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회 종상 전력 타임슬립
최종수를 알고 지낸 지도 어언 5년이다. 기상호는 소파에 드러누워 세월을 헤집는다. 5년도 나름의 초침이요 시간이요 날들이랍시고 한참을 되감아 가야 한다. 소파 손잡이에 엉거주춤 걸친 발목을 축 삼아 천천히 흔든다. 이 긴 얘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구나, 의 시작은 늘 이런 식이어야만 한다. 흔들의자에 흔들흔들, 메트로놈의 박자를 또박또박 헤아려가며. 그 또한 초시계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인지라 이 과정은 눈 감고도 해낸다. 처음엔 건너 이름만 들어본 사람이었다. 애초에 몸담은 바닥에서 저만한 유명인, 모르기가 힘들기도 하고. 그래야 인간 태풍이지. 그다음에는 첫 대면 하기가 무섭게 가장 끔찍한 기억의 골짜기에 뚝 떨어져 고여버렸다. 바싹 움츠리고선. 끝이 좋으면 다 좋겠기로서니 바로 가볍게 털어내기엔 두 사람 다 미숙한 어린애였다. 거북함을 견디지 못했다. 파란의 쌍용기 이후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막상 마주쳐서는 못 본 척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집으로 가서야 뒷구멍으로 물어물어 번호를 구했다. 번호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대한민국 사람 암만 모를 남남이어도 다섯 다리 안이면 전부 연결된다는데, 하다못해 이 좁디좁은 고교농구판에서야. 다섯 손가락이면 차고도 넘친다. 세 다리도 채 건너지 않아 번호가 굴러들어왔다. 스쳐 지나가면 금방 기억에서 사라질 법한 특징 없는 숫자의 나열이었다. 거기에 최종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방 각별해졌다. 저장했다 해서 특별한 일 한 건 아니고 가끔 핸드폰 주소록에서 들여다보기만 했다. 골짜기에 고인 시간 동안 때때로 그런 일을 했다. 카톡 프로필 구경하기, 아이메세지에 손가락 대보다가 화들짝 놀라서 떼기. 마모되고 무뎌져 둥글둥글해진 끝에 물거품만치 가벼워졌지만 저 깊은 골짜기로부터 부상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라 단 한마디 말로도 부력을 찾아 훌쩍 부상하기도 한다. 번호는 장식품이냐? 돌은 최종수가 던졌다. 후에 말하기를 그도 충동적이었다고 했다. 눈도 안 마주치려 굴면서 번호는 가져가고 그 번호로 딱히 아무 짓도 안 한다는 게 괘씸해서. 아무 목적 없이 번호만 달랑 가져갔다면 그게 여러모로 징그러운 건 맞다. 그걸 알아서 기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기념품…. 당신 말이 다 맞으니 대충 이쯤에서 끝내보자는 뉘앙스였다. 최종수가 이마를 짚었다. 던질 농구공이 없으니 비슷한 대가리라도 쥐어야지 어쩌겠어. 얘랑은 절대 말이 안 통하겠다. 최종수 스스로 건 저주이자 정반대로 돌아가게 될 예지였다. 사용되지 않아야 할 전화번호는 사용되었고, 아이메세지든 카톡이든 띄엄띄엄 대화가 찼다. 데면데면 서로를 사선으로 비껴 보면서도 같은 공간에 죽치고 앉게 되었으며, 절대 말 안 통할 새끼랑 삼 개월 후에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 얼레꼴레를 충분히 곁들여서. 최종수 앞에서 천지 구분을 때려치운 기상호가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상종을 못 하겠다더니, 상종만 안 하나 별걸 다 하고 있어.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그 별짓 기상호도 같이 하고 있다. 연애담이란 복잡하고 쌉쓰름해서 길게 입에 두고 빨아 먹어야 하기에 단순하게는 설명 못 할 많은 일이 있었다. 기상호가 대입으로 상경 성공하고 나서는 쌍방의 거리마저 훅 줄어들었다. 부산 서울에 비하면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겠다. 대박. 좋다고 박수를 쳤으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기숙사에서 최종수 집까지 가보고선 개이득 선언을 전부 철회했다. 