사탕과 담배 향과 키스를 섞어 삼키는 것과 다를 것도 없고. 이게 나에게 주어진 잔이지.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미즈가키는 씩 웃었다. 죄 엉망진창이다. 시작부터가 엉망진창이었으니 괜찮았다. 제 꼴이 우스워서 다소 유쾌하기까지 했다. 나머지 얼음을 녹여가며 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홀로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다음번에는 정말로 귀엽고 깜찍한 애랑 연애해야지.”

“자기야, 이런 데서 애인을 앞에 두고 그런 발언은 너무나 실망이야.”

“음…그렇지? 내가 다 잘못했어.”


미즈가키는 일단 사과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과할 수 있는 순간을 내내 기다려왔다. 그렇다. 잘못했고 그리하여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되어서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미즈가키 슌지가 카도와키 슈고를 소진할 생각이 아니라 미즈가키 슌지가 소진될 생각을 했어야했다. 미즈가키 슌지가 훨씬 보잘것없는 존재이기에. 그게 올바른 방향이었다.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말이다. 음료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달고 걸쭉하고 미지근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끈적이며 너울졌다. 천천히 넘어갔다. 목울대가 꿀렁였다. 

진창을 마시는 입과 혓바닥에서 좋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다고, 카도와키는 본능처럼 예감했다.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예감은 조용히 눈을 떠 뒤통수로부터 슬금슬금 올라왔다. 4번 타자 특유의 감인지 미즈가키 슌지의 소꿉친구로서의 감인지는 아리송했지만 예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운을 떼려 한 건 미즈가키였지만 선수를 친 건 카도와키였다. 묵직하게 스윙했다. 금속 배트가 귀로부터, 목으로부터 궤도를 그리며 멀어졌다. 그런 느낌으로 미즈가키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나랑 사귀었어?”


맞았다. 배트 한 가운데. 정확하게 지금의 카도와키 슈고가 해야 할 말이었다. 미즈가키는 덕분에 말을 벌었다. 이제 시시한 장난 따위 슬슬 끝내볼까 하는 서두를 굳이 떼지 않아도 되었다. 턱을 괴고 곁눈질했다. 옆 눈으로 흘겨보는 카도와키의 얼굴을 평온했다. 진지하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곧은 태도였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는 좋은 사람이다. 미즈가키는 제가 이 대화에 한껏 불성실해져야 겨우 균형을 맞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귀면 네가 나한테 진짜 질릴 수 있을 거 같아서.”


툭 내뱉었다. 그가 불성실 해야겠다 생각한 것 치고는 꽤 진심에 가까웠는데, 카도와키가 그걸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하고 내심 바랐다. 이렇게 저열한 진심을 내보일 때는 여지없이 알맹이에 가느다란 생채기가 나기 마련이다. 속이 쓰라리다. 삐딱하게 앉은 미즈가키와는 달리 카도와키는 허리를 세워 제대로 고쳐 앉았다. 그리고 정중한 자세와는 딴판으로 대화를 아주 유치하고 낯 뜨거운 얘기로 끌어내렸다. 질질 매달리고 딴죽을 거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유치하고 낯 뜨거운 얘기라면 미즈가키 쪽이 단연코 한 수 위다. 


“넌 그걸로 키스까지 할 수 있는 거야?”

“아마도? 왜 키스만 얘기해. 우린 더한 것도 했는데.”


넌 키스만 신경 쓰이나 보지? 이죽거렸다. 이를 훤히 드러내었다. 다소 연극적인 웃음이어서 탁한 소리가 났다. 카도와키 슈고는 다른 의미로 미즈가키 슌지라는 이 오래된 친구가 좀 질렸다. 이죽거리든 비웃든 무엇으로 가려봤자 틀림없는 긍정이어서. 단지 질리기 위해 키스에 섹스까지 불사할 수가 있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실망이었을까 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그랬다. 지금 이 순간 미즈가키는 그토록 원하던 일에 성공했다. 축배라도 들고 싶은데 유리잔 안은 생크림의 잔해물만 남아 있었다. 


“알고 있잖아. 나는 여전히 네가 싫어.”

“알아.”

“연애라도 하면 쉽게 쫑낼 줄 알았어. 아니더라.”

“나는.”


