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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봉신 / 천태 / 커튼-콜2025-09-08 13:52





01.



아주 오래도록 중첩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아주 오래도록. 땅거미가 지거든 종잇장처럼 투명한 하루 또한 함께 내려와 대지 위에 겹겹이 중첩되었다. 얇디얇은 날들이 수만 겹이 중첩되면 이윽고 커다란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투명한 흐름에 시간이 휩쓸려갔다. 그것을 역사라고 불렀다. 도표가 없는 역사였다. 겹겹이 쌓인 거대한 역사는 이정표 없이 이리 저리 흘러갔다. 좋은 방향이라고도, 나쁜 방향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어찌 시간에 좋고 나쁨을 논할까.

역사의 지층이 쌓임과 동시에 신화는 땅거미너머 저 멀리 저물어갔다. 중첩되기에는 한 장, 한 장이 너무나 무거웠던 시대였던 터라. 그렇게 뒷방살이 하게 된 신화는 구전으로나마 살아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일종의 허상이었다.

그럼 저문 신화에 살던 이들은 이제 무얼 할까. 황천화의 질문이다. 

그러게, 무얼 할까. 

태공망이 똑같이 질문으로 받았다. 질문 자체가 답에 가까웠다. 무얼 할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손 놓은 채 땅거미 지는 땅을 바라보았다. 붉은 어둠이 천천히 드리워졌다가 곧 새파랗게 어두워졌다. 드문드문 별들이 빛났다. 매일이 이정도만 되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최근 특이할 만한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봉신계획이 끝난 이래, 굉장히 오래간만에 일어난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사건이었다. 시간이 뒤집어지고 이음매가 절단 나 꼬였더랬다. 장장 23권의 고생은 물거품이 되었고. 시간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데에는 힘깨나 썼다. 

허나 일련의 소동이 일어났다는 걸 눈치 챈 자는 거의 없었다. 기억하는 자 또한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직접 겪었던 자들뿐이다. 사건은 수복하는 과정에서 깨끗하게 소거되었고, 틀어졌던 아귀는 서서히 맞물려 돌아갔다. 일시정지를 눌렀던 양 세상은 다시 멀쩡하게 재생되었다. 

그게 억울했던 사불상은 있는 힘껏 울상 지었다. 얼굴이 쭈꿀쭈꿀 구겨졌다. 딴엔 개같이 굴렀는데도 티가 전혀 안 났기 때문이었다. 좀 티가 나고 공치사도 있고 해야 일할 맛이 나지. 태공망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일을 잘하긴 하는데 정작 티가 영 안 난다. 몇 천 년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변한 게 없다. 이런 걸 주인이랍시고 섬기는 제가 다 불쌍했다. 눈물이 찔끔 나오기까지 했다. 한탄이 시시콜콜 늘어났다. 태공망 본인을 앞에 세워 두고서 한참 욕을 한다. 끄응. 듣는 태공망이 팔짱을 끼고선 참담히도 앓았다. 


“내가 억울해서 진짜…! 이딴 도사랑 얽혀서 좋았던 일이 한 번도 없어…!” 

“그래그래.”


태공망 혼자 듣는 게 아니었다. 비록 사불상이 겁 대가리도 상실하고 오랜 노동에 정신도 나간 게 맞지만 그 정도로 싸가지가 없진 않았다. 적어도 욕은 제삼자를 낀 뒷담화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거의 고자질에 가까웠다. 사불상의 긴긴 한탄을 황천화는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추임새도 간간이 곁들여 주었다.


“그래그래, 억울할 만하네.”

“억울할 만한 게 아니라 억울한 거죠!”


사불상이 빼액 소리 질렀다.


“나도… 나도 억울하다고…! 빛나던 내 노후…!”


옆에서 태공망도 빼액 소리 질렀다. 소리 지르는 걸 보니 아주 도사와 영수가 환상의 콤비다. 와, 이제 들어주는 것도 한계다. 황천화는 귀를 막았다. 개 뺑이를 친 태공망과 사불상이 있고 둘 다 억울해 죽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나머지 화살은 어디로 향할까? 이 자리에 없는 작자를 향한다. 분노의 화살이 절로 뾰족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왕천군이 미리 눈치 채고 튄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떠날 때 좀 신이 나 보이더라니. 


“그럼 나는 무슨 고생인데! 이게 다 주인님이 날지 못해서라구요! 넌 뭐가 문제냐, 멍청한 도사야!” 


왕천군이 튄 덕분에 사불상만 개고생이다. 민증받고 본격적으로 어른이 된 영수는 새삼 말이 많아졌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은 정확하게 고생에 비례한다. 하지만 이렇게 불만 토해봤자 소용없는 게 태공망 본인의 고생은 더했다. 숨조차 쉬지 않는 장미빛 노후계획은 다 망했다. 황천화가 듣기엔 그게 과연 노후계획이긴 한가 싶지만 서도. 이건 말로 하지 않고 속으로만 꿍얼거린다. 

늙은이, 노후 같은 소리하네. 거 망해서 천만다행이다.

머리가 셋 모였는데 순 불만들만 많았다. 화풀이라도 하듯 빨대로 유리잔을 마구 휘젓다가 동시에 원샷들 했다. 잔을 기울이다 말고 황천화가 태공망을 슬쩍 봤다. 꿀꺽꿀꺽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통밥이 조용히 굴러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작은 티타임은 끝이 났다. 사불상이 빈 잔을 흔들었다. 얼음이 맑게 부딪혀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마실 만큼 마셨으니 떠난다는 뜻이다.


“가죠, 주인님. 그 뭐시깽이 찾으러.”


황천화는 떠나는 도사와 그의 영수를 일별했다.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통밥이 굴러가고 있었다.




가끔 있는 일이다.

태공망은 신계를 일종의 휴게소로 써먹곤 했다. 아마도 태공망이 원했다기보다는 사불상의 입김이 컸을 것이다. 지친 몸 쉬고 싶었고, 노가리도 까고 싶었다. 그럴 땐 몸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라 하늘을 향했다. 그나마 신계가 인간계와 가까워서 사불상은 신계에 자주 들렀다. 사불상이 가겠다는데 뭐 어쩌랴. 태공망은 덤으로 따라와 먹는 걸 잔뜩 축내고 갔다. 아주 식충이가 따로 없었다.

반갑진 않지만 나름 손님이라고 찾아왔으니 신계에서도 대접이 필요했다. 누군가 태공망에게 특별한 볼일이 없는 이상 손님치레는 주로 황천화가 했는데 이건 그가 자청해서 나선 일이다. 처음 황천화가 손을 들었을 때, 다들 미심쩍은 눈으로 봤다. 황천화 성격 상 내켜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수상한데. 몇몇 신들이 명탐정이 되어 추리를 시작했고 그 끝은 항상 핑크빛으로 귀결되었다. 왜냐, 그게 제일 재밌으니까.   


“아, 둘이 썸이라도 타는 줄 알았지….”

“그랬으면 재밌겠다….”

“이 사람들이 대체 뭐라는 거야?!”


주책이다, 주책. 워낙에 컨텐츠란 게 없어선지 건수가 생겼다 하면 일단 헛물부터 실컷 들이키는 게 이곳 사람들이다. 다들 설레 죽겠다는 얼굴로 황천화를 바라보았다. 완만하게 찢어진 입꼬리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광대하며…. 이 작자들이 미쳤나. 그 광대 찔러주고 싶어서 황천화는 손이 근질거렸다. 

막상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고도 별 일 일어나지 않는 것 같자, 한껏 솟아올랐던 광대의 바람은 푸시식 빠져나갔다. 핑크빛 기류를 꿈꿨던 명탐정 뚜쟁이들은 싱겁게 흩어졌고, 신계에 들린 태공망과 사불상은 매번 정직하게 간식만 털었다. 이곳에 음식 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들고 날 때마다 빈자리가 여실했다. 순 간식창고에만. 빈자리에서 황천화 혼자만 가슴 쓸었다.


그네들이 신나게 들이켰던 헛물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따지자면 절반의 썸이다. 썸만 탄 지 몇 백 년이 지나서 티가 잘 안 날 뿐이다. 지지부진한 감정은 그저 머물러만 있다. 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은 채로. 그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고, 하루는 중첩되었고, 흐름에 희석되었다. 그냥 마음은 알 것도 같으면서도 다 흐지부지해졌다. 감정은 많이도 묽다. 그저 맹물이 아니라는 것만을 위안 삼는다. 존재 자체에 감사를 담아. 그래서 가끔 얼굴보고 잡담이나 하는 걸로도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그나마도 자주 거듭되다 보니 관성이 더해져서 무덤덤하다. 

일단 태공망은 그랬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황천화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궤는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도 이제는 몇 천 년을 묵은 혼이니 세월 쌓여 감정들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도 되었다. 실제 황천화가 그렇게 굴기도 했다. 사불상이 전하는 인간계 화제들에 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일종의 해탈인지, 몇 천 년 동안 도 닦아 욕망을 거세당한 신선처럼 굴었다. 

그래서 태공망도 가볍게 말할 수 있었던 거다. 시조에 관한 온갖 욕들 말이다. 모두가 가벼운 투정이었다. 별 생각 없이 하는. 그 개고생을 하는데 욕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정작 듣는 황천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혀 가볍지 않았다. 딱 이걸 기다려왔던 건 아니지만 그는 오래도록 기다려왔다. 천연덕스럽게 평정을 가장하면서. 어떠한 기회 하나를.

시간은 무한하므로 언젠가는 올 줄 알았다.

태공망의 말을 들었을 때, 황천화는 제가 줄곧 기다려왔던 게 이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타고나길 숙련된 검사였다. 어느 순간 어떻게 찔러 넣어야 할지는 제일 잘 알고 있다. 감각이 속삭였다. 이건 기회다. 속삭이는 말을 그대로 따랐다. 오랫동안 도사리던 몸뚱이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해탈? 욕망을 거세당한 신선? 웃기지도 않는다. 황천화는 그간 전혀 변한 게 전혀 없다. 생전에도 그러했고 결국 그리해서 죽음을 맞이했듯이, 꼭 안 그러게 생겨가지고 결정적일 때 사고를 친다. 하지 말라는 짓은 무조건 하고 봤다. 뒷일은 돌아보지 않고선.