왜 지하철을 2번이나 갈아타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정이 복잡하니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눌러붙었다.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 비가 와서, 밤이 깊어지면 차가 끊겨서. 염병은 기상호만 하나. 최종수는 엄살이 늘었다.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운 사람이 다 됐다. 기상호처럼 각 잡고 염병 떨지 않아도 혼자 자기 싫은 티 툭툭 내면 기상호가 알아서 야레야레 이거 안 되겠구먼, 하고 주저앉아줬다. 아주 기상호 기숙사 룸메이트만 노났다. 싸움은 더럽게 많이 했고 여행은 한 번도 안 가봤다. 부산이고 서울이고 이미 이동이 충분히 지겨워서 그랬다. 상경한 김에 서울 번화가나 좀 쏘다녀 봤는데 둘 다 얼마 못 가 흥미를 잃었다. 기상호가 최종수 없는 최종수 집에 혼자 늘어져 있는 이유도 그래서다. 암만 최종수가 부재해도 밖보단 집이 더 재미있으니까. 그리고 기숙사에서 애니보려면 필히 이어폰을 껴야 하는데 여기선 소리 서라운드로 빵빵 키우고 봐도 돼서 좋았다. 이미 최종수 유튜브 알고리즘은 시시콜콜한 시사교양에서 한참을 벗어나 많이도 더럽혀졌다. 그러니까 최종수가 기상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처음 들려오는 소리가 그게 먼데 씹타쿠야 일본어여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거듭된 번뇌 끝에 최종는 결국 흘려내는 법을 익히고야 말았다. 장족의 발전이다. “너 지금 집이지. 놓고 온 거 있어. 갖다줘. 급한 거야.” 오이! 오마에! 거친 소리를 싸그리 무시하고 용건만 다이렉트. 에에엥. 좀 귀찮은 듯. 틀어놓은 애니 소리보다도 훨씬 작은 기상호 목소리가 늘어진다. 물론 공과 사가 나름 칼같은 최종수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그는 공사의 구분이 꽤 뚜렷했는데 공적인 영역에 있을 때의 최종수는 쌍욕도 잘했다. 뒤질래? 아니요. 기상호가 꿈지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소리보다는 소파 가죽이 비비적거리며 밀리는 소리가 차라리 믿음직했다. 적어도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뭔데요. 처덕이는 발소리. 방에 더플백. 나이키. 딸깍. 전등 스위치 누르는 소리. 물건을 찾아낸 듯한 기상호의 탄식. 이 형이 미쳤나. 이 사이즈를 놓고 나간다고. 뒤질래? 아니요. 퀵서비스 갑니다. 금방 갑니다. 여기서 최종수는 잠깐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라디오였다면 아슬아슬하게 방송사고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공백이 떴다. 택시 내가 부를 테니까 그거 타고 와. 심부름시키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지 최종수는 전에 없이 친절했다. 그냥 가도 되는데. 타라면 좀 타. 예, 예에. 기상호가 감지 않은 머리에 모자를 얹고 슬금슬금 슬리퍼에 발을 꿰고 있을 즈음 톡이 왔다. 택시번호였다. 뒤에 꼬리처럼 당부가 덧붙여졌다. 꼭 타. 희한했다. 어린애 첫 심부름 시키는 것도 아니고. 유난이다. 이렇게 걱정 한 바가지여서 최종수 이 세상 어찌 살꼬. 괜시리 짠한 마음 들어 초록 예약등 켜진 채 저를 기다리고 있는 택시 사진을 찍어 보내줬다. 슬리퍼가 질질 끌렸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성긴 인사를 건네며 목적지를 확인했는데 어차피 기상호는 저가 어디 가는지 알지도 못했다. 예, 예예. 모르지만 맞을 겁니더. 이어폰을 들고 오지 않았다는 게 그제야 생각났다. 손나 바카나. 아직 집에서 보던 애니의 일본어가 귓전을 떠돌고 있는데. 대신 택시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들어야 했다. 택시는 30분여를 가서야 멈췄다. 중간에 다리를 한 번 건넜던 듯도 하다. 다리를 끼기까지 하니 먼 거리인지 가까운 거리인지 가늠이 힘들었다. 요금을 봐도 그랬다. 최종수가 어련히 알아서 자동결제 했겠지. 