그런데도 네가 나하고 연애를 하자고 해서, 다 괜찮은 줄 알았어. 네가 원하는 대로 덮고 넘어가면. 한 번 뚜껑을 까서 열고 정면으로 바라본 걸로도 충분할 줄 알았어. 까마득한 기억이 다리를 붙든다. 키스를 해서, 혹은 네 말대로 더한 것도 해서. 아니면 달콤한 것을 먹어서. 즐거운 일을 함께 해서. 함께 야구를 하지 않아서. 최대한 시시껄렁하고 가벼운 연애를 하려고 했던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앞으로 괜찮아 질 줄 알았어.

카도와키는 조용히 뇌까렸다. 그의 혼잣말은 유독 작았다. 입천장에서만 맴돌아 입술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연애라도 하면 쉽게 쫑낼 줄 알았어. 미즈가키가 하는 연애란 다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였다. 카도와키 슈고는 헤어지면 남이 되는 타입의 사람이란 말의 뜻을 그제야 겨우 이해했다. 카도와키 슈고와 남이 되기 위해서라면 미즈가키 슌지는 얼마든지 키스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카도와키 슈고라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지도 모르고.

미즈가키는 여기서 한 템포 쉬고 말을 골랐다. 망설였다. 계속 해야 하는지.


“그래. 그러니까 이제 저거 타러 가자.”


그는 입만 한참을 달싹이다 이내 말을 돌려버렸다. 당장의 진심은 또다시 뒤로 미뤄졌다.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회전 티컵을 가리켰다. 둘은 오늘 놀이공원에 왔었다. 지금껏 앉아 있던 곳은 놀이공원 휴식공간에 있는 카페의 테라스자리였다. 진지한 얘기를 하기엔 꼴이 좀 우스웠다. 머리에 꽂아 놓은 헬륨 풍선이 스프링을 따라 흔들거렸다. 띠용띠용. 도망치듯 일어섰다. 사실 회전 티컵은 유치하고 재미없어서 어릴 때나 탔을 그런 놀이기구다. 하지만 당장 코앞에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제트코스터를 타러 먼 길 걸어갔다간 숨이 끊어지고 말 거다.

갑자기 끊긴 대화에 카도와키는 허탈하게 넋을 빼다가 마지못해 미즈가키를 따라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카도와키가 조금 더 걸렸다. 침묵속에서 커다란 티컵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미즈가키는 무언으로 쏘아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무시하고 한 방향만 바라보려니 멀미가 날 것 같았다. 하필 티컵이어서.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어지러웠다.


“하하, 재밌다.”

“거짓말이지.”


아, 이제는 속지 않겠군. 그거 아쉽게 되었다. 카도와키가 핸들 위에 손을 포개고 깍지를 껴왔다. 얌전히 받아들였다. 









10.




컵은 빙글빙글 돌아간다. 풍경 또한 컵을 축으로 삼아 빙글빙글 돌아간다. 오른쪽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돌아간다. 나무, 벤치, 화단, 나비 모양의 장식물이 달린 가로등, 저 멀리 관람차, 서커스 천막 모양을 딴 회전목마의 지붕, 아이스크림을 파는 조그마한 마차. 모두 알록달록하다. 최근에 새로 페인트를 칠하기라도 했는지 기억보다도 훨씬 선명한 색채였다. 먼 향수로 박제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노력은 가상했지만 소용없었다. 암만 신식이랍시고 유행 따라 단장해봤자 미즈가키에게는 언제까지고 그리울 풍경이었다.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카도와키 슈고를 포함해서. 

연신 돌아가는 색채들이 파란 하늘 위로 어지러이 잔상을 그린다. 미즈가키는 말없이 눈으로 색의 궤적을 쫓았다. 궤적을 쫓는 일에는 원체 익숙했다. 여기 온 게 몇 년 만이더라. 적어도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놀이공원에 온 적이 없다. 