이 새낀 얌전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

나중에서야 태공망은 혀를 찬다. 허망하리만치 천천히. 탄식에 가깝다.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그만. 




태공망이 떠난 그 다음날, 황천화는 바로 인간계로 내려갔다. 인간계 간다는 말에 원시천존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게 다였다. 일종의 습관이었을 거다. 큰 우려를 표하기엔 신계의 영혼들이 너무나 미미한 존재들이었다. 지상에 가서도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적었다. 기껏해야 인식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간들에게 의사를 전하는 것 정도다. 그마저도 희미해 그들의 이야기는 상당히 두리뭉슬한 계시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로또번호 점지만도 못한 미신이었다. 그래, 순서가 바뀌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신계를 봉래와 인간계 사이의 다리로 쓰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접촉해봤자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황천화가 인간계 내려가는 데에는 별반 제재가 없었다. 신계의 누구든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간만에 인간계 바람 쐬러 간다고. 덕분에 황천화는 훌훌 내려왔다. 두 다리 땅에 닿기까지는 단 십분 걸렸다.

막상 내려오니 바람 쐬기엔 공기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신화 시절신과 인간들의 숨은 죄 사라졌다. 몸뚱이라도 가지고 있었으면 어지러웠겠다. 오래간만에 내려온 황천화의 첫 감상이었다. 물론 감상은 빠르게 집어치웠다. 황천화는 마음이 급했고, 기회를 노리고 내려온 것 치곤 치밀한 계획이 없어 일단 움직이고 봐야 했다. 


그는 시조를 찾으러 왔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운빨에 달려 있었다. 태공망조차도 오랜 시간 파워스폿을 훑으면서 찾아다녔던 시조들이다. 혼백하나가 어중이떠중이처럼 돌아다닌다고 해서 쉽게 만날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애초에 혼백도 자연과 융합한 시조도 서로가 인식하기엔 그 쌍방의 존재감이 너무나 희미했다. 황천화도 양심이 있어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더랬다. 그럼에도 기어이 내려왔으니 얼마나 뒤를 생각하지 않았는지는 알 만하다.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이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도 황천화가 결국 신농을 만나긴 만났으니 그는 운이 아주 좋은 축이었다. 아니면 그의 절박함이 불러낸 거였던가. 왜 그렇지 않은가. 대자연은 종종 그런 식으로 간절한 의지에 응답하고는 한다. 시조인 그들 스스로가 대자연이니만큼 그들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계에 내려간 지 단 사흘, 소수점 아래 0이 주르륵 늘어설 만한 확률을 뚫고선 황천화는 기적적으로 신농과 조우했다. 만난 곳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다. 숨 쉬는 게 희박할 정도의 고지대였다는 것만 언급하겠다. 어차피 혼백만 남은 황천화에게는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어떠한 무게조차 달지 않은 채로 황천화는 훌훌 산을 올랐고, 능선을 탔다. 빛이 사이사이 새어 들어오는 울창한 그림자들을 지나며 잔가지들을 밟던 와중에 그는 신농을 만났다. 


신농은 예고도 전조도 없이 불쑥 등장했다. 서슴없이 나타나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태연하게 인사했다. 안녕. 늘상 봐온 사람이 안부라도 묻는 것처럼. 엉겁결에 황천화도 고개를 까닥 하고 말았다. 그래, 안녕하슈…. 그리하여 조우는 매우 싱거워졌다. 식상한 침묵이 잠시 왔다 갔다. 침묵이 자리하는 동안 신농은 멋쩍게 웃었다. 약간 신비감을 주고 싶었던 것도 같은데 낭패인 양. 그건 신농이 택한 모습을 봐도 알만했다. 알아보기 쉽게 인간 행색을 했다 해도 어쩐지 괴이쩍어서. 뭐 황천화는 당장 보이는 외견에는 별로 신경 안 썼다. 그가 신농인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했다. 신농은 그렇다고 했다. 최대한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것 또한 지나치게 매끄러워 굉장히 인조적이었으나 황천화에게는 별로 상관없었다. 이 작자가 신농이란다. 럭키! 


“당신이 금광좌 가지고 있지?”

“아, 소문이 빨리 났네. 그게 욕심이 나서 왔나?” 


신원을 확인하자마자 황천화는 다짜고짜 말했다. 아주 맡겨놓은 듯이 굴었다. 처음 만난 시조가 신농 아니었으면 대체 어쩌려고 그랬는지는 모른다. 

금광좌…, 금광좌라. 신농은 두어 번 뇌까렸다. 똬리를 틀며 구불거리는 푸른빛의 구렁이 같은 보패를 떠올린다. 요즘 따라 인기 좋은 슈퍼보패다. 별 시답잖은 혼백까지 다 찾아오는 걸 보면. 복희가 바로 이걸 저어하지 않았던가? 신농은 아직 소문을 낸 주둥아리가 복희 본인이라는 건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이럴 때에는 정해진 답으로 돌려막는 게 제일이다. 이미 시조들은 융합하기 전에 매뉴얼을 다 만들어 놨다. 읊으면 그만이었다.


“욕심이 많구나. 몸뚱이조차 없는 혼백이 무얼 할까. 미래야 궁금하지도 않을 테고. 그대가 원하는 과거로 가 봤자… 봉신필드는 혼을 가리지 않아.”


과거라면 아직 봉신필드가 살아 있을 시절이었다. 하지만 황천화도 나름 생각해 둔 게 있었다. 다른건 다 제치고 딱 그것만 생각했었다. 딴에는 치열한 계산이었다. 그가 통밥을 괜히 굴렸겠나. 


“그래 어차피 지금의 내가 과거로 가 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러니까 당신이 금광좌를 써서 과거의 나에게 뭔 짓이든 해줘.”

“헤에.”


계획없던 와중 유일하게 준비된 말이었고, 이 제안은 신농의 구미에 상당히 맞아 들어갔다. 일단은 재미 면에서. 여와가 수없이 부수고 새로 만드는 짓을 보지 못한 지 몇 천 년. 앞으로 영원히 없을 자극.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신농은 웃었다. 매뉴얼같은 미소 지을 때보다는 즐거워보였다.


“하하, 머리 좀 썼다...?”


그는 짤막하게 박수를 쳤다. 소리가 나지 않는 박수였다. 그뿐이랴. 황천화를 아주 기특해 했고, 대견스러워했다. 그 꼴이 고까워서 황천화는 하마터면 때려 칠 뻔 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슈퍼보패의 책임감이야 막중하고 무겁지만 기왕 꺼낸 것, 신농은 그걸 헛되고 가벼이 쓰기로 했다. 황천화 열심히 머리 쓴 게 기특해서라도 협조할 마음이 생겼다. 어차피 여기는 지구인들의 땅이었고 말이다. 지구의 생명이 원한다는데 해주지 못할 것도 없지. 결국 그는 이 별의 운명을 주물렀던 외부 존재로서의 애프터서비스 정신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이미 한번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던 거 알아?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배포를 크게 쓰는 와중에 예의상 경고는 했다. 그만큼 시간 움직이는 건 큰일이었다. 사불상이 이 일로 얼마나 많은 욕을 하고 울었던가. 아직 황천화 귀에 쟁쟁히 남아있었다. 


“그 정도는 알아. 절대 그럴 일 없어.”


황천화는 확언했다. 신중함을 약속했다. 질서와 건드리면 안 될 것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 또한 이래봬도 신인 것이다. 그럼에도 신농은 팔짱을 꼈다. 조금 생각했다. 조금이라고 했지만 시간은 별 의미가 없어 숙고의 시간 동안 해가 천천히 기울었다. 이제 햇빛은 그늘을 뚫고 황천화의 눈꺼풀 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신농은 이지러지는 햇빛의 조각들을 보다 말했다. 그의 등장만큼이나 갑작스럽게 툭 내뱉어졌다.


“자, 그럼 이렇게 하자. 과거로 편지를 보낼게. 편지를 받고 뭘 할지 결정하는 건 과거의 그대에게 맡기지.”


이 절충안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사불상의 공이다. 신농은 일전에 사불상이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방울방울 흩어지던 존재도. 편지만 하더라도 충분히 방향을 틀어버릴 수가 있다는 걸 이미 겪어봤다. 지금 보니 한번쯤은 겪어볼만한 괜찮은 교훈이었다. 당한 사불상은 억울하겠지만.  


“좋아. 한 번 해보자구.”

“이제 어떻게 되나 볼까나.”


신농이 본격적으로 금광좌를 꺼냈다. 팔꿈치를 정중하게 굽혀 가면서. 애프터서비스에 대해 잘 모르는 황천화는 신농의 제스처가 꼴같잖게 젠틀하다고 생각했다. 비꼴 뻔도 했으나 그보다는 편지 쓰는 것이 더 급했다. 마침 들어오는 햇빛을 벗삼아 썼다. 그는 오래도록 편지를 썼고 그 대부분은 반성문이라고 할 만 했다. 과거에 대한 모든 반성문들은 대개 그러하다. 너무 바빠서, 그땐 몰라서. 후회할 줄은 모르고.  









02



편지는 곱게 두 번 접어 봉투에 봉했다. 봉투 겉면에는 황천화의 이름을 썼다.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존재감이 희미한 자들이 하려니 그마저도 녹록치 않았다. 손발 전부 동원해가며 꽤나 애를 먹고서야 겨우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금광좌가 편지를 쑥 빨아들였다. 종이봉투는 기괴한 모양으로 틀어지고 둥글게 말려 원통모양이 되었다가 일순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곳이 아닌 다른 어느 시간대로. 황천화는 이미 손떠난 펜팔이라도 바라보듯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금광좌를 바라보았다. 편지가 어디로 가는지, 제대로 도착할런지는 알 수 없었다.


“행운을 빌어.”


신농이 빈말인 듯 인사치레를 했고 황천화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함께 있을 필요도 없어 보여 둘은 그대로 헤어졌다. 하나는 남았고, 하나는 떠났다. 남은 신농은 황천화 사라지는 길을 오래고 배웅했다. 그 등이 안 보이고도 한참을 더 지나서야 겨우 입을 떼서.