기상호는 택시기사를 흉내내며 성기게 인사했다. 예에. 감사합니다. 문을 닫을 때 라디오에서는 디제이가 사연을 읽어주며 답을 하고 있었다. 여행을 가신다구요. 정말 좋겠네요. 가서도 저희 라디오 잊지 마시고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리고 도로변에 최종수가 서 있었다. 무게중심을 흐트러뜨려 다리를 삐딱하게 서고선. 마치 오래 기다린 듯한 모양새라 기상호는 최종수가 저를 마중 나온 줄 알았다. 기상호보다는 짐을 조금 더 기다렸겠지만. 쪼르르 코앞으로 달려갔다. 나란히 서기 전까지는 다정한 마중에 조금 간질간질하기까지 했다. “오, 종수햄.” “뭐야.” 눈높이가 지나치게 비슷하다. 아니 조금 낮은 것 같기도 하고. 기상호가 기억하는 바로 최종수가 기상호보다 작았던 역사는 없었다. 드디어 이 형이 무릎을 접어주었네. 감탄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최종수 무릎이 곧디곧았다. 어라. 목이 뻗뻗하게 섰다. 기상호는 그의 기억보다도 훨씬 둥근 볼이 그리는 곡선을 훑었다. 노골적으로 훑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최종수 혹은 그가 아닐 수도 있는 사람, 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뭐야.” “최종수 형 심부름 왔는데…. 누구세요?” “뭐야. 내가 최종수야.” 기상호 앞의 최종수 닮은 사람은 ‘뭐야’ 말고는 아는 어휘가 없어 보였다. 그가 ‘최종’까지 내뱉은 찰나 기상호는 내심 안도했다. 그래. 이 집안 남자들은 죄 클론처럼 태어나는구나. 굉장한 붕어빵이군. 끝이 ‘수’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 튀어나오길 기대했다. 숨도 쉬지 않고 이어진 이름 석글자가 모든 기대를 박살냈지만. 형제 친척을 같은 이름으로 지을 리가 있나. 남은 건 도플갱어의 가능성뿐이다. “왜 최종수세요?” “뭐야.” 세 번째 ‘뭐야’ 만에 최종수는 기상호에 대한 판단을 마쳤는지 열 발짝을 물러섰다. 의심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에 이 형이 지나치게 서먹해졌다. 아니 근데 의식하고 뜯어볼수록 어리다. 그래서 혹여 있을 신고를 무릅쓰기로 했다. “햄…. 아가…. 몇 살이고….” “아하.” 수상한 질문이었음은 자각하고 있었다. 기상호가 목숨줄을 부지한 건 어린 최종수가 순간적으로 신고를 할지 직접 때려야 할지를 망설인 덕분이었다. 진짜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말이 갈피를 잃고 존댓말과 반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열여섯이야 미친놈아. 키패드 112자리의 위치를 더듬으며 핸드폰 잡으려는 손 붙들고 아웅다웅하다 겨우 정보 값을 얻을 수 있었다. 열여섯이라니. 열여섯. 중학교 3학년. 심지어 고교농구도 아니라고. 좋아하는 형의 회춘에 기상호는 절로 애잔해지고 말았다. “형이 왜 열여섯인데요.”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손으로 애써 막고 있는 최종수의 핸드폰이 몇 년 전의 모델이라는 데서 불안감이 정수리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다. 머리는 ‘설마’로 이루어져 있었고 꼬리 또한 ‘설마’로 잘게 진동하며 곱게 말아 감겼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무시하기엔 기상호는 서브컬쳐 장르물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는 그가 진작 물어봤어야 할 말을 뒤늦게 물어보았다. 실례합니다만 지금 몇 년일까요. 현실은 가볍게 불안감을 배신했고 계산상 기상호가 아는 최종수가 열여섯이었으면 딱 맞을 만한 연도였다. 오 마이 갓. 귓전에서 백 투 더 퓨처 오에스티가 울려 퍼졌다. 기상호를 제일 절망케 한 건 시간 여행 자체가 아닌 제가 타고 왔던 택시 차종이 K5였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드로리언이 아닌 K5로 시간 여행을 할 수가 있어. 절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주저앉는 와중 최종수 옷만큼은 절박하게 부여잡았다. 