근교에 있는 공원 중 그나마 규모가 크고 여러 가지 기구를 갖춰 그나마 ‘놀이’공원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올 수 있다. 그럼에도 미즈가키 또래의 애들은 이곳에 거의 발걸음하지 않았는데, 이유야 간단했다. 시시하기 때문이다. 놀이공원이기는 했다. 그게 다였다. 놀이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기준의 최저치를 간신히 넘기기만 해 갖춘 기구들은 죄 변변찮았다. 완만하게 위 아래로 움직이며 돌아갈 뿐인 회전목마와 양철 깡통 더미에 가까운 관람차, 엉성한 회전 컵을 타기에 애들은 너무 나이 들었고 그들에게 이만한 자극은 자극 축에도 못 들었다. 하나 있는 롤러코스터는 높이가 3층 건물만도 못했다. 이런 담백한 놀이기구들을 신난다고 즐길만한 건 바람개비 하나에도 환장하는 꼬마들 정도다. 나이깨나 먹은 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유년시절 기억의 요소 중 하나에 불과했고, 버스로는 갈 수 없는 추억의 영역에서만 존재했다. 이보다도 더 어릴 적에 다들 한 번쯤은 가봤던 그런 곳. 미즈가키에게도 그렇고, 아마 카도와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미즈가키가 공원에 가자고 했을 때, 카도와키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더랬다. 그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그 채로 잠시 뜸을 두더니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오랜만에 가는 거겠네.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나지막한 목소리.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처럼 들렸다. 가자, 가야겠지. 숫제 체념하는 기색이었다.  


그때와 꼭 같은 기색으로 카도와키는 손을 포개고, 깍지를 끼고, 잡는다. 체념하는 기색이라지만 그와 반대로 손끝으로부터는 책망과 미약한 혐오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온도였다. 그런 온도를 카도와키는 손바닥 안쪽으로부터 꾹 내리눌렀다. 하도 서늘하고 축축하여 컵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바람 따위는 잊어버렸다. 혀를 찼다. 차라리 놓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생각만큼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미즈가키가 간절히 원하는 이상은 말이다. 그렇게 회전컵은 영겁의 고문기구로 전락했다. 스피커에서는 음정이 다소 빗나가는 이상한 전자음이 귀에 익은 동요를 똥땅거렸다. 노래는 높은 음에 다다를수록 미묘하게 늘어졌다. 영겁을 조금이라도 더 늘이기라도 할 것처럼. 돌아가며 듣고 있자니 숨이 다 막혔다. 하지만 참아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미즈가키는 얌전히 손을 잡힌 채로 컵 안에서 이리저리 쏠려다녔다.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카도와키가 기도 안 찬다는 듯 내려다보는 게 빤히 느껴졌다. 무시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미즈가키가 얼마나 이 순간을 처절하게 견뎌내고 있는지, 이게 얼마나 대단한 배려인지 과연 반이나 알까 싶다. (아마 알았다면 더 화를 냈을 테다.) 미즈가키는 이 대단한 인내를 난처한 상황을 부드럽게 넘어가기 위한 처세술이라고 자기합리화 했지만, 사실은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이 맞았다. 저질렀으니까, 이 정도는 받아줘야지.

오래된 친구는 대개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분풀이를 한다. 가장 간절한 순간 상대가 가장 원하지 않는 걸 기꺼이 들어주면서 말이다. 아주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두 사람은 오래된 친구이니만큼 서로가 내치기 않아하는 것을 눈치 채는 데 빠르고 오래된 친구이니만큼 상대가 싫어하는 일에는 죽자고 달려든다. 소위 엿 먹이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건데, 비단 악우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친구들이란 게 그런 사이잖은가.

연애 또한 이런 얼개를 조금 더 예쁘게 짜 맞춘 것에 불과했다. 그간 미즈가키가 생크림에 솜사탕, 팬케이크, 막대사탕 등 온갖 달콤한 것들 먹기를 일삼았던 모든 것이 말이다. 영원히 소모되지 않을 것을 소모하면서. 장난과 청춘이란 명목으로 잘 감싼 어설픈 몸부림이요, 아집이었다.

이제는 카도와키 슈고의 차례가 되었다. 자신의 차례를 맞은 카도와키는 절대로 양보하거나 피하지 않을 것이다. 몇 개월간의 단맛들이 천천히 역류해 올라왔다. 손바닥으로부터, 책망하는 온도로부터. 어금니로부터. 오래 전의 어느 겨울로부터.  


“슈고 너랑은 그런 장난을 치는 게 아니었는데.”


다 내 잘못이야. 미즈가키는 제대로 한 자 한 자 말을 골라가며 사과했다. 정신을 덜 차렸는지 그 와중에 장난이었다고 부러 말해 속을 긁어내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읊조렸다. 목소리는 가느다랬다. 군데군데 끊어졌다가 내쉬는 숨에 마모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말을 담아 두었길래. 이윽고 컵이 멈췄다. 시끄러운 전자음의 멜로디가 끊기고 적막이 찾아왔다. 미즈가키는 어지러운 양 비틀거리며 내렸다. 손을 털었다. 