“도둑이야~~~~~”


착실하게 신고했다.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가 산을 뒤흔들고도 한참을 울려 퍼졌다. 협조는 협조고 신고는 신고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도둑이야 도둑이야이야이야. 존재 없는 소리는 멀리멀리 메아리쳤다. 존재 없고 부피 없는 소리를 들을만한 존재는 하나 혹은 둘 뿐이다. 


시조 찾아 한참 애먼 곳 쑤석거리고 있던 태공망이 메아리를 듣고선 왔다. 그야말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니 딴 것도 아니고 도둑이이라니 경기 일으킬 만도 했다. 가장 우려했던 일 아닌가. 그게 그렇게 걱정돼서 금광좌 안부를 찾았던 건데. 발부터 굴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찾지를 말걸 그랬다. 무슨 체호프의 총도 아니고 등장하자마자 사고부터 빵빵 치는지.

그렇게 급하게 가는 와중에도 왕천군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서 와중에 또 억수로 억울해졌다. 이걸 저만 들었겠나. 왕천군도 분명 들었을 텐데. 태공망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선 무시하는 거다. 확실하다. 복지는 왕천군만 누리고 있다. 이건 불공평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왕천군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 칼 같은 2교대를 약속받겠노라 태공망은 다짐했다. 

그러니까 일단 이번 일을 해결하고 나서. 전후 사정을 듣고 나니 꼬리가 슬며시 말리며 확실해졌다. 왕천군 찾을 게 아니라 저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다 내 탓이로다. 반은 이놈의 입방정. 반은 신농의 탓. 또 반은 황천화 탓. 도합 백오십의 잘못들.


“그래서 금광좌를 썼다고?”


오십의 잘못을 가지고 있는 신농은 여상하게 고개만 꺾었다. 한껏 친절하게 웃어보였다. 


“그렇게나 간절하게 말하는데 안 써줄 수가 있어야지…. 이봐, 복희. 우리는 자애롭잖아.”


‘우리’라고 복희를 한데 묶어버렸다. 시조고 자시고 태공망은 얘랑은 같이 묶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무슨 학교 동문이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자애는 개뿔이다. 시조들이 그렇다. 그들의 기치는 여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큰일 일어나지 않는 이상 먼발치서 팔짱끼고 방관하는 존재들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동시에 온갖 방종을 나 몰라라 한다. 이 같은 방관을 자애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금광좌를 써 줬다고 했지만 다 즉흥이겠지. 그 밑바탕에는 복희가 있다. 

복희는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소, 최대한의 보험이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손 놓고 일 벌리는 걸 돕긴 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을 경우를 대비한. 신농만 해도 당장 복희부터 불러놓지 않았나.(여기서 태공망은 저도 오십의 잘못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잊어버렸다.) 낙관적인 건지, 조심스러운 건지. 어느 쪽이라 해도 태공망 입장에선 영 내키지 않았다. 


“이보게…. 바빠 죽겠는데 내가 지금 그놈까지 쫓아야겠냐.”

“과거로 가게? 뭐, 당장 보내줄 수는 있는데. 거기보단 일단 지금의 범인 잡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아.”


손바닥을 통 쳤다. 그건 껌이다. 신농이 황천화를 놓아주지만 않았어도 더 껌이었겠고. 




껌이라 공언했던 대로 황천화는 금방 잡혔다. 예상보다도 더 쉽게 잡혔는데 바로 신계로 돌아가지도 않고 인간계 한복판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터였다. 사람 많은 번화가였다. 잡다한 물건 파는 가게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리의 끝부터 끝까지 한 쪽 도로변의 가게를 전부 훑고 나면 반대편으로 건너가 또 가게마다 고개를 들이밀었다. 인간계 바람 하나는 제대로 쐬고 있으니 원시천존에게 거짓말은 안 한 셈이다. 전자제품을 파는 가게에서 입맛을 다시고 식당에 들어가 메뉴와 가격을 하나하나 골똘히 읽어 내렸다. 슈퍼 신선코너에서 토막 난 무의 단면에 귀를 가져다 대고선 소리를 들었다. 행동과 목적은 하나도 맞지 않았고, 아귀에 들어맞지 않아 그는 군중속에 혼자 외따로 덜그럭거렸다. 딱히 재미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는 반은 관성으로 아무짓거리나 마구잡이로 해댔다. 어떠한 목적조차 남지 않은 얼굴, 그야말로 길 잃은 어린양이요, 영혼이었다. 더 이상 봐주기 힘들 정도로.


“이놈시키.”


태공망은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영혼을 급습해서 목덜미를 잡아채고, 산 위로 질질 끌고 왔다. 황천화가 신농과 헤어진 지 만 다섯 시간 만이었다. 별안간에 덜미 채인 황천화는 놀라지도 않고선 씁쓸하게 웃었다. 잡힌 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이고, 여기서 잡아주는 거 사숙밖에 없네.”


신농이 제대로 뻥을 쳤거나 태공망이 시조로서의 성질 상당부분을 잃어버렸음이 분명하다. 시조들이 자비롭다니, 태공망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다. 우악스럽게 고쳐 잡았다. 그 와중에도 힘에 부쳐 태공망은 여러 번 씩씩거렸다. 사불상을 몰아쳐 올라가는 것이 마치 폭풍 같았다. 황천화는 폭풍에 그대로 쓸려 올라갔다. 얌전히 팔다리를 놓고선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것도 좋다고 실실 웃었다.


“진짜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그대가 제일 많이 치는 거 알지.”

“몰라.”


딴청피우는 뒤통수가 쥐어박고 싶게 얄미웠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황천화가 되지도 않는 미란다의 원칙을 주절주절 외웠다. 필요한 부분만 말하고 싶었는지 끝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일단 외는 걸 보면 저가 범죄자라는 걸 시인하는 꼴이다. 그 와중에 또 변호사는 찾는다. 변호사라고 누가 서겠나. 기껏해야 신농이나 서겠지. 


“야, 이 자식아. 그래서 뭔 사고 쳤어.”

“나는 안쳤지. 과거의 누군가라면 또 모를까.”

“협조 모르냐, 협조.”

“인간적으로 짜장면이라도 시켜주고 얘기하자.”

“어디서 본 것만 많아가지고….”


전등만 있으면 딱 좋겠군. 구경하던 신농이 중얼거렸다. 신농 말마따나 문답은 취조에 상당히 가까워졌다. 허나 황천화가 대답의 대부분을 묵비권에 기댄 탓에 태공망이 얻어낼 수 있는 정보는 희박했다. 시간을 두고선 잡담만 무한정 길어졌다. 잡담도 그냥 하는 것만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건질 만한 게 적었다.

   

“아니 슈퍼보패를 써 놓고도 이건 왜 아직도 혼백체지?”


이 얘기 저 얘기가 다 튀어나왔고, 태공망도 하 답답하여 한 소리했다. 여기에 황천화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러게?” 


의외인 얼굴이었다. 생사까지 바꿔본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사숙은 내가 과거를 바꿔서라도 살기를 바라?”


눈은 얼굴을 보고 마음을 꿰려 한다. 진심을 엿보려는 듯. 


“…….”


이럴 때만 진지하게 군다.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누가 누굴 캐려 하는지. 협조도 못 받고 있는데, 괜한 진심까지 내보여줄 순 없다. 심리전이라면 자신 있었다.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아직 황천화가 거기까지 맞먹을 깜냥은 못됐다. 그도 아는 모양이었다. 암만 봐 봤자 눈앞의 한 길 사람 속 오리무중이라는 걸. 진지한 얼굴이었으나, 곧 풀어졌다. 이래되든 저리되든 관심 없다는 둥, 팔짱을 꼈다.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등줄기가 휘어졌다.  


“뭐, 그래도 재밌었긴 했겠다.”

“예끼! 이놈아. 이게 장난으로 할 일이냐.”

“…”

“근데 어째 그대로네.”


그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황천화의 생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여전히 높았다. 지평선은 저기 멀었다. 천지개벽은 일어나지 않았고 세상은 있던 그대로였다. 태풍을 불러올 나비는 날갯짓조차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화롭지 않은가. 태공망이 신농을 돌아보았다. 어찌된 일이냐는 소리였다. 신농이라고 해줄 답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깨만 들어올렸다. 


“직접 가서 뭘 한 게 아니고 편지를 보낸 게 다니까. 나머지는 과거에게 달렸지.”

“편지 어디로 보냈는데?”


일은 범인수색 전으로 되돌아간다. 이러나저러나 일이 과거에서 벌어지는 이상 과거로 가야만 했다. 


“.......”


신농이 대신 대답했다. 곰곰이 생각하며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그건 어떠한 년도와 날짜가 아니었다. 


“그대가 지나가던 길, 나와 접촉할 수 있던 거리 중 가장 가까웠을 곳. 그렇게 계산하면 아주 많지는 않아. 여기서 보낸다지만 아무래도 그 쪽이 좀 더 쉽게 보낼 수 있어서.”


낭랑하게 하는 말은 리듬을 탔다. 손가락은 리듬을 타고선 신명나게 접혔다. 하나, 둘, 셋…, 계속 접혔다. 금방 한 손으로 모자라졌다. 한둘이 아니라는 소리다.


“많지가 않아? 장난해??? 설마 그거 전부 접촉한 건 아니지?”

“어차피 면대면 접촉도 아니었는걸…. 편지 하난데 뭐. 쉽지.”


아이고, 두야. 태공망은 눈앞이 깜깜해 주저앉았다. 이미 사불상은 통곡이다. 쉽다, 쉬워. 일 벌리는 건 쉽다. 치우는 사람만 어렵다.  


“이 자식은 왜 신고를 했담? 자기가 다 줘놓고선?”

“나는 자애롭잖아.”

“저, 저, 저.”


드러누워 삿대질을 해봤자 신농은 눈 하나 꿈쩍을 안했다. 양 손 내보이는 게 다다.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냐는 뜻을 담아서. 자애, 자비, 애프터서비스. 그저 하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신화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마모되어온 그에게는 그것밖에 남지 않은 양. 구전되기를, 그는 일찍이 인간들을 위해 온 독초와 약초를 씹어온 신이다. 황천화는 인간들의 구전이 아주 틀리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제 발이 저려서. 신농만 한참 책을 받고 있지만 편지를 여러 통 보내게 된 건 다 황천화의 안이다. 괜히 반성문을 오래도록 쓴 게 아니다. 