최종수가 당장에라도 저를 버리고 갈까 봐서였다. 어지간한 박치기에도 쉽게 흔들린 적 없던 몸뚱이가 손짓 하나에 휘청이는 게 생경했다. “절 버리면 안 돼요. 길을 잃었어요. 지금 이 서울 바닥에서 믿을 게 햄밖에 없어요.” “뭐야.” 아니나 다를까, 최종수가 질색했다. 지나치게 싸가지가 사라진 면이 있었는데 이는 기상호가 초래한 결과다. 그가 알던 최종수임을 인식하자마자 반말을 버리고 아예 존댓말로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입천장에 매달린 유교가 그랬다. 평소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워낙에 비상 상황이라 허리마저 수그린 것 같다. 저보다 큰 어른이 알아서 깍듯하게 비굴떨고 앉았으니 최종수는 상대적으로 버릇 나쁜 애가 되기 마련이었다. 웃기고 있네. 그쪽이 뭔데. “저는 햄의 상상 친구입니다…. 그 녀석 있잖아요. 햄을 다 발라버리고 미국도 간.” 최종수가 알고있되, 동시에 존재하지 않아 손쉽게 공백을 꿰찰 수 있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다. 기상호 혓바닥이 매끄럽게 헛돌았다. 개소리였다. 이제 쌍용기의 먼 기억은 급하게 퍼 올릴 정도로 스스럼을 무릅쓸 일이 됐다. 시간이란 참 대단하지.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하던 생각을 다시금 했다. 오늘은 이런 날이었구나. 두서없이 찍힌 점들임에도 어떠한 예감과 감상들은 이어지는 법이다. 점을 선으로 이으면 그림이 나타나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 최종수는 아직 그 녀석을 잘 몰랐다. 아이고, 순진하다.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에 웃음이 다 나왔다. 대놓고 귀여워하는 기상호를 보며 최종수는 씩씩대다가 겨우 반박했다. “내 상상 친구는 사투리 안 써.” “전 지금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하고 있는데요.” 이 또한 개소리였다. 서울 올라왔다고 기상호는 서울말 네이티브 된 것처럼 굴고 있었으나 억양에선 서울과 거리가 먼 높낮이가 드문드문 묻어나왔다. 그게 열여섯 최종수 듣기엔 퍽 기이했다. 이상한 말. 이상한 사람. 중얼거렸다. 그래서 미국은 좋아? 암요. 베리 웰. 한국말도 이상하더니 영어는 더 이상했다. 아메리카 좋죠. 배고픈데 햄버거나 먹으러 갈까요. 아주 잠시만 같이 시간 때워주면 됩니다. 살려주세요. 햄뿐이라니까요. 헬프 미, 플리즈. 말 돌리는 것마저 이상했다. 최종수 옷을 붙든 손은 여전히 놓지 않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제 바지 뒷주머니를 쑤셔대고 있었다. 뒤진 끝에 나온 건 납작한 지갑이었다. 자신있게 흔들었다. 자화자찬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내가 또 지갑은 챙겨갖고 나왔지. 뭐든 쏠테니까 제발. 아직 기상호보다 한참은 어릴 최종수가 들으란 듯 세차게 혀를 찼다. 지금은 아니지만 3년 후 최종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예정이었으니 기상호는 최종수의 혀 차는 소리를 올바르게 알아먹었다. 영 내키지 않지만 해주겠다는 뜻이다. 햄은… 정말 착한 사람입니다…. 최종수 엄마나 할 법한 칭찬이었다. 아이구, 우리 착한 종수. 기상호가 간과한 일이 있는데, 올라온 지 일 년이 넘었어도 기상호에게 서울은 아직 낯선 도시였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풍경을 구분할 줄 몰랐다. 가끔 가던 수제 햄버거집은 최종수가 알려준 집이다. 패티 육즙이 훌륭해서 둘 다 마음에 들어했고 곧 기상호에겐 서울의 맛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 햄버거집의 역사에 대해선 기상호 알 바가 아니었으나 서울의 음식점들이 얼마나 샛별처럼 무수히 피어나고 지는지, 전통이 얼마나 귀한지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기상호가 아메리카를 운운하며 끌고 간 가게 자리에는 햄버거 집이 아니라 옷가게가 있었다는 소리다. 