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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배터리 / 카이미즈 / 케이크를 마주 보고2025-09-0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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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하고 불안정한 고등학교 적응 기간을 지나 카이온지 카즈키가 일종의 안정기를 찾은 것이 분명해졌다. 골든위크를(카이온지는 골든위크의 대부분을 합숙으로 보냈다.) 거치고 나니 제 학교에만 몰입하던 시야가 부쩍 넓어진 것이다. 그제야 주변 환경을 챙길 정신머리가 생겼다.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안정기. 그러고 보니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이런 사사로운 명명을 할 만한 사람은 하나뿐이다. 미즈가키 슌지다. 새 환경에 대한 기대와 흥분은 죄 사라지고 규칙적인 일상 속 무료함만이 남아 시시껄렁한 자극을 찾아 배회하는 시점이 바로 안정기라고. 미즈가키는 바짝 각이 잡힌 4월의 카이온지 목소리를 들으며 한껏 깔깔대며 웃었는데 그 어리버리함도 금방 지나간다고 했던 게 마지막 대화였다. 격려인지 조롱인지. 대화는 전화 통화로 이루어져 끝부분이 잘게 부스러졌다. 통화를 끝내고도 오랫동안 휴대폰 표면이 까슬까슬했다.

입학 시즌을 그렇게 부르던 미즈가키는 빠른 고교 적응을 끝낸 후 진작 예의 안정기에 접어들어 온갖 유흥과 일탈을 섭렵하며 최대한 시시하게 보내고 있던 중이다. 적당한 매일매일. 적당하게 공부. 텔레비전 삼매경, 가끔 테스트. 보상을 위한 놀이. 그 와중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한가했다. 이대로 3년이 지속된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그 틈바구니를 웬 핸드폰 진동 하나가 끼어들었다. 

진동은 손바닥을 두드리고 심장에 다정히 노크했다. 안 좋은 예감 또한 같은 박자로 두드렸다. 휴대폰에 낯익은 숫자 나열이 덜덜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암호 같은 숫자를 해체해 재조립하고 나면 카이온지 카즈키의 이름이 된다. 젠장. 눈썹이 찌그러졌다. 주소록에서 이름을 삭제했음에도 소용없었다. 그러기엔 미즈가키의 기억력이 너무 좋았다. 그는 번호를 한눈에 훑었고 기억 속 얼굴과 대번에 매치시켰다. 나열된 숫자로 이루어진 카이온지 카즈키의 이름 혹은 그 문장이 웃었다. 미즈가키, 잘 지내? 짧고, 여상했고, 아무런 용건도 없었다. 미즈가키는 바로 휴대폰을 덮었다가 3시간 후에 답장했다. 지금 바로 너 때문에 못 지내게 됐어. 괜히 반응해서 헛수작질에 넘어가는 것 같아 3시간 내내 기분이 더러웠다.

그 중학교 마지막 계절로부터 비롯된 버릇인데, 카이온지 카즈키는 무료함을 종종 미즈가키 슌지로 해결하려 들곤 했다. 한 발짝 더해 더 나쁜 것은 카이온지의 이 해결방식이 절대 무의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카이온지 카즈키는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미즈가키 슌지를 귀찮게 해서 즐거움을 얻겠다는 목적 또한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 지금 막 그가 접어든 소위 안정기에서도 그랬다. 안정기를 명명한 것이 미즈가키이니만큼, 그는 더욱더 미즈가키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혼잣말은 문득 튀어나왔고, 이후로는 모든 행위가 몸에 밴 대로 흘러갔다. 엄지손가락은 익숙하게 휴대폰 키패드를 훑는다. 함부로 삭제하지 않았기에 카이온지의 주소록에서 미즈가키 슌지의 이름은 멀쩡히 잘 살아있었다. 