다섯 시간도 더 전으로 되돌아가보자면, 신농이 편지를 보내자 했더니 황천화가 손을 멈추고 잠깐잠깐! 외쳤더랬다. 


“편지란 말이지?”


종이를 마구 늘어놓았다. 딱히 대고 쓸 만한 곳이 없어 죄 땅에 펼쳐놓았다. 엎드려 쓰기 시작했다. 글씨가 마구 삐뚤어졌다. 

웅크린 등을 신농이 질리게 내려다보았다. 대량의 편지에 그도 조금은 기가 차는 모양이었다. 펼쳐진 편지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눈이 이 편지에서 저 편지로 띄엄띄엄 건너뛰었다. 전부 읽고 난 감상이란.


“허…. 요즘 세상에선 이걸 스팸이라고 부른대.”

“….”


신농의 짤막한 감상을 황천화는 대차게 무시했다. 쓰기만 해도 바빴다.









03.



이미 벌어진 일, 엎질러진 물, 해결을 하긴 해야 했으니 추적의 때였다. 태공망은 비틀비틀 일어났다. 신농이 차곡차곡 접어가던 손가락만큼의 많은 시점을 생각했다. 그렇게 막막할 수가 없었다. 깜깜한 불확실성에 한숨부터 나왔다.

태공망의 한숨은 무시한 채로 신농은 기다렸단 듯 금광좌를 꺼내들었다. 슈퍼보패에 전신이 깜박하며 빛이 들어왔다. 도사린 몸체 속에서는 우우웅, 하고 엔진이 도사리며 떠는 소리가 난다. 그 자체로 생명같다. 살아있는 듯한 소리는 고동보다도 작게, 아주 낮고 고요하게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뛴다. SF영화에서나 볼 법한 숨죽인 구동이었다.


“그럼 어디부터 가야 할까나?”

“가장 오래 전이 어디야? 거기부터 바로잡아 가자고.”

“역시 그렇지?”


자고로 문제를 제거하려면 뿌리부터다. 태공망은 지극히 상식에 기대 얘기했고 신농은 대답하난 잘 했으나 뜸을 오래 들였다. 뚜들뚜들 잘 움직이던 손가락은 금방 멈추어 섰다. 다시 슬금슬금 움직였다. 느린 속도였다. 몇 칸을 더 움직이다가 또 멈췄다. 갈 곳을 잃은 손끝이 작은 원을 그렸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중얼거렸다. 


“아, 이거 헷갈리는데…. 그냥 최근부터 가면 안 될까.”


머쓱하게 돌아보는 얼굴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사소한 불편을 말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이게 스팸메일의 폐해다. 하도 여기저기 보내 놔서 가야할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요새 세상의 가전을 닮은 만큼 최신 이력은 남아있었으나, 대량으로 보냈을 때에는 하등 쓸데없는 기능이었다. 이력을 훑는 손이 무한정 계속 내려가기만 했다. 음…, 음…, 음….


“맞을래?”

“그래요! 주인님, 해버리죠!”


타신편이 절로 들렸다. 옆에서 사불상도 열심히 부추겼다. 투쟁이다! 주먹을 앙 쥐고선 흔들었다.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주먹이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매우 뿔이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있었던 과거로의 짧은 모험은 온순한 영수의 폭력성만 키워 놓았다.

이것 참 개판이군. 혼란한 와중 황천화 혼자서만 속이 편했다. 다 저가 빚어낸 사단인지라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이 개판이 조금이나마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혼백만 남은 자신이 편지 보낸 과거를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발목 잡아주는 것밖에는 없는지라.


“뭐야, 사숙 힘들어? 뭣하면 안가도 되고! 편하게 해!”

“너 일단 갔다 와서 두고 보자.”


물론 듣는 사람에게는 불난 집에 부채질로밖에 안 들렸다. 태공망은 이를 갈았다. 잔뜩 별렀다. 신농도 그렇고, 황천화도 그렇고, 저런 웬수들이 다 있나. 


“두고 보자는 사람 하나도 안 무섭더라!”


황천화가 비웃었다. 웃어봤자 혼백에서는 웃음소리가 안 난다. 울릴만한 통이 없어 메아리치지 않고 푸쉬식 빠져나간다. 담길 그릇이 없어 흩어져 버린다. 공허하기 그지없다. 그게 유령의 소리다. 황천화가 웃을 때만큼 그가 혼백임을 절감하는 때가 없다. 그가 웃고, 말하고, 속삭인다. 무에 가까운 존재들 특유의 화법으로.     


“내가 바꾸고 싶은 과거가 뭘 거 같아?”

“내가 알 바인가.”

“부디 알 바 여야 할 텐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래, 혼백들 모두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울리지 않고 확산되지 않고 끄트머리에서 흐트러지는 목소리가 쎄하게 뒤통수를 간질거렸다. 


“아, 찾았다.”


그 순간, 신농이 스팸메일함 속 가장 오래된 발신 이력을 긁어냈다. 찾아낸 이후엔 일사천리였다. 가타부타 예고조차 없었다. 신농은 빠르게 속으로 연도를 읊었고 금광좌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사람 하나, 영수 하나 간단하게 빨아들였다. 여전히 소리라고는 낮고 고요한 구동음에, 바람처럼 공기 몇 줌 빨려 들어가는 게 다였다.   




사불상은 시간의 터널을 낮게 비행했다. 몇 번 건너봤다고 요령이 생겨 이제는 휘청대지 않고 제법 기류를 잘 탔다. 안정적이었다. 덕분에 태공망도 잠시나마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생각할 시간이라고 해야 할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팔짱을 꼈다. 떠나오기 직전, 황천화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잔상으로 남아 계속해서 뒤통수를 긁어댔다.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일어날 것 같았다. 


“쉽게 생각했나.” 


짧게 침음했다. 그가 예상하는 황천화의 가장 집요한 미련은 황비호였다. 황천화가 과거에 간섭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황천화는 분명 황비호의 생사를 건드릴 거라고. 황비호는 그런 존재였다. 혈육을 넘어선, 황천화 삶을 통틀어 가장 큰 목표였고 의미 그 자체에 가까운. 

그날 밤, 끝도 모르게 어둑하던 밤 길, 태공망은 조가를 등지고 듣던 잃어버린 말들을 기억한다. 아직도 모든 걸 기억한다. 쫓아가던 등이 사라진 후 길 잃어버린 허망함. 저 깊은 속으로부터 끄집어내던 마지막 진심들. 사라져가던 시간을 쥐고 외치던, 최후에 무언가라도 남기고자 하던 갈망. 그 정도의 강한 감정만이 몸이 죽고서도 몇 천 년을 썩고 썩다 못해 미련이 된다.  

다만 미아로부터 말미암은 집요함을 가엾다 하며 마냥 봐주기에 황비호는 너무나 큰 기점이었다. 넘어가고 넘어가는 도미노의 조각 중에서 상당히 큰 축이 바로 황비호였다. 그가 넘어가지 않는다면 다음 조각도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조각은, 또 그 다음은. 스스로가 퍽 정 없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절실함은 모두 당사자들의 것이다. 이미 당시를 지나온 지 한참이 지난 태공망에게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립다는 감정은 과거에 비누거품같은 막을 씌우고 과거의 현실감을 아련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현재로부터 유리하게 한다. 편리하게도.

황천화, 황비호, 문중, 주왕. 수많은 ‘만약’을 가늠하다 관뒀다. 어떻게 생각을 해 봐도 끝은 늘 정해진 종막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도 몇 번이고 달려 나가다 보면 한 번 쯤은, 하고 상상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황천화에게는 황비호가 그럴 것이다. 태공망은 그럴 바엔 차라리 황천화의 뱃가죽을 좀 여며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봤다. 황천화가 기왕에 무언가를 고쳐낸다면, 그렇다면. 생각만 해 봤다. 적어도 피를 질질 흘리며 진군하지는 않도록. 그의 엔딩이 예정대로 진행되더라도. 

‘사숙은 내가 과거를 바꿔서라도 살기를 바라?’ 

황천화가 물어봤었다. 그렇다고 말해주기를 종용하는 얼굴이었다. 글쎄, 어떨까. 집요하게 쳐다보는 눈도 없으니 솔직하게 답을 내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다, 였다. 그의 죽음에 왕천군, 혹은 복희, 혹은 태공망 자신이 관여했었던 것만큼은. 하지만 그게 비단 황천화의 죽음뿐이었겠는가. 그래서 조금만 바랐다. 정말로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라 내뱉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괜히 뱉어봤다가 진짜 소망이라도 될 까봐서다. 


“어쩐지 너무 익숙한데요.”


출구가 보였다. 사불상은 일전에도 봤던 익숙한 풍경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른어른한 풍경이 아무리 그 시대 생활상이 비슷비슷하다 해도, 지나치게 눈에 익었다. 불과 얼마 전에 보았던 지붕들, 정리된 길의 모습, 사람들의 이동. 사불상이 떠오른 심상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불안한 예감은 꼭 틀리는 일이 없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동시에, 라고 하기엔 다소 어폐가 있겠지만 수 개의 시간대에서 동시에 수많은 편지가 흩뿌려졌다. 배달부 없는 편지는 저 혼자 잘도 날았다. 바람을 타고 천천히 활강했다. 수신인은 각각의 시간대에 존재하는 모든 황천화였다. 몇몇은 다소 거꾸러지거나 밟히기도 했지만, 몇 통은 기어이 황천화 손 위로 안착했다. 많은 황천화가 손에 들던 담배를 꼬나물고선 편지를 펼쳤다. 짤막한 반성문을 읽었다. 그는 아직 반성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될 때라 그다지 와닿진 않았다.




“서기군요.”

“서기네.”


볼 것도 짱구 돌릴 것도 없었다. 둘 다 내려서자마자 깨달았다. 지난번에도 왔던 그 서기였다. 그보다는 앞선 시절이었지만. 조가를 향해 진군하기도 한참 전이었던 때, 아직 희창이 살아있던 시절. 빠르게 상황파악을 하자마자 의아해졌다. 황천화가 무언가를 후회해서 고치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간대가 아닌가.

여기가 서기건 말건 사불상은 냅다 숨부터 참았다. 손으로 주둥이를 틀어막았다. 괜히 과거로 갔다가 당한 일이 하도 많아서 조심스러웠다. 과거에서 배운 게 많은 하마다. 