황망하게 간판을 올려다봤다. 백 번을 봐도 옷가게였다. 우쯔케 이럴 수가. “있잖아요. 나중에 여기 끝내주게 맛있는 집이 생겨요…. 추천합니다.” “청바지를.” “아니 햄버거를….” 미래에서 온 기상호. 로또 번호 5등조차 알려주지 못하지만 적어도 맛집은 알려줄 수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정말 맛있는데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네. 최종수만 절대 못 믿을 얼굴을 했다. 햄버거집은 포기하고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아메리카여서다. 아메리카 하면 아메리카노니까. 여기에서 완전히 기가 빨린 최종수는 레모네이드를 앞에 두고 대체 언제까지 이 사람과 어울려줘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울린다 해도 별 거 없었다. 기상호가 서울에서 가봤다는 맛집들을 죄 소개했다. 집 학교 경기만 오가는 최종수로선 태반이 모를 이름들이었다. 이미 있는 지도 모르고, 앞으로 생길 지도 모르고. 한 번 겪고 나니 모든 가게에 이런 단서가 붙었다. 햄이랑 농구얘기는 가급적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이에 대해 기상호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했다. 그는 정말로 지나치게 서브컬쳐 장르물을 너무 많이 보았다. “이게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거든요. 관여하면 안 되고, 미래를 바꿔도 안 되고, 나랑 마주치는 것도 이상하죠. 천기누설도 좀.” 손가락을 계속 접어나갔다. 지켜야 할 게 많기도 하다. 누가 만든 법칙이냐고 했더니 기본 상식이고 다들 그런다고 했다. 숫제 알못취급이었다. 그걸 몰라요? 그래 넌 많이 알아서 좋겠다. 불퉁하게 내뱉었더니 기상호가 깔깔 웃었다. 테이블을 치다가 지갑을 들고 벌떡 일어나더니 케이크를 시켜오기도 했다. 마구 귀여워하는듯한 태도가 온몸으로 드러나서 꼴볼견이었다. 최종수는 기상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적어도 기상호의 이 태도가 결코 평소의 텐션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맞다. 기상호는 실컷 기회를 틈타고 있었다. 한발짝만 더 내딛을 수 있다면 볼따구도 슬쩍 꼬집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종수가 종종 기상호의 뺨을 잡고 흔들어대던 때가 있었다. 얄미워서 그러나 보다 했더니 반대 입장이 되어 보니 알 것 같았다. 귀여워 죽겠다는 감정이 넘치면 이렇게 되는군. 의외로 초조해하지 않은 건 일종의 믿음이 있어서였다. 택시는 최종수가 불렀다. 번호를 보내주고 거듭 타야 한다고 확인하면서. 과한 친절일 리가. 이건 최종수가 보냈구나, 쉬이 예상이 갔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내릴 때 들리던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 빨대를 물고 끄덕거렸다. 최종수가 끝내주는 천재 과학자랑 연이 있어서 K5 택시를 타임머신으로 개조했을 리는 없고, 이 현상에 대해 최종수도 원리나 구조에 대해 빠삭할 확률은 희박했다. 그걸 알면 노벨상 탔겠지. 그렇다면. 결론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열 여섯살의 최종수를 보면서. 그 사람, 이미 겪어봤구나. 기상호가 미래로 돌아가는 모습도 봤겠고. 그리고 기다렸구나. 최종수가 가끔 유심히 기상호를 보던 때가 기억이 난다. 날짜를 재고 있었던 중이었단 걸 뒤늦게나마 이해했다. 지금의 장면은 분절되지 않고 유리되지 않을 것이며 미래로 연결될 것이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었다. 최종수가 보냈으니 최종수에게도 딱히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으리라. 그렇다면야. 이게 기상호가 서울 맛집이나 늘어놓으며 낙관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맛집을 열 몇개 늘어놓은 끝에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까? 