관람차는 타지 않았다. 인내는 회전컵에서 한계를 다해 관람차까지 탈 여력이라고는 없었다. 깡통 안에서 단 둘이 십 몇 분이나 되는 시간을 함께 했다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고 들 것 같았다. 대신 스릴거리도 못 되는 롤러코스터를 실컷 탔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도 헛웃음만 나오는 아주 야트막한 높이였다. 힘겹게 움직이며 끼릭거리는 낡은 바퀴소리가 오히려 소름끼친다고 할 만 했다. 롤러코스터가 꿀렁꿀렁 제 나름의 속도를 내며 내려가는 순간 미즈가키는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깔. 아무도 비명 지르지 않는 가운데 웃음소리만 요란했다. 그걸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쩐지 오고 싶더라니.

지금 이 순간에 이토록이나 어울리는 장소가 또 있을까 싶었다. 낡고 잊혀져가는, 지금의 우리들에겐 재미없고 시시한, 꼭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어색한 장소. 카도와키 슈고에게 미즈가키 슌지가 꼭 그렇다. 카도와키만 아직 그걸 모른다. 언젠가는 발길이 끊겨 잊혀가는 놀이공원이 될 거 라고 생각했는데 도통 그럴 마음이 없어보인다. 카도와키 슈고는 카도와키 슈고답게 꾸준했고, 미즈가키는 카도와키 슈고의 꾸준함을 우습게 봤다. 그래, 미즈가키 슌지의 실책이다. 줄곧 미뤄왔던 일을 해야만 했다. 등을 밀고 이제 그만 사라져 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상처거리도 못 되는 분풀이를 받아가면서. 카도와키 슈고는 몰랐 우습게 봤다. 그래, 미즈가키 슌지의 실책이다. 줄곧 미뤄왔던 일을 해야만 했다. 등을 밀고 이제 그만 사라져 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상처거리도 못 되는 분풀이를 받아가면서. 카도와키 슈고는 몰랐겠지만 미즈가키 슌지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남은 것이 그거라서 초라했다. 한 줌을 내보이기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그랬다.


“네가 내 인생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네 인생에서 사라지고 싶은 거야. 슈고 나는 너에게 아무 쓸모가 없어.”


한 번 솔직하게 말해보았다. 의외로 쉬웠다. 혓바닥 위로 가볍게 올라타 돌이킬 새도 없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다소 두리뭉실하게 던졌지만 내밀한 속내가 투명하게 보였다. 이건 분명 진심에 가장 근접한 말이었고 카도와키는 진심을 읽었다. 그래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어, 하고 묻지 못했다. 투명하게 보인 속내가 너무나 낡아있어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생각을 했어, 라고 물어야 할 판이었다. 그것조차도 흘러나오질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그렇게 칼자루는 넘어갔다. 나머지는 카도와키의 일이다. 미즈가키는 입장권 티켓을 버렸다. 버릴 때에야 봤는데 티켓의 유원지 사진은 옛날 풍경 그대로였다. 그것만큼은 전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오래된 놀이공원다웠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동시에 드는 의문을 조심스레 추슬러 삼켰다. 껄쩍지근하게 넘어갔다. 으레 장난으로부터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 목구멍 안쪽에서 드는 맛이다. 차라리 코 밑의 단 내가 백배는 나았다. 




어떻게 되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꼴 같지도 않은 연애는 껄쩍지근함을 삼킨 채로 미지근하게 계속된다. 눈 뜬 장님마냥 모든 진심을 모른 척하며. 

이에 이르기까지도 쉬운 건 아니었다. 카도와키는 몇날 며칠 잠을 설쳤다. 매일 밤 뜬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불 꺼진 형광등의 희미한 어둠을 헤아렸다. 형광등은 불을 꺼도 어둠속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는다. 잔열을 품은 난로처럼 어슴푸레하게나마 빛을 품고 있었다. 눕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잘 적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새삼스러운 발견이 신기해서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그렇게 천장을 훑고 희미한 빛을 길잡이삼아 벽의 포스터를 더듬다가 이내 책꽂이에까지 시선이 갔다.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에 그 만화책이 있었다. 거꾸로 꽂혀 숫자가 위로 올라간 야구만화 낱권. 그러고 보면 저 만화책이 시작이었다. 아마도 말이다. 미즈가키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보지도 않으면서.’ 