“이젠 숨 쉬는 것도 무섭다구요.”


넋두리는 처절하기까지 했다. 무섭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고, 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꿀떡꿀떡 숨을 참았다. 괜한 한숨 나비 날갯짓이라도 될 새라. 그리고 이 모든 노력에도 부질없이 모퉁이를 꺾자마자 보이는 게 황천화였다. 신농이 함 솜씨 부리긴 했는지 셋은 기가 막히게 잘 맞닥뜨렸다.


“잘됐다. 하마잖아. 왜 그래?”

“내가 숨을 쉬어서 그래요! 숨을 쉬어서! 아이고! 아이고!”


사불상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했다. 콧구멍이 벌금벌금거렸고 양 손을 벌벌 떨었다. 별스런 일이라고 동네방네 티를 다 내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황천화 만난 것보다도 사불상 진정시키는 게 더 큰일이었다. 

유난에 유난을 떤 것이 무색하게도 황천화는 태공망을 못 알아봤다. 당연하게도 저가 아는 그때 그 사숙, 저가 원래 알던 그 하마인줄만 알았다. 마침 사불상을 찾고 있었는지 반색했다. 


“찾았잖아. 하마. 하나만 도와주라.” 


반쯤 혼이 나간 와중에도 사불상은 꿈결처럼 대답했다. 그래요. 저 위에 올라가서 말이죠…. 하마 아니라니까요…. 얼굴은 파리했지만 말대꾸는 자판기처럼 자동으로 톡톡 튀어나왔다. 속으로는 그나마 그때처럼 삼자대면 안 해서 다행이지, 하고 위안하는 게 빤히 보였다. 짬만 차가지고는 몸에 배인 능청도 재주다. 보던 태공망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견해서인지, 이만큼이나 요령 있게 큰 게 서운해서인지. 눈앞에 닥친 일이 급해 감상은 토막을 쳐 삼켜버렸다. 태공망도 끼어들어 눈치 빠르게 기가 기인 척을 했다. 한편으로는 맹렬하게 지금 과거의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허나 그게 몇 천 년 전 일인데 생각이 날 리가 있나. 팽글팽글 헛돌기만 했다. 당시의 행동 루틴이라면 특이할 만한 게 없었을 텐데. 제발 주공단에게 개 털리고 있어라, 신이시여. 있지도 않은 종교를 찾았다. 당시는 저들이 곧 신이었으니 과거의 자신에게 매달리는 셈이다. 다행인지 신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고 실제로 태공망은 주공단과 책상머리에 앉아 대화중이어서 결과적으로 이놈은 누구입네 하며 보패 들고 설치는 사단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불상은 성인이 되기 전 순수하고 착했던 저처럼 구느라고 건성으로나마 황천화가 부탁하는 잔심부름을 다 해주었다. 행동거지는 꽤 그럴싸했다. 자꾸만 태공망 옷자락을 끌고선 빠져나가고 싶어 했지만. 무수한 탈출시도는 태공망이 못 본 척 뻗대고 버티는 바람에 죄 무위로 돌아갔다. 한숨 푹푹 쉬며 태공망을 흘겼다. 당장이라도 말 많이 안 섞고 그래 수고해, 하면서 자리 뜰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놈의 주인님이 자꾸만.

원래 황천화와 태공망이 그렇게까지 다정하게 대화하며 오래 붙어먹는 사이는 아니었다. 사불상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새삼스레 살갑다. 말을 유독 길게 끌었다. 정작 들어보면 잡담만도 못한 헛소리들이었다. 도사들 낚시 가서 월척 낚아 회 쳐 먹자는 식의 속 빈 강정들만 주고받았다. 태공망은 뭐 달라진 것 없나 황천화 의중 살피기에 바빴고 황천화는 황천화 나름대로 또 무슨 생각이 있는지 팔짱낀 채 태공망을 빤히 보고 있었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꿍꿍이를 품고선 느긋하고 팽팽하게 서로가 서로를 수색했다. 물론 태공망이 더 능숙했다. 별 쓰잘머리 없는 말이나 주워 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챘다. 이쪽이 한 발 늦었구만. 


“그걸 또 어떻게 안대요.”

“척하면 척이지.”


사불상과 둘이서 쑥덕거렸다. 황천화가 이미 편지를 받았다. 그렇다면 괜히 들쑤셔 의심 사느니 물러가는 게 나았다. 태공망은 사불상이 잡아끄는 대로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반색하는 영수의 얼굴을 손으로 짓누르며 짐짓 주공단을 찾았다. 허구헌 날 주공단과 같이 성내를 쏘다녔으니(사실은 지금도 붙어 있었다.)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황비호 보면 내가 좀 찾더라고 전해주고. 자리를 뜨면서 품안에 있던 접힌 종이를 흘렸다. 멀리 떨어져서야 사불상이 벌렁벌렁한 가슴을 잡고선 축 늘어졌다. 태공망이 그 위로 드러누웠다. 발을 까닥거렸다.


“이거 두 번은 못해먹겠어요.”

“두 번? 돌아가는 꼴이 두 번 가지고는 택도 없겠는데.”


낭패다. 비보였다. 사불상은 몸서리쳤다.  


“이 무능한 도사야! 난 안 가! 이제 당신 혼자가요!”


황천화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부디 알 바여야 할 텐데. 아, 어쩐지 뒤통수가 쎄하더라니. 예상은 뒤집어졌다. 편지를 쥔 황천화의 반응이나 시기를 봐선 아주 작고, 사소하고, 소소한 사건일 거라는 확신이 왔다. 세상에 산재한 그런 종류의 문제 중 후회를 야기하는 것이라면 태공망이 아는 건 단 한 가지 뿐이다. 연애문제다. 이 난리를 치고 한낱 연애문제라는 걸 알게 되니 정말로 돌 것만 같았다.




태공망이 모른 척 떨군 종이는 황천화가 주웠다. 펼쳐보았다. 아무 내용 없는 빈 종이였다. 


“이건 뭔 장난이지?”


주머니를 뒤져 똑같은 모양의 종이를 꺼냈다. 태공망이 짐작했듯이 황천화는 이미 편지를 받았다. 영 관심이 없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더랬다. 너무나 밑도 끝도 없는 얘기라. 황천화가 각 시간대로 보낸 모든 편지의 뉘앙스와 내용은 동일하다.


- 니 생각하는 거 뭔지 안다. 함 잘해봐라.


말은 짧고 거칠었지만, 황천화가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저의 얘기였기에. 상대와 목적과 내용에 대해선 오직 황천화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보자마자 구겨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장난치고는 질이 나쁜데. 지금 연애해 보라는 소리다. 누구랑? 지금 하마끌고 사라진 저 수상한 도사랑. 




황천화가 제 인생 전부를 통틀어 돌리고 싶은 순간이란 언제였을까. 어느 점의 방향을 회전시키고 전혀 다른 선으로 나아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결과를 보고자 했을까. 그가 고민하고 망설였던 문제가 이것 하나였을까. 아마도 그건 아니었을 거다. 그럼에도 황천화는 굳이 이걸 골랐다. 긴 긴 시간을 심사숙고하고 모든 확률을 계산한 끝에 단 하나를 골라냈다. 

서기의 황천화는 아직은 긴가민가하고 있었다. 반은 스팸취급 하기도 했고. 일단 먼저 말해두자면 편지 내용이 정말로 맘에 안 들었다고 해두겠다. 미래의 황천화와 과거의 황천화는 다르다.

간접적인 간섭이 힘든 이유가 이것이었다. 편지를 보내봤자 수신인이 진짜 해줄지를 알아야지 말이다. 과거의 자신인데도 이때의 황천화는 연애적인 면에 있서서는 영 못 믿을 놈이었다. 아직은 말이다. 미래의 황천화가 후회할지 말지도 모르고.


“하 맞다… 그때 그 새끼는 그랬지. 도움도 안 되는 새끼.”


황천화는 마치 남 인양 말하며 머리를 싸매 쥐었다. 신농이 미래의 황천화를 가만 달랜다.


“걱정 마. 내가 그래서 편지 많이 보내 놨잖아.”


어차피 뺑이도는 건 태공망이니까 다 괜찮다. 




태공망이 흘리고 간 종이는 일종의 떡밥이었다. 기왕 스팸이라면 더 많을수록 좋았다. 나무는 숲에 숨기는 게 답이고, 양이 늘어날수록 정보의 진실성은 희박해진다. 여기저기 흔해빠진 장난인 양 넘어가기 위해 태공망은 황천화 앞에서 철수하자마자 빈 종이를 사방팔방 뿌렸다. 당장 할 만한 일이라고는 이게 다였다. 휘휘 뿌리기만 하면 됐으니 사불상의 기준에서는 소일거리라 할만했다. 큰 일만 없다면 과거의 서기 구경도 꽤 재미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여유 있게 과거 구경한 게 처음이라 사불상이 중얼거렸다. 전쟁 전의 사람들. 왕조의 마지막에서도 버티고 섰던 숨통.


“평화롭네요.” 


과연 풍전등화였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미래의 그들의 기준에서도.









04.



한바탕 허위스팸을 뿌리고 나서도 둘은 말이라도 맞춘 듯 한동안 서기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는 얼굴들이 하도 많아서 먼 길로 휘휘 돌며 들킬 새라 몸을 수그려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담 아래와 나무 뒤, 지붕 위를 넘나들며 게걸음을 했다. 까치발로 움직이느라고 뒤꿈치가 잔뜩 일어섰다. 어디고 몸뚱이를 잔뜩 숨겨놓고 보려고 하니 자연스럽게 모가지가 쭉 빠져나왔다. 서기의 동쪽부터 서쪽까지를 보고 남쪽부터 북쪽을 돌아다녔다.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것의 면면을 두루 살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거리 풍경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신기루처럼. 낡은 극장, 먼지 쌓인 의자에 앉아 홀로 관람하는 영화처럼 그들만 침잠해 들어갔다. 삶의 소리가 그 위로 웅웅거렸다. 시대에 고정되어 흘러가는 사람들.


