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느냐고 묻고 싶다. 허나 물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답은 미궁 속에 있고, 그걸 틀어쥘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미궁이라 하는 게 사람 속인데 한 길 사람 속을 그 누가 알까. 당사자인 황천화조차도 답을 모른다. 모르니까 지금 이지경이다. 태공망은 턱을 괸다. 흐으으으음. 생각하는 척을 하노라면 손이 턱에서 슬슬 미끄러진다. 눈앞의 황천화만 아무것도 모른다. 무사태평. 희희낙락. 동생과 농담 따먹기를 한다. 그를 앞에 두고선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는 건 오직 태공망뿐이다. 어딘가 주객이 바뀌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 제일 구경거리 중에 불구경, 싸움구경이 있다. 그렇단다. 태공망은 두 가지 다 취미 붙이지는 않았다. 그는 나름 비폭력주의자다. 나름, 제 나름의 방식으로 비폭력을 말하는 거다. 그럼 따로 취미 붙일 일이 뭐가 있냐 하니. 사불상이 혀를 찬다. 그러니까 저 영감탱이 매일 낚시나 하는 거 아니겠어요. 깍듯한지 버릇이 없는지 도통 모를 영수다. 구경거리로 돌아가 보자. 좀 더 비폭력적인 구경거리가 있다. 연애다. 그래서 많은 선인, 도사들이 연애구경하길 좋아한다. 심심한 인생사에 아주 그만한 자극이 없단다. 가십도 쉬이 주워들어 가볍게 옮긴다. 참새가 낱알 옮기는 것만큼이나 쉽다. 그 선인계, 그 도사들 사이에서도 스캔들이라도 한 번 일어날라치면 얘기가 하루 만에 곤륜산 세 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내용은 풋풋한 것부터 파렴치한 것까지 가지각색. 아마도 파렴치한 쪽이 더 선호도가 높지 않을까 싶다. 나이만 먹어가지고 철들이 덜 들었다. 태공망이라고 해서 딱히 다르진 않다. 게다가 그는 도사치고 어린 축이다. 뜬소문? 가십?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랑 사귀었다가 헤어졌다더라? 다 적당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들이다. 귀가 절로 쫑긋쫑긋한다. 하물며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야. 흐으으음. 턱 괸 소리가 좀 더 깊어진다.
“뭐래. 뭔 일 있수?” “아무것도 아니라네.”
황천화가 태공망을 좋아한다. 정작 황천화는 그걸 모른다. 구경거리 중에 구경거리다.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다.
태공망의 짐작뿐이긴 하지만 아마도 확실할거다. 이건 넘겨짚기만으로 확신하기엔 너무 창피한 문제라 태공망도 나름 많은 검증을 거쳤다. 이상한데, 로 시작해서 에이 설마, 를 거쳐 진짠가, 를 두드리고 이윽고 설마설마 했던 그게 맞는 듯… 까지를 힘겹게 왔다. 그동안 태공망이 황천화의 귓바퀴를 얼마나 쳐다봤는지 말도 못한다. 계기는 모른다. 이유도 모른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정작 짝사랑중인 당사자조차 모르는 거라. 그렇게 황천화는 자각 없는 짝사랑을 벌써 몇 개월째 하는 중이다. 태공망이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던 시점이 몇 개월 전이었으니까 태공망이 아는 한만 따져도 몇 개월이 맞는 셈이다. 시작을 모르니 진짜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그 몇 개월, 황천화는 태공망과 눈이라도 마주치려거든 끊임없이 눈을 흐렸다. 분명 눈 자체는 마주보고 있는데 정신머리가 어디를 헤매는지 알 수 없었다. 구름을 밟는 중인지, 저기 콩밭을 하하호호 메는 중인지. 다만 하도 미묘해서 다들 모르고 넘어갔다. 본인조차도. 자, 손. 해서 내민 황천화 손끝을 만져보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딱 손끝만 그랬다. 여러 번 문질러주면 황천화는 뭐하냐고 궁시렁거리며 손을 넌지시 뺐다. 손끝의 습기는 죄 태공망의 손바닥으로 건너왔다가, 언제 습기라도 만졌냐는 듯 금방 말라버렸다. 습기는 오직 황천화 손끝에만 있었다. 한 길 사람 속, 오리무중인 미궁으로 되돌아온다. 미궁에는 태공망 혼자 있다. 