그렇다. 미즈가키 슌지 휴대폰에서 카이온지 카즈키의 이름을 지우는 게 답이 아니라 전화번호를 바꾸는 쪽이 답이었다. 미즈가키는 카이온지의 메일이 오고서야 깨닫고 만다. 그래, 좋다 이거야. 이젠 될 대로 되라 싶어졌다. 3시간을 버티던 미즈가키의 답장 텀이 빨라졌다. 카이온지가 본론을 미뤄가며 뜬구름만 잡고 있을 때의 용건은 하나다. 얼굴 보자는 뜻이다. 긴 서두를 잘라내고 냅다 장소부터 정했다. 순 미즈가키에게만 가까운 곳이다. 별로 카이온지의 사정까지 고려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리가 멀든 뭘 타야 하든 알게 뭐람. 싫으면 안 만나면 돼. 과연 카이온지도 문맥의 이면을 알아들었는지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화창한 5월의 주말, 두 사람은 번화가의 카페에 앉아 나폴리탄을 돌돌 말게 되었다. 나폴리탄을 추천한 건 미즈가키다. 세상에 카이온지. 이래서 닛타의 촌놈은. 뭘 모르는구나. 여기선 무조건 나폴리탄이야. 다른 메뉴는 필요 없어. 아예 메뉴판을 보지도 못하게 하는 강권에 나폴리탄을 시켰지만, 솔직히 카이온지가 먹기로는 그저 그랬다. 미즈가키만 빠르게 면을 말아 삼켰다. 어딘지 엉성한 게 썩 맛있게 먹는 걸로도 보이진 않았다. 반 이상을 먹고 나서야 겨우 포크를 내려놓고 숨을 돌렸다. 물 한 컵을 전부 비웠다.


“편할 때만 부르고 말이야.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고. 실망이야. 카즈키군.”

“미안해. 하지만 재밌지 않아?”

“징그럽게 왜 사과를 해? 아예 부르지 말라는 소리야.”


팔뚝에 일어난 소름을 훑어 내린다. 

그럼에도 미즈가키 슌지가 카이온지 카즈키를 만나는 이유는 그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메일로 실체 없는 잽을 몇 번 날리다 보면 손바닥 안의 공기가 부풀어 오르며 뜻 모를 부채감이 꿈틀거렸다. 받은 건 돌려줘야지. 정작 저가 맞은 일이 없음에도 한 방 먹여주지 않고서는 속이 안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목구멍 아래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면 미즈가키는 카이온지를 만나 마음껏 목구멍에 탄산을 들이부었다. 부러 인기 많은 아이돌의 얘기를 잔뜩 하면서. 그리하여 둘의 대화는 대부분이 시시껄렁하고 끈적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미즈가키 슌지가 노는 데에 소일하는 동안 카이온지 카즈키는 야구부 활동을 열심히 했다. 뜀을 뛰었고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쫓아 굴러다녔다. 시합에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들어본 바로는 카이온지의 학교가 이기는 쪽의 비율이 조금 더 높았다. 아직 1학년이었기 때문에 카이온지가 시합에 나간 비율은 조금 낮았다. 그렇다면 카이온지 카즈키가 시합에 나가 이긴 비율은 어떻게 될까? 소수점으로 이루어진 산수 문제가 남는다. 어때, 이만하면 풀고 싶어지지. 미즈가키가 쏟아내는 아이돌 얘기나 연애 얘기에 지지 않을 정도로 카이온지 카즈키도 고교야구 얘기를 들이부었기 때문에 화제는 서로 섞여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여자 아이돌이 마운드 위에서 140km의 공을 던져 고백하는 등 혼탁해졌다. 미즈가키는 여러 번 강조했다. 그 학교 포수가 연애 중인 게 분명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평론가의 펜을 든 양 신랄한 어조였지만 내용은 저열했다. 그는 카이온지의 고교야구 얘기에 어울려 산수 문제를 풀면서도 늘 시합의 원인과 결과를 엉뚱한 방향으로 연결하려 들었다. 시합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아니면 자신은 이제 야구와는 아무 관련 없는 부외자라는 듯이. 카이온지 카즈키가 기다리는 뼈 있는 말은 아주 가끔 스쳐 지나가는 게 전부였다. 카이온지의 손에 잡히려다가도 실낱같이 흐려져 엮기가 힘이 들었다. 