그래, 만화책은 가져온 이래 단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은연중에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다. 카도와키 슈고의 고교생활을 청춘만화처럼 그럴듯하게 만들어보자, 가 시작이었으니 그거 하나만큼은 성공했다. 꽉 찬 나날들이었다. 굳이 만화로 빈 공간을 채워 넣을 필요가 없었다. 다시 형광등을 바라봤다. 희미한 빛마저 사그라들고 사위가 어두워져 천장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어둠속에 온전히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광등을 보고 방을 훑고 어둠에 파묻혀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는 날들이 며칠 더 계속되었다. 고민과 고찰의 시간들은 아니었다. 그저 다짐하는 시간들이었다. 여러 날을 어둠속에서 천천히 굳혀가며 다짐했다. 

여러 기억들이 그와 함께했다. 카도와키 슈고는 이 침대 위에 미즈가키 슌지가 누웠던 것을 기억한다. 침대에 기대앉아 책장을 가만히 바라보던 것도, 핸드폰을 두들기며 떠들어대던 것도, 보리차를 마시던 것 또한 기억한다. 그 모든 기억 위로 어둠이 켜켜이 쌓이는 것을 상상하고 있었다. 윤곽이 흐릿해지고 서서히 어둠 그 자체가 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기까지를 그렸다. 그게 다짐을 더욱 공고히 했다. 애초에 그에겐 선택지라는 게 아예 주어진 적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미즈가키 슌지는 헤어지면 남이 되는 타입의 사람이기 때문에. 돌아가면 도로 친구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 가능성을 싸그리 밟아버렸다. 그래서 더는 뒤로 물러날 곳이라고는 없었다. 여기까지 몰아간 미즈가키에 대한 실망과 혐오보다는 완전히 남이 되는 공포가 더욱 컸다. 카도와키는 따로 붙일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공포라고 정의했지만, 사실 공포와는 다른 미지의 감정이었다. 그가 밤마다 보는 천장 형광등의 경계만큼이나. 파르페의 스푼을 칼자루 쥐듯이 했다. 이번에 칼자루를 쥔 건 카도와키였으므로, 휘두르는 건 쉬웠다. 파르페 한가운데에 메다꽂았다. 하트모양 초콜릿을 마구잡이로 집어삼켰다. 아, 끔찍하게도 달콤했다. 혀끝에 닿아 녹을 새라 씹었다. 잘게 으스러졌다. 그럼에도 단맛은 사라지지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삼키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봐도 견디는 것이 분명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봤자 상대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았다. 


“자기는 정말 나랑 끝까지 가고 싶나 보네. 슈고.”


맞은편에서 포크로 케이크를 난도질하던 미즈가키가 이내 환멸을 가득 담고 쏘아붙였다. 이미 ‘자기’는 놀리는 말을 넘어서 비꼬는 호칭이 된 지 오래다.


“그래. 끝까지 갈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안 남았더라, 자기야.”


닭살 돋는 연애 계속 하는 것 밖에는. 카도와키는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이 정도 비꼬기 쯤이야 이미 예상을 해서 넘기는 게 아주 능청스러웠다. 많이도 늘었다. 그는 오랜 밤을 거쳐 다짐했고, 다짐한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파르페 따위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가. 쓸모없는 미즈가키 슌지를 위해서. 미즈가키 슌지의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는데 뭐 어쩌랴. 


“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라…. 진퇴양난, 낭패불감, 되는 일 하나도 없구만.”


미즈가키가 타령처럼 읊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몰아 터트리는 숨처럼 낱낱이 흩뿌려졌다. 봉숭아 씨앗 터지듯 후두둑. 그 한탄이야말로 딱 카도와키가 하고 싶던 말이었다. 그러게, 얘기하는 대신 묵묵히 파르페를 전부 먹었다. 빈 잔에 스푼이 부딪혀 짤그랑 소리가 났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실까요, 자기야.”

“아주 사랑스런 새끼…. 가자, 가.”


미즈가키가 한탄 끝에 웃었다. 마냥 즐겁다고는 할 수 없는 웃음이었다. 의자를 끌며  일어나 카도와키의 손을 잡았다. 카도와키의 손바닥은 여전히 미지근하다. 미약한 혐오, 환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사린 친애.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 말이다.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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