원 주인이 없이 혼자 있으려니 좀 심심하다. 눈치를 좀 채지 하는 마음 반, 영원히 눈치 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이다. 눈치를 채면 좀 재미있어지겠는데 하필 상대가 태공망 자신이라 귀찮아질 게 뻔해서다. 모든 도사, 선인들이 그렇다. 가십은 좋아하지만 가십 당사자가 되기는 싫은 것이다. 딱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마음이랑 주둥이가 따로 놀아서 그렇지. 자고로 주둥이가 하는 일들이란 그렇다. 지랄에 육갑에 방정이다. 세상 모든 방정을 전부 도맡아서 한다. 사불상이 제 주인 욕을 하는 것도 주둥이 방정이다. 그 영수에 그 주인이라 주인도 대단한 인격자는 못 되는지 입이 방정이고. 그리고 문제의 주둥이는 가십 한복판에 말려들어 귀찮은 것보다는 가십 그 자체를 좀 더 좋아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방정맞은 주둥이가 할 일이란 뭘까. 밑도 끝도 없이 찌르고 보는 일이다. 그저 짝사랑하는 한창 어린 나이의 황천화가 끝내주게 귀여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종의 청춘 연애소설을 보는 기분이 없잖아 있었을 거다. 약간 흐뭇하거나, 대견하거나, 웃기거나, 안쓰럽기도 하거나, 걱정되거나, 미치게 귀엽거나. 이 중에 하나 혹은 둘이기도 하고 전부에 해당하기도 하고 전부 다 아니기도 하고 모두 섞여 있기도 하다. 감정이란 늘 정해져 있지 않고 혼탁하기 마련이기에. 그래서 뭉뚱그려 청춘 연애소설 보는 기분이라 하겠다. 이 청춘 연애소설과 도사 선인 남녀노소 좋아하는 가십거리가 섞이는 데서 재앙이 일어났다. 거기에 술도 한 잔 곁들이면 말이다, 완벽하게 주둥이가 설치기 좋은 판이었다. 주둥이 방정도 그런 오두방정이 없었다. 태공망은 딱 가십거리처럼 이야기했다. 일종의 감탄사 같기도 했다. 아이고, 귀여워라! 하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탄성인 양. 그거 알아? 누가 누구를 좋아하더라. 곤륜에서 떠도는 먼 나라 이웃 나라 가십거리 같았다. 그러기엔 ‘누가’도 ‘누구를’도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황천화가, 태공망을, 좋아한다고.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사숙, 취했수?”
황천화는 태공망의 입방아를 빠르게 세 번 곱씹었다. 말 자체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곱씹음과 동시에 튀어나온 말은 저거다. 이와 동시에 태공망은 속으로 아차, 혀를 차고 있었다. 입이 방정이다. 이놈의 입이. 이대로 슬쩍 넘어갈 생각 만만으로 애매하게 웃는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확 난다. 황천화 반응이 저모양이라 차라리 다행이다. 그래, 다 술 탓이다. 황천화가 술 탓으로 넘어갔으면 좋겠고 실제로도 술 탓이다. 어찌됐건 술 탓이고 주둥이 탓이다. 그래서 태공망은 바로 술병 목을 바투 쥐고 봤다. 술로 일어난 일은 술로 묻는 게 술꾼의 정석이다. 황천화가 다급하게 흔들흔들 흔들리는 술잔을 잡는다. 넘치겠다. 바로 입이 잔에 따라붙는다. 술이 확 도는 얼굴이다. 돌아라, 돌아라. 그대로 뻗어주면 더 좋다.
여기까진 태공망 생각이다. 예상이기도 하고 바람이기도 했다. 계산상 어지간하면 예상대로 흘러가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황천화가 술이 돌긴 돌았다. 그런데 술이 도는 것과 동시에 엉뚱한 것마저 같이 돌기 시작했다. 그게 문제다. 몇 개월 전의 태공망과 똑같은 흐름을 밟기 시작했다. 술이 도는 만큼, 그게 자신의 속이었던 것만큼 더 빨랐다. 이상한데, 로 시작해서 에이 설마, 를 거쳐 진짠가, 를 두드리고 이윽고 설마설마 했던 그게 맞는 듯…의 종착지까지 그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술 한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잠깐 생각해봐도 그게 맞았다. 그거다. 태공망 혼자 있던 한 길 사람 속에 황천화가 뚝 떨어졌다. 무심결에 내뱉은 태공망 말 한 마디에,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풍덩. 이미 빠져 있는 바로 그 사랑에 두 번씩이나.