추이를 지켜보며 별 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둘은 마지못해 서기를 떠나왔다. 발걸음을 유난히도 질질 끌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눈을 떼기란 힘들죠. 미적지적 돌아온 이유에 대해 사불상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움을 덧씌운 과거란 정말로 아름답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틋해하고 어여삐 여기게 한다. 기억은 흐려져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라. 그게 까마득한 옛날일수록 더, 설령 자기 자신의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불상은 찰나였지만 이 일이 그렇게 나쁘지마는 않다고 여겼다.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미래로 돌아오자마자 태공망이 황천화 멱살을 잡기 전까지는. 바보같은 촌극을 보니 부유했던 현실감이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코를 때리며 박수를 쳤고 잔잔한 향수는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꿈을 꾸었구나. 그것도 아주 예쁜 꿈을. 사불상이 과거와 현실의 괴리에서 몸부림치는 동안 태공망은 당장 해야 할 일을 했다. 족을 쳐야 했다.


“뭐 하고 있는 건 맞는가.”

“이거 왜이러시나. 하지, 하지. 완전 하지.”


멱살 잡히자마자 황천화는 별 저항 없이 두 손을 들고 얌전하게 물러섰다. 신사적이기까지 한 그 모습은 황천화에게 스포츠맨십을 가르쳤을 그의 스승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쯤 아마 신계 어딘가에서 팔짱을 끼고선 하하하 웃고 있겠지. 그 도덕진군이 제자를 허투로 가르치지는 않았다. 예의 바른 몸가짐에 반해 하는 짓은 스포츠맨치고 상당히 조잡했지만. 지금도 봐라, 고분고분하게 든 양손에는 편지지가 나부꼈다. 종잇장들이 팔락팔락 흔들리며 정신 사납게 했다. 태공망이 뭐 얼마나 길게 다녀왔다고 그새를 못 참은 모양이다. 편지를 몇 장인가 더 쓰고 있었다. 끝없는 편지의 굴레였다. 아직도 더 할 말이 있는 건지. 다다익선이라는 건지. 뭐가 그렇게 많은 건지. 허튼 수작도 가지가지다. 편지는 그 자리에서 일괄 압수당했다. 태공망은 황천화 보란 듯이 눈앞에서 쫙쫙 찢었다. 까끌까끌하고 매몰차기가 사포같다. 손짓 하나하나 어찌나 매정하던지 황천화는 드러누워 떼라도 쓰고 싶어졌다. 우엥. 몇 천 년 전이었다면 저 가오에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몸도 죽었겠다, 수 천 년 몸 없는 혼 위로 쌓인 것이 철면피겠다, 이젠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땡깡에도 시의적절한 때가 있다. 드러누워 팔다리 휘젓는 것도 어린 것들이나 해야 귀여운 법이다, 이제와선 너무 늦었다. 나이를 수 천 살이나 먹어가지고 징그럽게. 어설픈 땡깡은 등이 땅에 닿을세라 걷어차여 시도조차 무위로 돌아갔다. 생전에 안 하던 짓이라 참 여의치가 않다. 이것도 해본 놈들이나 하는 것이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일 늘리지 마라.”

“왜, 맞잖아. 완전 한다고.” 


말과는 다르게 모가지 위는 가벼이 팔랑거렸다. 멱살 잡혀 흔들리는 모양새가 딱 방금 전 나부끼던 편지지였다. 그러다 태공망이 흠칫 멱살잡이를 멈췄다. 손이 물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바로 지금, 과거와 현재가 변했다. 미묘하게. 누적된 기억이 해체되고 갱신되어 다시금 조립되었다. 바뀐 태엽이 시침을 뚝 떼고 맞물렸다. 변화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정신차려, 하고선 양동이로 한가득 들이부었다. 마찬가지로 변화한 시간들을 받아들이던 황천화가 반색했다. 얼굴이 아이처럼 화악 밝아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그렇게 보냈던 많은 편지 중 한 통 정도는, 그 많은 황천화 중 한 명 정도는 답을 보낸 것이다. 역시 스팸을 뿌리고 볼 일이다. 물량에 이기는 장사 없지, 암. 

희비는 명확하게 갈렸다. 황천화가 만세 부르며 뛰는 사이(생전까지 포함해서 몇 천 년 이래 가장 기분 좋아 보였다.) 태공망은 일단 중요한 기억들부터 점검했다. 큰 사실로부터 세세한 것까지 되짚어 내려갔다. 도표가, 여와가 살아있는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전제가 살아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다음엔 현재 상황을 살폈다. 세계의 형태를, 봉신필드와 신계, 봉래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를 되짚어봤다. 손가락이 절로 턱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세계는 여전하고 그들이 머물던 산 또한 그대로다. 높이도 푸르른 우거짐도 여전하다. 산을 내려가 한참을 가야 겨우 나타나는 도시도 달라진 게 없다. 슈퍼 매대의 토막 난 무는 그대로 토막이 나 있고, 상점에서는 같은 유행가가 나온다. 신호등이 일사불란하게 색을 바꾼다. 황비호도 황천화도 주왕도 죽었다. 그들의 영혼은 신계에 있다. 평안하게. 도표는 사라진 지 오래다. 리셋은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머릿속을 헤집다 보니 혓바닥 밑이 축축해졌다. 땀이 벌금벌금 솟아났다. 큰 줄기부터 보느라고 나중에야 알아차렸다.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데 차마 피할 도리가 없어서 실눈 뜨고 조심조심 들여다봤다. 기억은 예상보다는 사소했고 기대보다는 처참했으며 세계에게 있어 미시적이었으나 개인에게 있어서는 거시적이었다.

글쎄, 연애를 했었다. 그랬단다. 누가 누구랑? 누가 따로 있겠나. 조작한 놈이 있고 조작 안 했어도 새로 기억 갱신된 놈이 있다면 그 두 놈이 쿵짝도 맞고 배도 맞았을 테다. 새콤달콤한 연애 경험 하나 기억 속에 뻔뻔하게 도사렸다. 잊고 방치하던 충치인양 방치했다 뒤늦게 찾아오는 고통처럼 몰려들었다. 스며들었다. 이렇게까지 습자지였나. 황천화가 사숙 좋다좋다 해서 그걸 냉큼 받아준 기억이 생경하면서도 어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제 뒤통수를 때린 것만 같아서 영 찝찝했다. 헛웃음이 다 나왔다. 


“허어….”


연애란다. 한 적이 없었는데도 한 것이 된 연애란 진짜 이상한 기분이었고, 경험이었다. 팔뚝에 닭살이 돋아 올라오려다가도 금방 말랑말랑해지기도 했다. 감정이 따라오지 못해 온갖 형태로 일렁거렸다. 황천화는 성공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어 아직 감이 잘 안 오는 모양인데, 일단 태공망으로선 그랬다. 딱 죽자, 혀 깨물고 죽자. 융합하자. 이 꼴 더 안 보고 살게. 온 세상에서 딱 단 둘만이 아는 변화였다. 그나마 그게 다행인가 싶다가도 어금니를 훑자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일 닥치고 나서 한숨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쉬는 숨마다 점점 묵직해져 아주 땅까지 꺼뜨릴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농만 태평하게 화를 돋웠다. 


“복희 숨 좀 살살 쉬어.”

“저, 저, 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느긋함이 그가 가진 미덕이자 처세술이었다. 선뜻 인정하고 쉽게 넘겨버리기 때문에 더 책하기도 힘들다. 아예 상대를 안 해야 속이 편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잊어버리고 말 섞기를 일삼는 건 일종의 정이다. 신농과 태공망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성공의 도취감을 꿀떡 넘기고 뒤늦게나마 상황 파악한 황천화가 뒷북을 치며 끼어들었다.


“슈퍼보패도 쓸 만하네. 이게… 가능하네…. 이게… 되네….”


좀 기가 차다는 듯 새로 생긴 기억을 여러 번 되씹었다. 다 저가 저질러 놓고선 새삼스러워한다. 이마를 여러 번 어루만지고 계속 입맛을 다셨다. 새삼 맛보게 된 연애의 맛이 퍽 신선해서이리라. 태공망 보기엔 질리게 사랑스러우면서도 딱 제대로 꼴뵈기 싫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이런 연애, 난 인정 못해.”


태공망은 순 결혼 반대하는 부모처럼 굴었다. 부모라면 다소 억울함이 들겠지만 본인이 반대한다는데 어쩌랴. 쯧쯧쯧…. 턱을 쓸고 혀를 차고 황천화를 있는 힘껏 흘기면서 여러 바퀴 맴을 돌았다. 꼰대 중에 개꼰대가 있다면 그 모습이 이러하리라. 꼬장꼬장하기가 하도 엄해서 황천화는 절로 가시방석에 앉았다. 저가 과거를 바꾸긴 했는지 의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연애에 대해서 잘은 몰라도 사귀는 사이끼리 매섭게 눈 흘기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자기야 섭섭하다, 볼멘소리 나올 뻔 했지만 괜히 한 소리 하다간 매를 벌 것 같아서 참았다. 


“이제 언제 언제인지는 대충 알겠어. 그래 한 번 해 보자고. 누가 이기나.”


예방이 아닌 사후약방문이 된 탓인지 전화위복인지 태공망에게도 새로운 데이터가 생겼다. 부디 알아야 할 텐데. 의미심장했던 황천화의 경고는 메아리만 남았다. 알게 해줘서 참도 고맙다. 팔을 걷어붙였다. 신농은 다시금 금광좌를 들었다. 비록 천성이 그래먹어도 나서야 할 차례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가 볼 텐가?”

“가 봐야지.”

“그래 사숙 잘 해보슈. 엔간하면 받아들이지 거.” 


배웅하면서도 황천화는 팔짱만 꼈다. 지금 상황이 꽤 만족스러웠다. 사숙 하는 일 뭔들 다 망했으면 좋겠다. 슬쩍 빌어 보았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을 허망한 기도였다.  

   



서기로 되돌아갔다. 저 높은 허공으로부터 떨어져 내려왔다. 화호초가 쓸고 갔던 성벽이 보였다. 한창 보수중이라 순 공사판이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셈이다. 편지를 보낸 사이사이의 텀이 매우 짧은 걸 보니 어지간히도 촘촘하게 보냈다. 사불상이 가이드북을 펼쳤다. 손가락이 더듬더듬 연표를 뒤졌다. 시간대별로 사건과 인명이 수두룩했다. 동화책 읽듯 낭랑하게 읊었다. 그건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 신농이 줬단다. 어쨌든 책이 생기니 상황파악은 훨씬 수월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사불상은 퍽 행복해했다. 사불상도 결국엔 이 짓거리에 익숙해진 것이다. 불쌍한 하마. 일어나봤자 한낱 연애문제인줄도 모르고.

