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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갑타 / 종상 / 지금도 내 가슴엔 꽃비가 내리네2025-03-25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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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기 이후 부산에 돌아오자마자 때아닌 여름감기가 10평 남짓의 숙소를 휩쓸었다. 누군가의 재채기가 신호탄이었는데 바이오해저드의 효시를 울린 재채기의 범인을 아직도 잡지 못했다. 통학하는 정희찬을 제외하면 꼴랑 다섯 중의 하나일 게 뻔한데도 안 잡혔다. 어찌나 바짝 엎드려 잘도 숨죽였는지.

순식간에 숙소가 초토화됐다. 코딱지만 한 공간에선 방역 자체가 불가능하니 다들 속절없이 드러누웠다. 증상도 가지각색이었다. 누구는 잔기침에 시달렸고, 누구는 목이 칼칼하다며 뜨슨 물을 연신 찾았다. 누구는 눈가가 그렁그렁해진 채 창밖으로 마지막 잎새를 셌다. 누구는 콧물을 훌쩍거렸다. 이쯤 되니 같은 감기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증상을 전부 합치면 종합감기약이라 서로 겹치지 않게 주워오는 솜씨 하나 기가 막히다 하겠다. 커다란 냄비에선 종일 콩나물국이 펄펄 끓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현성이 꼬라지를 보고 영 촌스런 것들이라며 혀를 찼다. 이래가지고 뭘 하겠다고. 결승까지 뛰었다고 아주 유난이다 유난. 거기가 북극이더냐. 그거 아니거든요. 다 갈라진 목소리로 항의해 봤자다. 감기 여파에 부내에서 소소하게 일던 자축 분위기도 물 건너갔다. 니들 몸뚱이나 잘 챙기라. 감독이 일갈하니 별수 없었다. 딱히 와병할 독감까진 아니라서 학교는 학교대로 나갔고(제일 억울한 일이다) 멀대같은 덩치들이 한껏 아픈척하며 책상에 코를 박고 졸았다. 반들반들한 책상 위로는 밀걸레가 지나가고 그날의 코트가 어른거렸다. 골이 아플 때 나는 이명대신 삐삑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신발이 끌리는 소리다. 관자놀이를 치고 책상을 구르다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보이지 않는 공을 좇고 있노라면 이마의 열이 식었다. 그리고 나서 드는 생각은. 아, 이제 연습해야겠다.


기상호에게 예의 증상이 나타난 건 감기가 한풀 꺾여 물러간 후였다. 감기에 뻗은 게 총 다섯 놈이니 다섯 가지 감기 증상 중 기상호는 가벼운 열감기를 담당했었다. 열이 똑 떨어지자마자 목이 간질간질하길래 그게 기침으로 옮겨간 줄 알았다. 이번에는 출처가 분명하다. 기침 담당은 공태성이었다. 이거 못된 것만 물려주는 형이 아닌가. 괜히 부아가 치밀어 공태성을 쿡쿡 찔렀다. 이제 감기를 완전히 떨쳐낸 공태성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뭔데. 빙시야. 기상호 이게 목이 아니라 간땡이가 부었나. 그런데 꽃잎이 팔랑 날았다. 어라. 손에서 꽃을 뿌리는 공태성. 낭만적이야. 둘 다 말을 잃었다. 공태성이 안 어울리게 손톱에 봉숭아 물이라도 들였나 했다. 손톱만 바라보던 기상호가 캥캥 기침을 했다. 그리고 또. 이제 반대로 공태성이 기상호를 멀뚱하니 봤다. 오….