일 났다. 태공망이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황천화 얼굴이 전혀 술기운이 아닌 것으로 새빨개져서, 태공망은 그가 이윽고 자신이 있는 곳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그야말로 제 주둥이가 재앙이다. 그 와중에도 제 감정인데도 제가 당황한 그 시뻘건 얼굴이 퍽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게 이 좆된 순간 단 하나의 위안거리였다. 제가 취하는 게 낫겠다 싶어 태공망은 아예 병나발을 불었다. 황천화는 아무 말도 안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은 말이 동시에 튀어나오려 해서 되려 말문이 막힌 듯했다. 입이 뻐금거리다 금방 다물어졌다. 다물어지는 건 그랬다. 물을 필요조차 없어서. 제 감정이었고 대다수의 답은 자신에게 있어서였다. 다시 입이 벙긋거렸다. 말 대신 호흡만 마냥 비누방울처럼 터져 나갔다. 허, 허, 허허, 허. 그러면서 많은 그는 꽤 많은 퍼즐조각을 찾아냈고, 제대로 짜 맞춰 청춘연애소설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된 듯했다. 이제 모든 연애담과 가십이 그렇듯 곤륜산을 세 바퀴 도는 일만 남았다. 글쎄, 황천화가 태공망을 좋아한대요. 여기까지 오자 황천화는 탁자에 이마를 갖다 박았다. 쾅. 술잔들이 죄 딸그락거리며 튀어 올랐다. 술병은 뭐, 태공망이 쥐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박살나겠어?”
태공망은 술병 기울인 채로 웃었다.
“언제부터?”
탁자에 세게 박은 뒤통수가 말을 했다. 동그랗기도 하다. 언제부터가 언제부터를 묻는 건지 모르겠다. 태공망이 언제부터 알았는지? 황천화가 언제부터 태공망을 좋아했는지? 하나는 대답해 줄 수 있고 하나는 대답해 줄 수 없다. 태공망이 아는 건 몇 개월 전의 그 순간뿐이다. 나머지 하나는 황천화만 알 일이다. 황천화의 일이었으므로. 물론 태공망도 그게 궁금하기는 하다. “내가 그걸 어찌 알까. 나도 그게 궁금한데.” “아아… 진짜!” 탁자 밑의 발 구름소리. 초조함이 바닥을 울리고 데굴데굴 굴러간다. 이 상황 자체에 안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황천화의 장르는 액션일텐데, 예상치도 못한 로맨스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탁자 밑으로 초조함이 굴러가는 바닥이 보일 게다. 초조함이 굴러가는 바닥끝엔 뭐가 있을까. 벽이 있고, 부딪히고, 그리고 까만 틈바귀. 그는 이윽고 자신이 속에서 구할 수 없는 답을 찾아 질문을 뱉는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여기에 대한 태공망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전형적인 술꾼의 정석에 따른다. 한 잔 쭉 마시고 잊으면 돼지. 이제 막 감정을 자각한 황천화가 퍽이나 예예, 그러믄입죠, 하고 납득하겠다. 게다가 황천화도 알았다. 바로 알았다. 얼마나 가망 없는 짝사랑인지. 탁자에 머리를 박으면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황천화가 태공망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역은 없다. 태공망은 아마 받아줄 생각이 없다. 없으니까 이렇게 가볍게 농담처럼 말하지. 이렇게 가볍게 찔러버리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술 한 모금이면 죄 털어낼 수 있는 것처럼. 몇 개월을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이럴 거면 그냥 모르는 채로 냅두지 말이다. 영원히 모르고 지나가도록. 몰라서 고여 있던 감정들은 눈치 채자마자 막을 수도 없이 역류한다. 그게 꼭 고운 감정이라는 법은 없다. 역류하는 것들은 언제나 속을 미식거리게 만든다. 당장에라도 뱉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도록.
겨우 황천화가 탁자에서 이마를 뗐다. 얼굴이 시뻘건 것은 여전하다. 그 얼굴 그대로 태공망을 쏘아본다. 눈빛마저 시뻘겋다.
“몰랐으면 다 좋았는데 사숙은 왜 말을 했어?” “입이 주책이지.” “허어.”
나오느니 한숨이다. 황천화 숨에서도 어지간히 술 냄새가 난다. 다만 황천화는 술꾼이 아니라 술꾼의 정석에 따르지 않는다. 한 잔 마시고 터는 건 불가능하다.
“차라리 말하지 말지…왜…” “미안하게 됐네. 입이 방정이야.”