동정심이라도 일었는지 태공망은 사불상에게 자유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사불상은 팔자에도 없을 우편배달부가 되어 빈 편지를 뿌리러 갔다. 신농이 보내는 스팸은 자동이지만 이쪽은 수동이다. 사불상도 과거의 사람 대하는 것보다는 편지 뿌리는 일을 훨씬 기꺼워해서 흔쾌히 종이를 한아름 안고선 날아갔다. 방법의 효용성이야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일전엔 황천화가 편지를 못 믿어서 넘어갔다고 치면 아마 이쯤부터는 슬슬 편지에 신뢰도가 올라갔을 테다. 반복되는 편지에 만사가 귀찮아져 한번쯤 따라줄 마음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애초에 골라내서 버리면 그만일 빈 편지만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이 사단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태공망은 간단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최고의 계획은 단순할수록 좋다. 중간에 가로채기로 했다. 편지든 고백의 순간이든 가로채기만 한다면, 이 썸은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태공망은 마냥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그나마 황천화 연애 상대가 자기 자신이라서 다행인건지. 


황천화가 잘 썼다며 귀마개를 돌려준다. 그것을 까마득한 미래의 태공망이 받는다. 장난감같은 귀마개 한 쌍.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다. ‘빌려준다’ 했었지. 그가 까마득한 미래의 태공망이니만큼 체감하기론 멀고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돌려받지 못했었다. 황천화도 반납하는 걸 까맣게 잊어버려 그보다도 훨씬, 훨씬 더 시간이 지난 훗날 서기의 짐을 정리할 때쯤에서야 무심하게 툭 굴러 나왔더랬다. 그러니까 이건 금광좌로 인해 바뀐 과거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말 붙여보겠답시고 핑계거리를 찾은 것이 분명했다. 뻔한 수작. 투명한 속내. 유치한 꼬드김. 모른 척 어울려 주고 싶어질 정도로 깜찍하다. 손바닥 한복판에 귀마개가 굴러가고 손끝이 닿았다. 지그시 누르고, 손톱을 세워 살짝 긁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체온에 손바닥이 다 화끈거렸다. 황천화에게서 이만한 온도를 느꼈던 것도 아주 오래전이다. 그가 슬쩍 운을 뗐다. 대여한 물건 반납하는 와중이라니 이 자식 진짜 분위기 더럽게 못 잡았다. 일차원적인 꾐에 넘어갔던 저는 호구였고. 하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앞으로 그 호구랑은 평생 연애 못 할 줄 알아라.


“있잖아, 사숙.”

“그대로 뒤 돌고. 직진. 쭉쭉 간다. 실시. 천상한테 가서 이 닦으라고 말해주고.”

“????”


황천화는 말을 그대로 따랐다. 홀린 듯 뒤를 돌아 트인 양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정작 주둥이는 안 따랐다. 태공망의 통수가 쎄하듯 황천화의 촉 또한 쎄했기 때문이다. 한창 태공망 말 안들을 때였기도 했다. ‘이 자식 지금 뭐 알고선 말 돌리는 거 아냐?’ 태공망 말은 일단 의심하는 게 좋았다. 게다가 그는 다소 울컥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바로 말을 거슬렀다. 곤륜의 선인 놈들 자랑이라곤 태공망 말 안 듣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 자랑스러운 면면에는 황천화 또한 포함이다. 미리 앞 수를 읽힌 듯해 비위가 팍 상했다. 이래서 책사라는 양반들은.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가래?     


“저기 나는 사숙 좋아하는 거 같은데.”


고백이 바로 밑도 끝도 없이 내리꽂혔다. 분위기는 하나도 안보고 순수하게 울컥해서 하는 소리였다. 현기증이 났다.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는 건 하나도 없었고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05.



한 차례 푸닥거리가 지나갔다. 세상 시끄러운 애들이 떠나고 나서야 사위가 조용해졌다. 괴롭지 않을 적막이 고요히 맴돌다 그마저도 사라져갔다. 다시금 혼백과 혼백도 아닌 어떤 것 단 둘이 남았다. 오로지 태공망 혼자서만 맘이 성급하고 바빴기에 태공망이 일처리 하러 간 지금, 나머지는 마음껏 한가해졌다. 어차피 기다리거나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터다. 신농이고 황천화고 손놓고 구름이나 헤아리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시간도 많은데 우리끼리 노가리나 까 봅시다, 했다. 즉석 담화회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차고는 앉았으나 고작해야 몇 시간 전 처음 만난 사이다. 서로가 데면데면한 터라 재잘재잘 화기애애한 수다삼매경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저 머리와 꼬리가 토막 난 말을 띄엄띄엄 던져가며 적당히 주고받는 게 다였다. 그러다 신농이 질문을 했다. 


“그런데 고백이라면 지금 해도 되잖아? 굳이 과거를 바꿔서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듣고 보니 굉장히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맞는 말이다. 황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한데 다 살아 있어야 맞는 말이다. 


“댁도 말했잖수. 몸뚱이도 없는 혼백의 고백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진심어린 고백이라면 심장에 가장 가까운 숨이 섞여야 한다. 혼백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서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혼백에게 고백이란 먼 나라의 일이고 별일이다. 연애는 살아있는 자들의 소유다. 꿈꾸는 것이 죄는 아니라지만 잠도 못 자는 유령에게 꿈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그걸 몰라요. 그래서 아직 살아있는 황천화에게 맡기는 것이다. 통째로. 


“아…. 그래서 과거 날조를 하시겠다?”


신농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알아들었다. 칼을 들고 심각한 부분은 덤벙 잘라내고선 나머지 부분만을 쏙 삼켰다. 황천화의 무거움은 신농에게 닿지 않는다. 농처럼 흘러간다. 황천화는 그래서 신농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에든 여상하고, 태연자약하다. 제깟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숙 펄쩍 뛰는 걸 보면 얼마 못 가겠지만….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근데 그게 그렇게 싫은가? 너무하다, 너무해.”


상대가 신농이라 넋두리도 쉽게 나온다.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말만 그랬다. 금방 사라질 일이라고 해서 그다지 미련 철철 넘치는 얼굴은 아니었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이 정도다. 그런 것 치곤 금광좌를 너무나 열심히 찾지 않았는가, 싶지만 신농은 이 또한 덤벙 덜어내고 삼킨다. 그의 경험 상, 이는 파고들지 않는 게 좋다.  


“고작 이런 일에 슈퍼보패의 힘을 빌리다니 간도 크구만.”

“아이고. 이거 미안하게 됐습니다요.” 


역시나 말말 그럴듯하지 전혀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예, 예, 예. 아랫입술이 쭉 늘어났다. 황천화는 죽어서도 별로 천성 안 변한다. 신농은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을 보고도 여상하게 넘어갔다. 그럴만했다. 귀엽지 않은가. 작은 욕망 하나로 인해 아둥바둥한다는 것이. 


“됐어. 이 땅의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니까.”


황천화는 지금의 이 시간을 최대한 오래 곱씹어 보기로 했다. 바뀐 과거는 쌓인 기억을 통해서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연애의 기억 또한 그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제 기억이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낯간지러운 게 끝내주는 멜로드라마 같다고 생각했다. 곰곰이 떠올려보다가 오 분만에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멜로드라마는커녕 로맨스코미디 근처에도 못 간 시트콤이다. 그렇게 마냥 아름답다거나 이상적인 연애는 아니었다. 다른 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짓이니만큼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납득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이런 걸 하고 싶었었구나. 이런 게 하고 싶어서, 수 천 년 동안을 참고 기다렸구나. 

단지 많은 무리 속 우연이라도 마주칠 때 눈웃음 짓는 걸 보고 싶어서. 지나칠 때 손등이라도 슬쩍 마주쳐 보려고. 아무 사고나 핑계 없이, 내키는 대로 안아봤으면 해서.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참 그 짧은 시간에도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서 연애를 했다. 아주 소박한 소망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고작 이런 걸 하고 싶어서. 고작에 불과했던 작은 소망이 그렇게나 큰 미련이자 집착이 되어서. 안기는 어깨와 등뼈를 기억했다. 마디마디의 굴곡을 따라 손가락이 차근차근 굴러 내려갔다. 목 뒤로 코를 파묻었다. 코 밑의 살내음이 바로 어제 일인 양 생생했다. 손끝에 온기가 당장이라도 만져질 것만 같았다.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원혼이었다면 한 풀고 승천이라도 했겠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과거는 바뀌고 있었다. 아, 지금 막 가장 아름다운 연애의 기억이 날아갔다. 타들어갔다. 가루가 되고, 흩어져서 영영 없을 일이 되었다. 기억을 세고 있던 황천화마저 까맣게 잊어버렸다. 미래의 태공망이 한창 과거의 황천화를 대차게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욕을 하고 무안을 주었다. 갈 길이 먼데 쓸데없는데 한 눈 파는 무능한 부하직원 취급이었다. 와우, 사숙 화끈한데. 혼잣말했다. 저 나름대로 시청하던 신농이 동의했다. 오호라. 이거 재밌는데.


“꿈도 꾸지 말고. 인석아. 자네랑은 연애 안 해. 절대로.”

“엑.”


의외로 황천화에게 타격은 적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멀찍이 물러섰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긴 했으나 받은 무안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그럼 그렇지. 낚였네, 낚였어. 정도의 반응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담배를 물고 뻑뻑 불어댔다.


“미친 척 하고 어울려 줬더니. 대체 편지는 어느 놈이 보낸 거야?”

“누구긴 나다. 이 자식아.”


답은 먼 미래로부터 날아왔다. 신농의 시청에 합류한 황천화가 화면에 손가락질을 하며 훈수를 뒀다. 과거의 황천화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미래의 황천화마저 과거의 자신을 책한다. 오. 신농이 감탄했다. 이거 해설위원으로 쓸 만했다. 캐스터가 있고 해설위원을 구했으니 새롭게 중계석이 짜이는 순간이었다. 둘은 허리를 굽혀가며 정중하게 악수를 했고 자리에 차고 앉아 새 직책에 전념했다.