심인성 호흡기 어쩌고로 시작하는 긴 이름의 질환이다. 기침하면 목구멍에서 꽃이 역류하는 게 다인 단순한 병인데 이게 또 너무 단순하다 보니까 기존에 있던 병명을 덕지덕지 이어 붙여 끝도 없이 복잡해졌다. 아니 인간 장기에서 없던 게 튀어나오는데 그럼 단순화하리? 이번에는 된다, 연금술. 이거야 연구하시는 학자들 의견이고 일반 사람들은 또 달랐다. 그래도 너무 긴데…. 그리하여 다들 동네 똥개처럼 되는 대로 이명을 붙였다. 일반적인 줄임말로는 꽃토병이라고 했고 일반적인 증상에 꿰다 맞추려면 기침병이라고 했다. 또 어디서는 사춘기 병이라고 했다. 사춘기 애들한테서 제일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감정이 섬세하고, 격정적이며, 철모를 짝사랑하기 딱 좋을 시기다. 당사자들은 이 이름을 제일 싫어했다. 오직 어른들만이 사춘기 병이라고 불렀는 데다가, 사춘기 병이라고 하는 어른들 얼굴이 대다수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있어서였다. 조심스럽기가 아주 함부로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깨질 유리구슬 들여다보듯 했다. 우리 애가 벌써 그럴 때가. 대견함까지 그린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쪽팔렸다.


기상호의 주변은 어땠을까. 1 꽃토병 2 기침병 3 사춘기 병. 말해 뭐해. 사춘기 병이었다. 진단서 땅땅 받고 약국에서 약 타다 돌아온 기상호 주변을 얼쩡거렸다. 니 그거 맞나. 처음엔 그거였다가, 기상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체육관이 폭소로 뒤집어졌다. 기상호 점마 사춘기병 걸렸댄다! 하이고 청춘이라고 다 해 먹는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기상호 제외 일곱 명이(서인진까지!) 허리를 꺾어가며 웃는데 정말 그대로 꺾여버렸으면 싶었다. 짝사랑이라는 건 개-험난한 일이다. 애들은 이 병으로 하여금 세상의 쓴 맛을 보고 어른에 한 발짝 다가선다. 이렇게 쪽팔린 거라면 사랑 따윈 다신 안 해. 그런데 그게 맘대로 되나. 기상호도 이제 막 그 문턱을 밟았다. 이제부턴 의지와 마음이 따로 노는 영역이다. 이제 안 합니다. 안 해요. 라는 말이 무색하게 캥캥 기침이 터졌다. 기상호의 기침은 기침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마른기침이었다. 짤막하게 연거푸 세 번 터졌다. 재채기 같기도 했고, 그저 목 가다듬는 시늉처럼 보이기도 했다. 옷에 꽃이 점점이 떨어져 있으니 아하 기침을 했나보다 싶은 것이다. 성준수가 정색했다. 야. 바닥 닦아. 앞으로 떨어져 있는 거 보이면 죽는다. 예에…. 이 핑계로 코트 닦이에서 벗어나게 될 일학년 셋이 환호했다. 사랑이라는 형벌이 참 고됐다.


기침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 기상호는 한다면 한다. 해서 기가 막히게 바닥에 흘리지 않는 요령만 익혔다. 턱밑에 손을 받쳐 깔끔하게 훑어냈다. 눈에 불을 켜고 봐도 바닥에 이파리 하나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청소는 다시 공동소관이 됐다. 애들은 좋다 말았다. 괜히 밟았다 미끄러지면 어떡해, 라는 성준수 우려와는 달리 기상호가 토하는 꽃이 워낙 작기도 했다. 꽃이 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쇄된 형태였다. 너무 크면 이런 저런 문제가 된다던데 작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다른 쪽으로는 문제가 됐다. 꽃도 작았고 기침도 미약했다. 빈도수도 잦은 편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이나 심지어 격한 운동 하는데도 큰 지장이 없었다. 너무 문제가 없다 보니까 그대로 방치하게 됐다. 김다은 공태성 정희찬 셋이 기상호 둘러싸고 들쑤시는 게 그나마 가장 큰 문제다. 심지어 진재유까지도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래서 누군데? 여기서 기상호가 입을 딱 다물었다. 묵비권을 행사 중이다. 말했다간 더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다. 기상호를 포함해서 오지랖과 행동력이 특출나다는 걸 공태성 건으로 이미 잘 배워놨다. 아니 그러고 보니 왜 저 햄은 기침병 안 걸렸지? 저 햄이야말로 사춘기의 선두 주자 아닌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공태성을 꼬나보았다. 나름 매섭게 보는데도 공태성은 뭐, 모른 채 머리만 긁었다. 새끼손톱이 불그스름했다. 딱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파는 봉숭아 꽃물 키트 색깔로. 저 봐라. 내가 저 햄 야살꾸리한 거 했다 그랬지. 세상에. 연애한다고 저러는기가. 정희찬이랑 둘이서 쑥덕거렸다. 이럴 땐 놀랄 만치 기침이 자취를 감췄다. 상호. 근데 니도 저러고 살면 기침을 안 하겠지. 내는 저럴 거면 그냥 기침 할란다…. 맞나. 듣는 정희찬으로선 그냥, 그거나 그거나 싶다. 그래서. 나한테만 살짝 말해봐. 누구야.