그럼에도 하는 말은 술주정에 가깝다. 넋두리일지도 모른다. 내딛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화가 많이 묻었다. 감정을 꾹꾹 눌러 밟는다. 감정이 역류하는 속이 너무나 안 좋기 때문이다. 그래, 사숙은 다 알아서 좋겠네. 나는 생판 모르던 내 마음도 미리 알아서 참 재밌었겠네. 그냥 그렇게 계속 두고 보려고 그랬어? 그러지 그랬어. 그냥 바보같이 보이는 게 나은 건 또 처음이네. 잠깐 담배를 핀다. 뻑뻑 피운다. 태공망은 가만 내버려뒀다. 지금은 담배 연기보다도 저 넋두리가 더 매웠다. 일말의 미안함이다. 황천화는 장초를 얼마 피우지도 못하고 금방 비벼 껐다. 후우우우우. 저 깊은 속에서부터 끌어올리는 긴 한숨이 어느 시골집 불 떼는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아 진짜, 머리 잘 돌아가고 눈치 빨라서 참 좋겠수.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봤구만? 참 사숙도 냉정하네. 어차피 지금 접으라고 하는 소리 아냐? 그러면 말을 안 하면 되잖아. 난 뭐야. 이렇게 어이없이 차이는 거야? 가뜩이나 지금 사숙이 말해서 좋아하는 거 같은 기분까지 드는데. 이게 뭐냐고. 아, 진짜. 이게 뭐야? 대충 이런 식이다. 이런 이야기를 또 뜨문뜨문 장초를 태우고 장초를 비벼 끄면서 계속했다. 씩씩거리는 숨과 닮았다. 원래도 미안했는데 그 꼴을 보자 하면 더 미안해졌다. 역시나 태공망이 너무 나갔고 주둥이가 문제다. 그러니까 주둥이로 빌고 있는 것이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나갔어.”
황천화도 나름 도 닦는 도사랍시고 울고 불지는 않았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도덕진군의 가르침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나보다. 그저 한참을 내뱉다가 푹 수그렸다. 낙담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하고. 그게 안됐다 생각할 만큼은 됐다. 태공망은 최대한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황천화 옆에 앉아 어깨를 두들겨줬다. 정말로 그 순간만큼은 모두 없던 일이 되었으면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평생 입 벙긋 안 할 자신도 있다. 흘린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서 하는 바람이다. 바람은 그저 바람일 따름이라서. 그러는 동안에 손목이 잡혔다. 황천화가 손목을 잡고 확 끌어내렸다. 상체가 쑥 딸려 내려가면서 눈이 마주쳤다. 바람이고 뭐고 다 틀려먹었다. 많이 화났군. 그건 태공망으로 하여금 선선히 상황을 받아들이게 했다. 한 대 맞아도 아무 말을 않으리라. 눈을 감자마자 입이 덮쳐왔다. 담배냄새가 하도 진해서 술 냄새라고는 요만큼도 나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많이 화났군.
섹스란 게 별 건 아닌데,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 거 아니게 하는 바람에 별 거 아닌 거 치고는 꽤 별 거가 됐다. 요컨대 쉬운 줄 알고 덤볐는데 만만치는 않았다는 뜻이다. 말이 넣고 흔들고 싸면 된다지. 저 쉽고 간단한 행동요령들이 실제 섹스로 이어졌을 때, 몸뚱이로 그려야 할 그림에 대해서는 약간 가물가물 했던 것이다. 본능에 무작정 맡기기에는 또 이게 무드가 그렇지가 못했다. 뭐 그럼에도 다들 할 건 한다는 게 본능의 대단한 점이기는 하다. 별 거 아닌 걸 별 거로 했지만 그런 거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태공망은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이제 주둥이로부터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나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아니 나쁘지 않았다 보다는 좀 더 위. 이럴 때 부정형을 쓰는 건 옳지 못하다. 상당히 좋았다, 에 가깝다. 그래, 그래서 문제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 막상 하고 나니까 진짜로 별 거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섹스얘기가 아니다. 연애 얘기다. 흐으으으음. 다시 턱을 괸다. 한숨이 절로 앓는 소리처럼 기력 없이 빠져나간다. 여전히 생각은 가벼웠다. 본인이야 이렇다지만, 황천화는 영 아닌 모양이다. 그날도 그랬다. 세상 다 산 얼굴 하더니 미안,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훌쩍 나가버렸다. 여기선 태공망도 왜, 내가 더 미안하지. 썩 잘하던데. 하고 눈치 쏙 빠진 소리를 할 순 없어서 가만 냅뒀다. 냅뒀더니 이후로도 열심히 피해 다닌다. 태공망 그림자라도 볼라치면 슬슬 도망가는 게 절로 안 되어 보일 정도였다. 더 미안해서 섣불리 말도 못 붙이겠다. 둘 사이에 불편한 기류를 눈치 챈 사람 한둘이 눈치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것 또한 다 태공망 죄다. 황천화가 자각한 이래론 모르쇠 숨겨오기가 여간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황천화가 그랬다. 그러니까 복잡했다. 복잡한 심경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행동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도 나고, 열은 받고, 답답하고, 창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공망은 여기서 멈춘다. 황천화의 발 구름 소리를 되새겨 듣는다. 아, 또 도망간다. 소리가 멀리 멀어져간다. 여전히 걸음마다 성이 많이 묻었다. 대체 어디까지 뛸런지.