카이온지는 지나간 겨울을 그리워했다. 정확히는 그해 겨울 첨예하게 부딪히던 날 선 감정들을 그리워했다. 살아있고, 날카로우며, 정제되지 않은 채 생생하게 펄떡이던 진심들. 실제로 몇 번은 충돌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도발이라면 미즈가키에게 배웠지 않은가. 하지만 때마다 시도는 여지없이 튕겨 나갔다. 부질없는 환상 하나를 바라고선 젖은 땔감 위로 성냥만 마냥 그어대는 꼴이었다. 고작 이걸로 포기할 리가. 당연히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된다.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미즈가키 슌지의 욕망과 다시 한번 생생하게 살아있는 날것의 감정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카이온지 카즈키의 욕망이 맞물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을 돌았다. 지지부진한 회동이 이어지는 건 이 까닭이었다. 대개는 요코테의 시내에서였다. 매회 만남은 원수 들린 양 빈 컵의 얼음을 씹어먹는 것으로 끝났으며 둘 중 누구도 그다지 만족하지는 못했다. 미즈가키는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울 때마다 말리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카이온지는 고민에 빠진 얼굴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는지 구설에 올랐다. 누군가를 꼬시느라 열 올리고 있다는 뜬소문이었다. 그게 누군데? 우리 학교 애야?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꼭 미즈가키나 좋아할 법한 가십이었다. 무슨 상사병에라도 걸린 것 같지 않은가(상사병도 고전 문학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로, 이 또한 미즈가키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에이, 아니야. 카이온지는 처음에는 부인했다. 하지만 부인 정도로 가라앉을 리도 없고, 애매한 부정이 오히려 불을 크게 지폈다. 진짜인가 봐! 심지어 야구밖에 모를 야구부 놈들마저도 인자한 표정으로 어깨를 두들겨줬다. 카이온지의 주변이 핑크빛으로 화끈 달아올랐다. 그 한복판에 있는 카이온지 카즈키가 휩쓸리기엔 아주 충분할 정도로. 어드바이스랍시고 사방에서 속살거리니 카이온지마저 차츰 간사하게 젖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짜 꼬시는 중인지도 모르지. 또 어휘 자체가 그다지 틀리지도 않았다. 목적이 조금 달랐을 뿐이지 카이온지 카즈키가 미즈가키 슌지를 꼬여낸다는 건 맞지 않는가. 참작하고 들으니 어드바이스가 그다지 나쁜 것도 없었다. 몇 달간 이어져 오는 이 데이트에도 슬슬 변화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미즈가키가 지겨워하고 있었으므로.


물론 닛타의 한 학교에서 일고 있는 핑크빛 바람에 대해서 미즈가키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도 카이온지와 마찬가지로 변화를 꾀하고 있기는 했다.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꽤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다. 예의 시합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카이온지 카즈키와의 사적인 만난 횟수가 다섯 번 정도 이루어졌을 때 즈음, 미즈가키 슌지는 둘 사이에 적절한 완충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평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갈등과 전쟁을 불사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에어백이 있다면 전력을 다해 휘둘러도 될 것 같았으니까. 막연하게 생각해 온 장벽은 점점 머릿속에서 구체화되었다. 푹신한 생크림을 입고선.

