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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봉신 / 천태 / 어떤 무게에 관하여2025-09-08 09:55




시간이 너무나 많다. 몇 년째인가는 헤아리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어차피 세어 봤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사치레 할 때에나 겨우 들먹이고는 한다. 이야, 오랜만이다. 그래서 몇 백 년 만이던가? 아무렇게나 드는 숫자는 대다수는 틀리고 어쩌다 한 번씩이나 겨우 들어맞는다. 옛적 선인들의 인사가 왜 그따위였는지를 당사자가 되어서야 알게 됐다. 그렇다. 세세한 숫자를 헤아리기에 영생이란 너무나 길고 숫자는 금방 의미를 잃는다. 비록 반쪽짜리 영생일지라도. 영생은 영생인 거다.

펼쳐진 영생은 망망대해고 허허벌판이다. 망망대해 호기롭게 헤쳐 나가기엔 반쪽짜리 영생인지라 실체가 없다. 그들이 사는 신계는 사실상 중간다리 이상의 의미가 없어서, 띄엄띄엄 생기는 소일거리나 주워섬기는 게 전부다.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손가락 사이로 시간을 흘러 보내고 있자면 아깝다는 생각만 마냥 든다. 죽기 전의 시간들은 그렇게나 급박하게 돌아갔는데, 시간의 총량이란 참 불공평하다. 불균형을 논하기에도 이제 지쳤다.


모두 시간이 많아서 하는 생각들이다. 워낙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는 하릴없이 여러 번 그의 삶을 복기한다. 그다지 진중하지는 않다. 복기 과정에서 그는 그의 오류를 모두 받아들인다. 반성과 오류지적이 없는 이 과정은 복기보다도 시청에 가까울 것이다. 잊을 새라 끄집어 올리고 되새김질 한다. 다리는 가볍게 흔들린다. 손가락이 무릎을 톡톡 건드린다. 박자를 따라서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되돌아간다. 

그의 삶은 길이로 따지자면, 드라마라기엔 조금 짧고 한 편의 영화 정도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시리즈도 아니다. 단 한 편의 영화. 넋 놓고 보고 있자면 금방이다. 그는 그걸 장면마다 달달 외울 정도로 되돌려 봤다. 이따금 어떤 기억에서는 멈추기도 한다. 눈을 감으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우르르 조각난 무늬들이 무너지고 펼쳐지고 새로운 그림을 만든다. 워낙 촘촘하다 보니 세밀한 무늬를 보려면 좀 더 오래 감고 있어야 한다. 그걸 보고선 주변의 몇몇은 속닥거린다. 야, 야. 쟤 존다. 분위기 잡는 데엔 영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건 아직 황천화가 인간사에 훨씬 더 가까이 있을 때였다. 지금 이보다는 훨씬 밀도 있었을 시간들이다. 그가 태어났던 나라가 아직 있었고, 그의 가족이 아직 땅에 있었으며, 그의 의지 또한 땅에 좀 더 가까웠다. 황천화의 삶은 대하드라마도, 미니시리즈 드라마도 아닌 단 한 편의 영화였으므로 그가 반추하는 건 아주 짧은 기간이고 그래서 빽빽하고 조밀하다. 그래, 그랬었다. 흐음. 우습게도 이 와중에 담배는 잘만 타들어간다. 죽고 나서 피우는 담배 개수가 어느덧 생전 피웠던 담배 개수를 훌쩍 넘어섰다. 아득하다.

그리고 그러고서야 문득 떠오르는 것이다. 아니, 그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손 위로 불쑥 올라오는 무게감이다. 양 손 위로 올라오는 몇 근 인가의 무게는 그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이 일시에 솟구친다. 마치 망령처럼. 무게감이란 감각도 사라질 마당에 오직 그것만이 생생하고 묵직하다. 황천화는 주먹을 쥐었다 편다. 잡히지 않는다. 손바닥 위로는 담배 연기가 들어차다가 곧 날아간다. 휘유우. 휘파람도 새처럼 난다. 소리의 꼬리가 길다. 또한 잡히지 않는다. 아마도 이 무게만큼은 끝까지 지워지지 않을 거라고, 문득 생각해 버리고 만다. 예감이라기보다는 다짐이라고 할 만한 망집이다. 