하루 세 번, 식후 30분. 약을 먹는다. 약은 별거 없고 일반 기침약이다. 아직 제대로 된 약이 안 나와서 그렇다. 게다가 그것도 기침이라고 또 기침약이 잘 들었으니 세상 모든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미루고 꿀떡꿀떡 삼켰다. 다만 두 번째 처방부터는 의사 앞에 빌어야 했다. 시럽은 글타 치는데 가루약 말고 알약 주시면 안돼요? 제발. 의사가 난처해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닐 텐데도. 원래 기침에 효과 제일 좋은 건 가루약인데. 아니 진짜 안 넘어가서. 한참을 징징거리자 겨우 알약을 처방해줬다. 손바닥에 알약 두 개 굴리게 되고부턴 넘기기 훨씬 수월해졌다. 사랑도 그럴지도 모른다. 물 한 모금에 꿀꺽. 하지만 아직 목구멍 어딘가에 간질간질 매달려있고 기상호는 이따금 제 숨의 꽃내음을 도로 들이마신다. 달콤하다. 푸릇푸릇하다. 샐러드 통에 코를 박은 것 같다. 단내가 혓바닥 끝에 맴돌다 이번에는 물 없이도 목구멍 너머 도로 넘어간다. 마음속이 순 꽃밭이다. 머리도 조금 꽃밭이 된 것도 같고.

왜 기침을 하는 줄 알아요?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하니까. 이것 또한 의사가 해준 말이다. 이 질환에 걸린 환자들은 내과와 연계해서 상담 차 정신과에도 다니게 되는데 거기서 그랬다. 보통 운을 띄울 때 쓰는 말로 환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했다. 고백할 거에요? 기상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오. 못 해요. 그러면 기다려 봅시다. 회피하는 듯한 소극적 반응에도 의사는 책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사그라들어요. 분명.




그건 조금 곤란한데요.




처방해 주는 약은 기침약뿐이고, 풀 네임은 있으나 제대로 줄여 부르는 명칭이 없으며 사춘기 병 따위의 우스갯소리가 만연하는 병. 걱정은 커녕 상대가 누구냐고 캐묻기 바쁜 병. 하다못해 조퇴 사유로도 못 들어가는 병. 다 커서는 그래 그런 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청춘이었지. 회고할 수 있는 병. 사람들이 이리 가볍게 다루는 이유는 대부분이 별 조치를 안 해도 자연 소멸의 길로 걸어가서다. 기침과 기침 사이의 간격이 점점 늘어나다가 꽃이 점점 줄어들고 이내 꽃 대신 비말만 토하게 되면 거의 완치되었다고 봐도 된다. 그러다 기침마저 떨어지면 진짜 끝. 끝에 가서 미열이 나는 경우도 있으나 그리 심각하진 않다. 그렇게 되면 환자들도 슬슬 마음을 접는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나 봐. 정말 좋아하지 않게 돼서 병이 사그라드는 건지, 병이 사그라들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는 몰랐다.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인지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간혹 예외인 경우가 있었는데 짝사랑이 실제 연애가 되거든 병은 귀신같이 떨어져 나갔다. 가장 정석의, 올바른 치료법이었다. 정신과와 연계하기 시작한 것도 기실 이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서였는데 세상 연애 사업이라는 게 다 맘대로는 되지 않는 법이라 성공률은 극히 낮았다.

다른 경우는 짝사랑이 대책 없이 길어질 때 그랬다. 그럼 별 수 있나. 병도 짝사랑을 뒤따라갔다. 쭉. 사춘기 병 시작은 놀림감이지만 시간이 쌓이면 대우 자체가 달라졌다. 짝사랑이 오래되면 순정이다. 보답받지 않는 오랜 사랑의 가치를 알아서, 순정이라는 건 절대 괄시받지 않는다. 그 증명으로 이만한 병이 없었고. 기상호는 겨우 삼주차였다. 아득하다. 앞으로 알약을 몇 알 더 삼켜야 증명이 될는지.