그때부터 만남의 장소는 패스트푸드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이 아닌 카페로 변경되었다. 이 역시 미즈가키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후 과정은 다음과 같다. 설마 이거 아니지? 하는 표정의 카이온지를 연행해 카페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최대한 구석 자리로 몰아넣는다. 뭐라 항의하기 전에 입을 틀어막고 케이크 세트를 주문한다. 계획도 실행도 완벽했다. 주문하신 케이크 세트 나왔습니다. 친절한 목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케이크가 올라왔다. 전형적인 딸기 쇼트케이크였다. 앙증맞았다. 급작스럽게 펼쳐진 깜찍한 데이트 무드에 카이온지 카즈키는 당혹스러워했다. 남자 고교생 사이 케이크에 커피는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괜히 코끝을 벌름거리며 쉽사리 포크를 잡지 못했다.


“미즈가키. 이거 좀 그렇지 않아?”

“그렇지? 카즈키군은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야.”


괜히 물어봤다가 뜻 모를 소리만 들었다. 그것도 카즈키쨩군에 방점을 찍어서. 여전히 미즈가키 슌지란 사람은 잘 모를 놈이었다. 그는 시침을 뚝 뗀 채로 포크를 들어 케이크의 생크림을 마음껏 휘저었다. 크림은 말캉하다. 장벽이란 푹신해야만 한다. 그래야 마음껏 칼을 던지지. 휘젓다 푹 꽂아 넣자 딸기 조각이 발갛게 으깨졌다. 마음에 들었다. 


“너랑 먹는 건 이 정도 거북한 게 좋겠어.”

“하지만 너무 달지 않아?”

“이제부터 아주 입맛이 쓰게 될 테니까 괜찮아.”


이날의 대화는 눈 뜨고는 못 볼 정도로 엉망으로, 끔찍하기까지 했다. 달콤하고 푹신한 데다, 화풀이를 해도 되는 물건이 그들 사이에 놓이게 되자 미즈가키는 마음 놓고 언어의 수위를 올렸다. 욕을 섞어서 신랄하게도 토해냈다. 야구에 대해 모르는 척은 이제 집어치웠다. 야구를 피해 딴 길로 새기 위한 상상은 거둬내고 플레이에 대한 평가를 직접적으로 했다. 대신 엉터리 정보가 마구잡이로 섞였다.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다 아는 척 파악하는 척 혓바닥 놀리는 건 장기였으니. 타율과 변화구와 팀 내 분위기, 각자의 컨디션 등을 제멋대로 억측해서 까발려놨다. 틀려도 상관없었다. 가십 또한 여전했다. 대개는 비난과 비방 일색이었다. 저는 잡아 보지도 않은 경식구의 실밥 하나하나를 풀어헤치고 재단했다. 좋아하는 분야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제멋대로 깎아내리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도 없다. 야구 얘길 원한다면 실컷 해 주지. 카이온지 카즈키가 야구에 대한 같잖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부디 훼손되기를 바랐다. 기분이 잡쳐준다면 더 좋고. 포크는 서슴없이 케이크를 찍어눌렀다. 푸욱.

그리하여 그들의 대화는 전부 케이크를 한 번씩 거쳐서 이루어졌다. 처음이야 미즈가키 슌지의 독무대였다. 카이온지는 케이크에 손도 대지 못했다. 입을 여러 번 달싹였지만, 기세에 밀려 얌전해졌다. 카이온지 카즈키를 만나고도 편안하게 발 뻗고 자는 밤은 오랜만이었다. 짧은 밤이 지나갔다. 불행히도 미즈가키 슌지의 단잠은 그날뿐이었다. 카이온지는 변한 흐름에 곧 완벽하게 적응해 냈다. 하룻밤의 시간이면 충분했는데 그마저도 제때 자서 제때 일어났으니 실제 쓰인 시간은 몇 시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시간 동안 생각하고는 다음 날 등굣길에서 결론을 내렸다. 이것도 재미있는데. 결론이 났으면 전해야 했다. 카이온지는 그런 요지의 메일을 보냈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즈가키가 지각을 감수하고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뻔했지만, 세워진 장벽은 철거되지 않았다. 카이온지도 쿠션을 사이에 둔 전쟁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다. 재미있었으니까. 제 몫의 포크를 꼬나들었다. 찌르는 건 정중앙이다. 둘은 곧 멋대로 케이크를 가르고 쪼개고 으깨기 시작했다. 카이온지의 의견도 대부분은 사견에 불과했으나 현실성 면에서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미즈가키 네 얘기도 재미있지만, 이라는 방패가 붙어 견고하기도 했다. 허, 미즈가키가 헛웃음 쳤다. 그래, 재미있네. 재미있고말고. 쿠션에 발을 디디고 칼을 꽂고 뭉그러뜨렸다. 대화가 종반에 다다르면 케이크는 너덜너덜해졌다. 그제야 미즈가키는 질퍽질퍽해진 생크림을 긁어먹었다. 포크를 입에 물고선 앞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이 끝이 금속을 긁는 진동에 소름이 일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진창이지만 확실히 카이온지의 말대로다. 재미는 있었다.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놨던 때보다는 훨씬 더. 그래서 빈정이 상했다.