그렇지 않다. 기상호는 눈 희한하게 뜨며 순 이상한 얘기들만 주워섬겼고 그리하여 최종수에게 기상호에 관한 인상은 초지일관 헛소리 하는 사람으로 남아버렸다. 최종수가 이 낯선 사람에게 불현듯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최종수의 가치관이 바뀌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후에 일어날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최종수 기억에는 남았으니 신기한 일이다. 둘은 딱 레모네이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바닥날 때까지의 시간만을 함께 했으며 최종수가 유리잔에 남은 얼음을 짤각짤각 흔들고 나서야 카페를 나섰다. 덩그러니 인도에 섰다. 가만 서 있는 두 사람이 통행에 방해되는 듯 길 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비껴 지나갔다. 이후 최종수도 예측하지 못한 돌아가는 방법이란 간단했다. 빈 차 램프에 불을 밝힌 K5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최종수가 톡으로 보내줬던 그 차번호를 달고. 기상호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요! 더플백이 허벅지에 부딪혀 그가 내내 최종수 심부름으로 이 가방을 메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왜? 굳이 더플백을? 택시가 기상호를 향해 천천히 속력을 늦춰갔고 기상호는 최종수에게 인사하는 둥 마는 둥 가방을 열어보았다. 최종수도 궁금한 듯 기상호 어깨 너머 기웃거렸다. 어쩐지 감촉이 너무 익숙하더라. 가방에는 농구공 하나만 덜렁 들어 있었다. 하. 그래서 당신은 여기 공을 넣어 두었구나. 이걸로 뭐, 농구라도 같이 해주길 바랐어? 열여섯 최종수를 돌아봤다. 어린 그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상호가 농구를 하긴 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하고 어렴풋하게 납득하는 것 같기도 했다. 택시는 거의 다가왔다. 부드럽게 타이어가 마찰하고 아스팔트와 차체가 발하는 열기가 훅 날아왔다. 기상호는 공을 꺼내 최종수를 향해 던졌다. 품에 가볍게 안착했다. 안녕. 또 만나요. 가방이 가벼워졌다. 택시 안 라디오 디제이가 여전히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를 영영 잃어버려 기상호는 어쩔 수 없이 최종수 집으로 돌아갔다. 내리자마자 내내 먹통이었던 핸드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메세지를 들여다봤다. 마지막으로 택시 찍어 보낸 사진을 확인만 해놓고 최종수는 답이 없었다. 아마 답을 보내 봤자 기상호가 읽을 수 없을거라 생각한 듯하다. 집에 갔더니 이미 최종수가 있었다. 놓고 온 게 있다느니 급한 일이라느니 하는 소리는 전부 뻥이었구만. 허탈함에 어깨를 늘어뜨린 기상호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맞이하는 말은 무심하고, 간단했다. 한 마디로 성의 없었다. “뭐야. 생각보다 빨리 오잖아.” “어우, 어우, 어우…. 최종수….” 내를 그 혹독한 곳에 던져놓고. 기상호는 발목을 털어 슬리퍼를 현관에 냅다 집어 던지고 최종수가 아까 전화 너머로 들었을 발소리를 처덕처덕 내면서 달려들었다. 불과 30분 전에 왔던 어린 볼 보담도 훨씬 날렵해진 얼굴을 잡고 흔들었다. 어우, 어우, 어우. 이걸 몇 년을 묻고 살았어? 잔뜩 늘어난 입으로 최종수 발음이 불분명했다. 이거, 놔. 그가 한 짓을 알아 기상호의 행동을 겨우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불퉁하게. 감정이 넘치는 순간이다. 손끝으로 왈칵 넘쳐 입술에 들러붙기까지. 먼 과거로 던져 버린 농구공을 8년 후 최종수가 부러 방 한켠 더플백에 집어 넣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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