기상호는 이 마음을 없애고 싶지 않다. 절대로. 그냥 이대로 평생 삼시 세끼 알약을 삼키고만 싶었다. 목구멍에서 갈리는 꽃잎들을 토해내면서. 그는 그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면 눈꺼풀 안 숨겨둔 풍경 위로 꽃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다. 아름다웠다. 병이 사그라든다는 건 이 풍경을 영원히 놓친다는 것이다.




여섯명의 곱절에 곱절은 되는 인원이 코트를 뛴다. 생각보다 장도고를 자주 본다. 생각보다. 대회가 아닌데도. 1학년인 기상호는 잘 몰라서 얼떨떨한데 3학년들이 당황하지 않는 걸 보아 예사로 있는 일인 듯 했다. 여기는 판이 작잖아. 뭔 짓을 하든 그놈이 그놈이라. 말 한 마디에 납득이 가기도 하고. 그래도 최종수랑 같은 공간에 서 있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누가 조화를 부렸나. 한숨과 함께 튀어나오는 기침을 거꾸로 집어삼킨다. 풀 맛이 난다. 혼자 울룩불룩하는 목울대를 보며 최종수가 꽤 아니꼬워했다. 쟤는 나만 보면 표정이 이상하다. 그때도 이상한 놈이라 생각했는데 더욱 이상해졌다. 캑캑 기침을 하고, 쓸어 담듯 턱을 훔쳤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고개를 들었다. 최종수는 그걸 전부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가 금방 비껴 지나갔다. 어느 허공을 보는지 알 수 없었다.


전형적인데. 기상호의 이상을 먼저 눈치 깐 건 최종수고 그걸 제대로 된 단어로 정의한 건 이규다. 눈빛이 절로 아련해졌다. 그리고 고3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6번 1학년이지? 어린애들은 다르다. 좋을 때야.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하기엔 그들이 한창 찌들은 고3이었다. 좋겠다, 좋겠어. 추임새를 곁들이되 전혀 부럽지 않은 어조로 이규가 밥을 퍼먹었다. 밥, 국, 반찬. 정확한 루틴으로. 그런데 우리한테 별 도움은 안 되겠다. 딱히 지장 없는 것 같고. 나도 눈치 못 챘어. 슛 쏠 때 기침 터지면 모를까. 냉정하리만치 코트 위의 기상호만 생각한 듯한 판단이었다. 숟가락질하던 최종수 손이 멎었다. 거의 감탄을 했다. 뒤늦게 튀어나오는 조금 박 터지는 소리. 아. 내내 보면서도 그 생각을 못했다. 그저 보면서도 쟨 대체 어딜 보고 있는 거야. 그 생각을.

햄. 나 약 먹어야 되는데요, 정수기. 그래서 누구임? 쉿. 탑 시크리트. 들키면 곤란하긴 하겠군. 아무래도 햄한테 제일 곤란할 듯. 멀리서 낄낄거리는 대화가 들렸다. 여전히 장난만이 그득했다. 과연 농담 따먹기나 할 수준의 별일 아닌 질환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움직임 멈춘 수저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더 안 먹어? 어.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최종수에게 육감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코트 위에서 유독 감정과 감각이 농밀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화살표가 빙글빙글 돈다. 최종수 눈도 빙글빙글 돈다. 몇 바퀴를 돌아도 종내에는 제 심장께에 와서 멈춘다. 마치 나침반인 양. 제 심장에 N극이라도 박힌 듯이. 아주 거대한 손가락이다. 바로 너야.