주제는 고교야구였고 고교야구 중에서도 이 바닥, 이 근방의 고교야구였다. 간혹 타지까지 범위를 넓히기도 했지만 코시엔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가까운 학교들의 정보 값이 아무래도 더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중 카이온지의 학교도 예외는 아니라서 악담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카이온지 카즈키의 학교이기에 뭇매를 맞았다. 미즈가키는 집요하게 깠다. 주먹으로 포크를 쥐고 깡깡 내려쳤다. 금속소리가 날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그는 이를 위해서 근거 없는 낭설과 근거 있는 경기기록을 몽땅 긁어모았더랬다. 질은 둘째치고 양으로만 따지면 가장 방대한 쪽에 근접했다. 넘버 원은 아니지만(넘버 원은 당연히 요코테 제2중학교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편이다. 

미즈가키가 죽어라 쌓은 데이터는 오로지 카이온지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펼쳐놓는 모든 지표가 카이온지 카즈키의 실패를 가리켰다. 일견 그럴듯한 것들도 있었지만 개중엔 주장의 별자리 운세가 사나우니 코시엔은 글러 먹었다는 개소리마저 있어서 카이온지로선 억울해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어차피 증명은 미즈가키의 의무가 아니라서 미즈가키는 혓바닥이 움직이는 대로 떠들었다. 타자의 배트 속도만 조금 늦어도 이미 안 될 놈이었다. 1루로 뛰다가 아웃 당하기라도 하면 대놓고 끌끌거렸다. 멍청하긴. 당장 스파이크를 안 벗고 뭐 하는거람. 미즈가키의 눈에는 카이온지의 학교가 영 야구에 적합하지 않은 단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카이온지도 지지는 않았다. 네 의견도 재미있지만, 으로 시작하는 반박은 꽤 충실했고 자기변호이니만큼 사실을 근거로 두고 있었다. 화풀이의 방향이 옳지 못하다는 항변 또한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의견이었다. 논리적인 토론을 벗어던진 미즈가키가 수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아주 가끔 경기에 나가는 어떤 일학년 유격수에 대해서라면 더 가차없어졌다. 경기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문제점들도 낱낱이 지적했다. 거의 험담이었다. 처음엔 성격이 나쁘다고 했다. 쓸데없이 농땡이를 친다고도 했다. 마지막엔 얼굴을 보아하니 이 놈 또한 연애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했다(경기기록엔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딴 생각을 하고 있군. 연애하고 싶어서 죽겠나 봐. 숙맥같으니. 하지만 여자애들한테 말도 못 붙인다지? 가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역시 그만큼이나 지적을 날려대면 맞는 부분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카이온지 카즈키는 결국 미즈가키 슌지를 따라 논리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카이온지는 순순히 긍정했다. 연애에 대한 가십이라면 카이온지의 반 친구도 알고 야구부 부원도 알고 있으니 거기에 미즈가키 슌지 하나 더 늘어나는 정도야 상관없었다. 미즈가키는 대번에 재미있어했다. 커피를 마구 휘저어 들이마셨다.