피해 봤자다. 큰 일 하는 도중이었고 다들 한 자리씩은 해먹고 있어서, 이래저래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굳이 일대일이 아니더라도. 때마다 황천화는 조금 삐딱하게 앉긴 했지만 아주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공적인 얘기를 하다가도 태공망은 간혹 사적인 시선으로 봤다. 잠깐 보다가 곧 스쳐 지나갔다. 금방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딴 얘기를 했다. 동시에 황천화가 제 뒷목을 여러 번 쓸었다. 저 손길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게 황천화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무게가 같은가? 그 숱한 감정을 다 이겨내는 호감과 같은 저울에 달 가치가 있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황천화가 태공망에게 독대를 청한 것은 한 달 후였다. 한 달을 꽉 채워 부지런히도 피해 다니더니 더는 못하겠다 싶어졌는가 보다. 원래 이런 게 그의 성미에 잘 맞지 않았다. 한 달 채운 게 장할 지경이지. 말이 독대를 청했다지, 사실상 결투를 청한 쪽에 가까웠다. 어느 쪽이던 태공망은 상관없었다. 결투면 까짓 거 당당하게 좀 맞고 말지다.
“그치?” “허어…”
황천화는 야심차게 걸어왔지만 시작부터 막혔다. 꼴통 보는 표정이 역력하다. 뭐하자고 이런 사람을 좋아해가지고. 쓸 수 있는 주먹이 있다면 태공망에게 쓰는 게 아니라 아예 자신에게 쓰고 싶을 정도다.
“나를 치고 말지. 나를 치고 말아. 아주 치고 눈 뜨면 다 아니었음 좋겠다.” “자네 아주 중증이구만…” “…죽을란다. 사숙이 내 대가리 한 번만 깨주라.”
되고 된 사랑이다. 액션인 줄 알았는데 로맨스가 있었고 그 로맨스가 절절할 줄 알았더니 로맨스 코미디란다. 이게 다 태공망이라서 그렇다. 상대가 하필 이 사람이라서. 싸움도 요지경으로 끌고 가더니 연애놀음도 희한하게 끌고 간다. 나오느니 한숨이요, 욕이다. 우는 것이 주먹이고. 이제 황천화가 믿는 것은 미신뿐이다. 일정한 속도로 왔다 갔다 하는 코인과 어둠속에서 타오르는 촛불, 레드 썬, 혹은 물리적인 타격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 같은 것들이다. 깔끔하게 무로 되돌릴 수 있도록.
“그러니까. 이 선도 하나면! 다아-” “사숙 약 파는구나?”
술꾼의 정석은 통하지 않는다. 미신은 너무나 멀리 있다. 번개는… 저기 뇌진자를 보건대 그렇게 좋은 방법 같진 않다. 물리적 타격은 한 백 번쯤 맞아 봐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니까 황천화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자꾸만 돌아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좋다. 참 억울할 일이다.
“그럼 그냥 사귀는 건?” “저, 저, 저. 또 되는 대로 말하는 거 봐라.”
여전히 태공망은 가볍다. 선뜻 내미는 손은 저울에 올라갈 가치조차 없다. 황천화는 그 손을 멀거니 본다. 저기 자기 손을 올리면 얼마나 무거워질지를 생각하는 눈치다. 태공망도 생각해 본다. 많이 무거울까. 정말로 오래간만에 눈과 눈이 맞는다. 초점이 제대로 맞는 것을 본 것이 얼마만일까.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태공망을 끌어내릴 때, 황천화는 분명히 눈을 마주쳤었다. 쨍쨍하고 선명한 감정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눈을 감았었다. 그 감각 정도로 무겁다면야, 태공망은 괜찮았다. 아마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황천화는 태공망 손끝을 한참을 노려보다가 눈을 다시금 마주치고 또 다시 손끝을 노려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뭘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생각이 아니라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다짐은 꽤 길었다. 그리고 황천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 가지밖에 없는 것처럼 똑바로 말했다.
“무르기 없기다.”
손 위로 올라온 맨손은 의외로 따뜻하고 예상대로 습기 있다. 그리고 기대보다도 훨씬 무겁게도 당겨온다. 그가 감히 저울에 함께 올려놓을 무게가 이런 거라고 알려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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