언젠가 등에 짊어졌던 사람 하나 분의 무게다. 손바닥으로 받치던, 약간 무겁다시피 내려앉던 그 느낌. 흔들리던 감각과 붕 떠오르던, 아주 찰나였던 순간이었다. 이 정도 무게였던가, 하고 생각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전에도 자주 했던 일이었으므로. 그땐 좀 더 쉬웠다. 비교할 만한 무게가 주위에 얼마든지 있었다. 어린 동생도 있었고 전쟁 통엔 이러저러한 짐들도 많은 법이다. 놀면 뭐하나. 황천화도 곧잘 거들었다. 들면 어떤 것은 가볍고 어떤 것은 무거웠으며 또 어떤 것은 비슷하거나 했다. 어느 새인가 그가 들어 올리는 모든 물건의 기준점이 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 이 정도 무게였었지. 생각할 때마다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왜, 무게감이란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존재감이잖은가. 그래서 일부러라도 자주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젊은 감수성이란 참 옹졸하고 재미있다. 귀엽기 짝이 없는 수작이었다. 귀엽기 짝이 없던 황천화도 다 옛날일이다. 이제 그보다는 조금 덜 귀여워진 황천화가 담뱃재를 턴다.


괜히 그랬다. 그의 시간이 하도 많아서, 차고 넘치도록 많아서, 이제 복기는 만약에로 이어지고는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비교하고 기억하고 손에 올려놓지 말았어야 했다. 아직까지도 망령처럼 떠오를 거라면 안 하는 게 나았다. 망령의 망령이라니 이렇게 고약한 것도 더 없다. 실체도 없는 무게감만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황천화는 정말로 몰랐다. 이게 평생 사라지지 않을 무게가 될 줄은 몰랐다. 평생하고도 앞으로 영생이다. 그것도 딱 아쉬운 정도의 무게감으로. 그가 그의 삶을 반추하기를 복기라고 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이 무게에 있다. 단 한 점에서 그는 약간 망설이고 만다. 장면을 잠깐 멈춰놓고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 무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오랜 망설임 끝에서야 겨우 한 문장을 내어놓는다. 이 문장이 완성되기까지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음이다. 적어도 백 년 단위로는 셀 수 있다. 그리고 꼭 그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서야 그는 그의 일말의 후회를 마주한다. 미련으로 남을 줄 알았다면 놓치지 말걸. 하지만 그게 다다. 쌉싸름한 후회는 후회일 뿐으로, 그럼에도 그는 다시 돌아간다 해도 얼마든지 놓고 말 것이다. 한 손에 쥐었더라도 바로 털어버릴 수 있다. 현재의 이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 돌아가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리한다. 몇 번이라도. 이건 순전히 다 지난 일이라 할 수 있는 후회다. 그의 복기는 늘 여기서 멈춘다.


그렇다면 황천화 자신의 마지막 무게는 대체 어떠했을까. 누군가의 손에는 남아줬을까. 누군가라고 해봤자 한 사람밖에는 없다. 아마도 아주 무겁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막바지에 털어내 버린 게 하도 많아서.


“그래. 알아. 참 가볍게도 날아가더군.”


이 사람도 곧잘 그의 분위기를 방해한다. 예고조차 없다는 점에선 더 질이 나쁘다. 어느샌가 나타나서 옆에서 다리를 간당간당 흔들며 황천화 생각에 맞장구를 친다. 일부러 속의 말랑말랑한 부분을 쿡 찌르는 걸 보니 더더욱 심보가 고약하다. 아, 정말. 거긴 정말로 덜 여물어서 말이다. 황천화는 왈칵 성부터 내고 본다. 성 내봤자 이 노익장이 눈썹하나 까닥을 않겠지만. 