“헤에. 이번엔 좀 흥미로웠다. 평생 야구랑만 연애할 줄 알았지. 카이온지, 이 엄마는 정말로 기쁘단다. 그래서 말은 붙여봤고? 누군데? 같은 학교?”

“너.”

“….”


커피가 방울마다 가시를 달고선 데구르르르 넘어간다. 식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단어 하나가 화끈하게 길을 따라 내려갔다. 카이온지 카즈키가 휴대폰 진동으로서 심장에 노크하듯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카이온지는 그다지 긴장한 얼굴도 아니었다. 고백을 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이미 그 자체로 일상에 자리잡은 것처럼.


“꼬시고는 있는데 쉽진 않네.”

“…하하.”


심장에 얹힌 많은 감정을 미즈가키는 마른 웃음 두어 번으로 털어버렸다. 거의 바람만 빠져나가는 웃음이었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케이크를 쑤석거렸다. 화풀이 할 수 있는 케이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카이온지 카즈키도 미즈가키 슌지도 같은 생각을 했다.




카이온지의 고백은 그렇게 무시되었다. 약간은 짓밟힌다에 가깝게. 고백이라 해봤자 제대로 된 게 아니라 흔들다 못해 새어나온 탄산음료의 기포 같은 것이었으니 억울할 일도 없었다. 카이온지는 그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다. 고백을 후회하지도 않고. 비록 집에 돌아와서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쉴지언정. 썸이 잘 안 풀리나봐. 카이온지의 반 친구들이 수근거렸다. 이미 그네들 사이에선 짝사랑이 아닌 썸이 되어 있었다. 인식부터 어긋났으니 어드바이스는 신통한 것이 없었다. 


미즈가키도 제대로 잠을 이루진 못했다. 이게 카이온지에게 유일한 위안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천천히 돗대를 아껴 피운 끝에 미즈가키는 억지로 결론을 도출해 냈다. 카이온지 카즈키의 실언이다. 이겨먹겠다는 마음으로 선을 넘었나 보다. 고작 실언이기에 만남은 계속되어야 했다. 케이크를 사이의 둔 모든 대화는 실없고 유치하고 무가치한 말들이었으니 카이온지 카즈키의 고백도 그래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었으니. 괜히 의식하는 꼴을 보일까보냐. 필터를 짓씹으며 메일을 보냈다. 끔찍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 위해 보기 싫은 상대를 일부러 만나야 하다니. 제가 판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했다. 부러 제목을 썼다. 나를 너무 좋아하는 카즈키군에게. 카도와키에겐 이렇게 넋두리했다.


“슈고, 인기란 피곤한거야….” 

“뭐? 슌. 누가 너한테 그런 헛바람을 불어넣었어?”

“닥쳐.”