약은 삼시 세끼 먹는다. 약 봉투에도 그렇게 표시되어 있다. 기상호는 이걸 따박따박 잘 지켜 먹는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별 탈이 없었다. 큼큼, 캑캑, 별 기침 같지도 않은 헛기침만 돌고 만다. 이마저도 손으로 한 번 쓸면 금방이고. 잘게 갈려 꽃의 형체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대개는 희거나 노란색이라 꽃잎인 것만 겨우 알아본다. 목구멍에 칼날이 달렸나. 증상이 너무 미약해 가끔씩은 두려워졌다. 병이 이대로 사라지는 중일까봐서. 어느 날 갑자기 푸른 기 하나 없는 비말만 튀어 나올까봐. 그럼에도 매번 약을 챙겨먹는 건 그가 결국은 농구선수라서다. 아무렴 순정보다 중한 게 있지. 그럼 있고 말고. 자기 전에 착실하게 정수기도 찾아오고. 손에서 약봉지가 바스락거린다. 알약 둘. 시럽은 뚜껑에 체크해 놓은 데까지. 물을 받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최종수였다. 불 다 꺼진 식당이라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왐마아아악! 물이 흥건하게 손을 적셨다. 안 그래도 시커먼 사람이 시커먼 옷까지 입고 다니니까 너무 무서웠다.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손을 들어 더듬거렸다. 내, 내 꽃들. 기상호는 가슴 속에 꽃밭을 안고 사는 사람이다. 그는 그만의 작은 꽃밭을 지켜야 했다. 놀랐잖아요! 최종수는 가타부타 말도 않았다. 


“그거. 나야?”


시선은 정확하게 기상호의 가슴께를 향해 있었다. 순수한 질문도 긴가민가함도 아닌 확신으로. 최종수는 물었다. 얘야? 쟤야? 이제껏 김다은이나 공태성, 정희찬이 찔러봤던 모든 인명의 무게와는 날붙이 차원 자체가 달랐다. 진짜라는 건 매서워서 눈물이 찔끔 날 것도 같았다. 대신 기상호는 여전히 제 가슴을 더듬었고 꽃밭의 무사를 대충 확인한 뒤에 손을 조금 떨면서 약봉지를 뜯었다. 기겁해서 다 쏟느라 마실 물이 없는데 최종수가 하도 지켜보고 있어서 물을 못 받겠다. 바닥 남은 물을 핥았다. 목구멍이 금세 뻑뻑해졌다. 음, 음…. 저렇게까지 확신하고 있으니 구라치기도 힘들고 음…. 한참 말을 고르며 시간을 끌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 형은 뭐라고 할까.


“음. 아닐 걸요.” 


고백. 못 해요. 라고 말했었다. 이건 의사 앞에서도 말한 적 없는 고해다. 맞긴 맞는데. 아마도…. 뜸을 들이자 최종수 얼굴이 사납게 굳었다.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갈피가 흔들거렸다. 기상호 목울대가 여러 번 울렁였다. 이 순간만큼은 기침약이 전혀 소용없었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건 형이 아니라 그 순간이겠죠. 기상호가 신중하게 늘어놓는 몇 단어가 그들을 순식간에 그 현장으로 데려다 놨다. 개가 짖듯이, 기침을 뱉었다. 꽃이 떨어졌다. 어째서 후두둑 뱉을 때마다 잘게 갈려 나오는지. 콘페티라서 그렇다. 하늘하늘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기상호의 꽃밭이었다. 영원에 가깝게 사랑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그런데 그 순간에 하필 형이 있어서. 그래서. 형이. 기상호의 말마저 잘게 쪼개지고 흩어졌다.  

아. 띄엄띄엄 늘어놓은 말을 최종수는 느긋하게 이해했다. 떨어지는 꽃을 보면서. 아른아른했다. 한 발을 디뎠다. 어둠속으로부터. 난생 처음 고해한 기상호가 곧 손을 축 늘어뜨리고 처형을 기다렸다. 괜히 사춘기 병이라고 부르겠어. 창피든 수모든 감내할 각오로. 아니 죄송합니다. 각오 전혀 안 되어 있어요. 때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기침이 큼큼 터져 나왔다. 어쩌면 사레에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상호를 보며 최종수는 손을 뻗었다. 손끝은 건조했고 딱딱했다. 기상호 입을 벌리고 손가락을 쑤셔넣고 입천장을 까뒤집었다. 컥, 컥, 소리가 났다. 손가락이 조금씩 잘게 갈린 꽃잎으로 절여져 갔다. 혓바닥을 누르고 속을 지그시 들여다 봤다. 꽃밭이 있다면 보고 싶어서. 그 속에 온전한 꽃이 있다면 긁어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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