“아, 진짜. 사숙…”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네. 이백 년 만인가?”


아무렇게나 숫자를 대면(어차피 헤아릴 여력도 없다) 끌끌 혀 차는 소리만 되돌아온다. 


“얼씨구. 너도 어째 그놈들이랑 똑같아져… 56년 만이다.”

“그거나 그거나.”


담배 말린다. 피고 있어도 말린다. 최대한 깊이 들이킨다. 허파에 닿기도 전에 사그라드는 니코틴. 그저 마음의 위안밖에는 안 된다. 그게 어디냐 싶기도 하다. 그에게는 위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런 위안거리도 못 된다. 망령 망집이 위안된다는 소리, 들어본 적이나 있나. 본인만 그저 세상 편하다.


간혹 신계에 들릴 때가 있다. 방문이라는 말 대신 출몰이라는 말을 써야겠다. 불시에 나타나서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얼굴들 한 번 슥 돌아보고는 잘 있구만, 하고선 자기 맘대로 납득하고 떠나 버리는 게 일이다. 어찌나 건성이던지 안부 인사 축에도 못 든다. 결국엔 봉래도에선 애어른 대비 특별 지령이 내려왔다. ‘그 작자 오거든 상대해 주지 마시오.’ 단출하니 말이 짧은 게 누구 감정 꽤나 실려 있었다. 그럼에도 다들 고스란히 따랐다는 건 마찬가지로 감정들이 꽤나 쌓였다는 걸 테다. 상황이 침묵에 무시 일변도가 되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만 하던 시조 나으리께서도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물론 아주 길지는 않았다. 지나가고 마는 안부인사가 약간의 잡담으로 발전한 게 다다. 지금 황천화 옆에서 다리 흔들며 앉아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일 게다. 저 성격을 다 알고서 내린 지령이렷다. 수완을 보면 교주 자리도 아무나 앉는 게 아닌가 보다. 새삼 감탄을 한다. 

막상 그의 사숙은 별로 감탄까진 하고 싶지 않은 듯, 입만 댓발 나왔다. 여러 말을 꿍얼거렸는데 대다수는 욕과 불평과 뭐 그런 것들이었다. 간혹 황천화에 대한 욕도 섞였다. 꼭 비 맞은 중 같은 꼴이다. 기왕 같이 앉아 있는데 역시나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황천화는 웃고 만다. 제법 호쾌하게 웃는다. 


“자넨 지금 이게 웃기는가?”

“웃기지 그럼. 이렇게 될 줄 알았수?”

“그래. 나도 그걸 몰랐네!”


여전히 똑같은데. 첫사랑의 망령은 지독하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게만큼 지독하다. 무게는 여전히 손 위에 선명한 감각으로만 남아있고 그도 여전히 남아서 황천화 옆 자리에 앉아 욕을 한다. 몇 백 년이고 거슬러 올라가서 황천화가 다 버린 가벼운 무게를 탓한다. 또한 제 탓을 하기도 하고. 지나가듯이, 먼지 툭툭 털듯이, 영원히 털어지지 않을 해묵을 자리를 보며. 그렇게 욕만 드립다 하는 그의 첫사랑의 무게도 이제는 예전의 황천화만큼 가볍다. 손에 잡아보면 상이하게 느껴진다. 먼 옛날 업었을 적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으로. 좀 더 오래 업어볼 걸 그랬다. 그럴걸 그랬다. 그의 복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그는 멈춘다. 옆에서 함께 곱씹어 주던 존재는 무게가 점점 옅어져만 간다. 그는 으레 이런 식으로 사라진다. 인사도 없이. 또 와라, 사숙. 중얼거리지만 딱히 돌아올 답은 없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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