그 때 카이온지의 휴대폰에는 바로 그 낯간지러운 제목의 메일이 떠 있었다. 나를 너무 좋아하는 카즈키군에게. 제목만 적나라했지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어조는 사무적이기까지 해서 대화를 귀찮아 할 때의 미즈가키의 습관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대충 덮고 지나가자는 뜻이군. 그 뜻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카이온지는 반가워한 동시에 약간 낙담했다. 친구들아, 응원해 준 마음은 고맙지만 나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그로부터 3주 후 주말에 이루어진 만남에선 카이온지가 먼저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동안 어땠어? 인사치레를 하는것과 동시에였다. 도저히 맨정신으론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미즈가키는 히죽거렸다. 불쌍한 카이온지. 하지만 맨정신으로 마주보기 힘들기는 미즈가키도 마찬가지였다. 미묘한 분위기에 카이온지가 ‘미안해. 농담이었어.’ 소리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죽어도 그럴 일은 없었다. 그는 결코 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도피하는 수밖에. 헛소리가 배는 늘었고 횡설수설했다. 그래 열심히 하다보면 가볼 만하지 코시엔. 하다 보니 미즈가키가 응원하는 말을 다 할 정도였다. 카이온지도 케이크를 연신 찔러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뭘? 야구를? 아니면 연애를? 수작질을? 미즈가키는 반사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목구멍 깊숙이 생크림을 처박으면서. 다른 것도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예를 들면 좋아한다는 감정이라던가. 카이온지 카즈키의 주둥이라던가. 고백이라던가. 결국 미즈가키가 카이온지의 고백을 놀려먹기 위해 농 삼은 것은 메일 제목과 그 날이 다였다. 과시하듯 이 일은 작은 헤프닝에 불과하다, 행동한 후엔 깡그리 삭제해 버렸다. 평소보다 배는 많은 헛소리를 토해낸 것도 그 일환이다. 가급적이면 많은 화제로 산만하게 하고 덮어버려 희미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효과는 그저 그랬지만. 카이온지가 협력적이지 않아서였다. 그는 언제든 이 고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길 바랐고, 떠오르기만 하면 낚아챌 준비가 만만이라는 듯 대화에 임했다. 포크는 늘 정중앙이었다. 그동안 케이크는 생크림 케이크를 먹다가 가을이랍시고 몽블랑을 먹다가 초콜릿 무스를 포크 뒷면으로 접시에 처발랐고 타르트 바닥을 찍어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는 다시 생크림 케이크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왔다. 사실 미즈가키는 약속이 있다고 했다. 으레 있는 핑계였다. 사방팔방 선약이 있다하고선 그 어떤 크리스마스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고 뻗대왔는데 카이온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성의 없는 추임새만 던진 채로 카이온지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래서 언제 만날래?” 

“그래 좋다고, 좋아. 그럼 크리스마스. 일요일이잖아. 어때?” 

“좋아.”

“카이온지. 거절해 줄 줄 알았는데…. 이런 날 우리 둘이 만나는 건 너무 우울하잖아.”

“왜. 나는 좋은걸.”


이상 딸기 생크림케이크를 앞에 두고 카이온지 카즈키와 마주 앉아 있게 된 경위다. 케이크 위에는 초까지 꽂아놓았다. 산타 모양의 초는 카페 측의 서비스였다. 산타 모자가 비스듬하게 녹아 갔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아른거리는 초를 보다가 미즈가키가 불쑥 내뱉었다.


“카이온지, 너 고백한 지 이제 백일이다.” 


이 만남도 3계절을 이어 오고 있었고. 너, 라고 말했던 그 날이 가을이었더랬다. 그로부터 한 계절을 건너서였다. 카이온지는 기억조차 못 하는 날짜를 새삼 끄집어낸다. 막 고개를 숙여 초를 불어 끄려던 카이온지 카즈키는 아, 말을 흐렸다. 눈을 올려 떴다. 불이 손가락 마디만큼 커져서 미즈가키 표정이 흐릿했다. 볼이 화끈거렸다. 흰 생크림 위로 뚝뚝 발간 촛농이 떨어지고 그것이 부끄러워 당장에라도 포크를 찌르고 싶어졌다. 미즈가키의 얼굴로 초점을 맞추려 노력하며 카이온지가 말했다.  


“너랑 나랑 앉아서 크리스마스 케이크 먹는 이거 지금 답이라고 생각해도 돼?”

“아니. 어디 그런 소릴 해. 산타할아버지 놀라 도망가겠어.”

“….”


영영 없던 일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미즈가키 슌지는 크리스마스 대신 그런 애매한 것을 축하하며 초를 불어 껐다. 반대로 카이온지의 머릿속에는 다른 불이 붙는데 고백이 아주 사라진 게 아니었다. 분명 아직 미즈가키에게 남아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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