다시 기원전 서기로 되돌아간다. 황천화가 태공망에게 거하게 면박 받아가며 차였던 고백 나부랭이의 그 즈음에서는 멀지 않다. 나름 실연이랍시고 대충 추슬려놨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황천화는 세 번째 편지를 받았다. 하늘에서 편지가 홱 떨어졌다. 마치 집어던진 것처럼. 편지는 풍랑에 날아 공중제비를 돌다가 세차게 따귀를 때리고 얼굴에 들러붙었다. 어푸푸. 문책하는 듯 과격했다. 신농은 스팸을 스팸답게 보냈다. 마구잡이로 보냈다는 얘기다. 가지가지 한다. 황천화는 거칠게 편지를 뜯어냈다. 두 번 접힌 종이조각. 예의상 펼쳐만 보았다. 더 볼 것도 없었다. 편지 내용이 지나치게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게 스팸이 아니면 무어냐. 시키는 대로 했었음에도 반복되는 편지를 받고서 알았다. 저번 고백은 아주 그냥 붕 뜬 거구나.(속된 말을 걸지게 덧붙였지만 중계하던 캐스터가 끊어냈다.) 그리고 이 편지가 앞으로도 더 많이 더 자주 오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예감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분명 자신이 태공망에게 제대로 먹힐 고백을 할 때까지 올 것이라고, 그는 편지의 의도를 막연하게 이해했다. 발을 뒤로 물러봐도 퇴로가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일이 귀찮아졌다. 혀를 찼다. 편지는 그대로 구겨 휙 던져버렸다.


여기서 황천화의 나쁜 버릇이 나왔다. 물론 발신인도 의도한 것이겠지마는. 이 버릇에 대해서 평하기를 황천화는 원래 내가 좀 그런 타입이지, 라고만 말했고 태공망은 아주 못된 버릇이라고 말했다. 구석에 몰리거든 으레 그랬다. 더 이상의 생각은 집어치웠다. 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놈의 생각이냐. 옷도 어울리는 놈이 입을 일이고 적어도 장고는 내 옷이 아니다. 뒷일은 이제 모른다. 모든 계산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말이 좋아 배수진이지 그저 내일이 없이 막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움직이기만을 위해 사고는 최대한 심플해졌다. 목적은 단순해지고 수읽기는 멈추었으며 말단의 반응이 판단을 대신 맡았다. 기본적인 본능에만 의지한 조악하기까지 한 행동양식이었다. 그럼에도 방향만큼은 틀린 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본능이 훨씬 나았다. 본능이 키를 잡았을 때 절대로 틀리지 않는 것, 이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황천화는 좀 더 거침이 없어지기로 했다. 앞으로도 고백이 안 먹힐 거라는 걸 깨달은 건지 어쩐 건지. 어차피 안 될 거니 편하게 막 나가보자 싶은 것이다. 손해나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황천화다웠다. 그리하여 고백은 예사 아름다운 매체들로부터 한 발짝 비껴나가 소위 안부인사에 가까워졌다. 황천화는 되든 안 되든 일단 던져나 봤고 그걸 넘어서 마구 남발하기 시작했다. 눈 먼 돌에 개구리만 맞아죽는다. 태공망이 그 짝이었다. 


“어이. 사숙 사귈래?”

“이놈이 진짜 미쳤나.”

“왜.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짜게 굴지 맙시다. 사귈래? 사귀자, 사귀자, 사귀자. 한 번만 사귀자. 그리고 별로면 차든가.”

“손해가 없을리가 있나? 완전 손해지!”

“그럼 딱 삼일만! 해보고 그래도 아니올씨다면 반품무료!”

“이게 무슨 홈쇼핑인가? 왜 이래? 구질구질하게!”


피곤해졌다. 어미마다 사귀자를 달고 다니게 생겼다. 황천화가 대놓고 나와서 태공망은 도리어 당황했다. 그래가지고 퍽이나 받아주겠네 그려. 철벽을 세웠고 전방위로 난사된 고백들은 모두 무탈하게 튕겨나갔다. 말꼬리를 잡고선 빙빙 돌려 버리면 화제는 조금씩 중점에서 엇나가게 되어 있다.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공망은 점점 이 시간대의 태공망이 있을 법한 곳으로부터 슬슬 멀어져갔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외곽을 돌고 돌았다. 황천화의 눈에는 사람들 앞에 이 꼬락서니 보이기 껄끄러워 피하는 걸로 보일테다. 그 정도 자연스러움이면 충분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스스로가 장했다. 

과거의 나 힘내라. 지금 이 새낀 미래의 내가 커버할께!

들리지 않을 메세지를 외친다. 안 그래도 이 시기의 자신은 바쁘다. 마음에 돌 얹어올릴 일은 만드는 게 아니다. 


고백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느냐? 약간은 그렇다. 일종의 공식이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황천화가 고백을 하면 태공망은 받아주게 되어있다. 그래서 황천화가 고백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는 것이다. 차라리 때가 엇갈려 후회나 하는 쪽이 나았다. 일이 그렇게 되기를 태공망이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 기어이 그리 되어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황천화는 아마 모를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정말 고백을 들으면 그럴 것 같아서 태공망은 황천화의 고백을 기를 쓰고 막고 홀로 덮어쓰고 만다. 과거의 자신이 들었다면 필경 사귀었을 것 같아서. 그는 미래의 태공망이었고 아직 그 모든 과거를 완전히 고치진 못했으니 몇의 기억은 남아 있었다. 그중의 어느 황천화는 분명 고백했을 테고 태공망은 받아 줬을 것이다. 황천화에게도 그랬겠지만 정말로 달콤했다. 멋진 꿈이었다. 자네도 노력했구먼. 앞으로 다 쓸어버릴 예정이지만. 한낱 연애를 가엾게 여기기엔 앞으로의 저가 더 가여워질 것 같아서 말이다. 








06.



여와도, 복희도, 신농도 그리고 이 땅 어딘가에서 한창 잘 자고 있을 태상노군도 분기에 대해 말한다. 그간의 모든 것이 분기를 틀어쥐기 위한 싸움이었다. 분기는 ‘만약 그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로부터 출발한다. if는 기나긴 역사의 실선 위에 수없이 늘어서 있는 점이다. 산재한 점들은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방향을 바꾼다. 비록 인지하지 못할 미세한 각도더라도 시간은 무한정이니 그 끝으로 가면 어마어마한 차이로 벌어지리라. 여기에 약간의 수읽기를 더한다. 그럼 차이가 벌어지지 않아도 뻔할, 방향이 명확한 시점들이 한두 개쯤은 보이기 마련이다. 그것을 분기라고 말한다. 여와가 그걸 아주 잘 다뤘었지. 신농이 고개까지 끄덕이며 추억처럼 말하는데 그렇게까지 쉽게 말할만한 건 아니다. 지는 아주 융합만 했다 이거다. 태공망은 입에 붙은 욕을 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 받는 건 왕서방이지. 옆에서 황천화가 똑같이 맞소, 맞소, 추임새를 넣었다. 어조가 어중띤 것이 당최 누구 역정을 드는지 모르겠다. 신농이랑 조금 붙어있더니 아주 똑같은 놈 다된 모양이다. 같이 어울리게 두는 게 아닌데. 잠깐 서기 다녀 온 사이 대체 무슨 모의가 있었는지 둘은 중계석까지 마련해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아주 부아가 치미는 장면이었다.


“지금 놀 기분이 나요?!” 


사불상은 중계석을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고 양손으로 움켜쥐더니 그대로 뒤집어 엎어버렸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하루아침 집이 사라진 철거민마냥 나자빠졌다. 합판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보잘것없는 테이블은 영수의 헐거운 손짓 하나에도 훌렁 날아갔다. 열심히 만든건데. 들릴 듯 말듯 한 탄식도 함께 날아갔다. 그야 사불상이 알 바는 아니다. 참 잘도 날리는구먼. 태공망이 날아가는 소품 따라 먼 산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순 헛소리였다. 난장판도 여기까지 하고보면 잘 짜인 꽁트가 따로 없었다. 황천화는 원인이 태공망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태공망이 의도했든 아니했든 꼭 그가 끼면 분위기가 우스꽝스러워지곤 했다. 옛날에야 많이도 당황했지만 세월이 무상해 그에도 많이 익숙해졌다. 저 멀리 삼천포까지 나간 꽁트 돌려놓는 방법 또한 알고 있었다. 바로 흐름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선도들이 마이웨이로 자기 할 말들만 하고 살았었나 보다. 황천화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주저앉은 채 태공망 옷소매를 톡톡 잡아끌었다. 조르는 것으로도 보일만한 작은 손놀림이었다. 그제야 먼 산 보던 태공망이 눈을 돌렸다. 그렇게 없던 애교까지 써 가며 시선 잡아끌어서 한다는 말이.   


“나랑 연애하는 소감은 어때?”


명랑하게. 목소리엔 위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가락을 섞어가며. 태공망 놀리듯 말했다. 원하는 것 다 이뤄낸지라 싱글싱글 웃고 봤다. 어쩜 이렇게 시원스러울 수가 있을까. 과거를 바꾼 것보다 태공망 놀려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더 만족스러운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기회를 보았다 하면 놓치지 않는다. 입에서 쓴 맛이 돌아 태공망은 인상부터 썼다. 입천장 위로부터 뚝뚝 떨어지는 것들을 천천히 삼켰다. 이 사단이래 황천화 보거든 으레 입천장 위쪽부터 아려왔다. 고백해오는 황천화의 얼굴을 봐도 그렇고 지금의 황천화 얼굴을 봐도 그렇다. 그 와중에 절로 비교를 하게 된다. 그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누적한 변화를 당장 눈앞에 마주하면 참 새삼스럽기 마련이다. 과거의 치기 넘치는 얼굴과는 달리 지금은 여유가 넘쳐흘렀다. 정말 이런 걸 원했나. 고작 시시껄렁한 연애놀음을. 하고 생각하면서도 내친김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태공망이 과거를 전부 고치내지 않는 이상 어쨌건 그들은 사귀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심정의 나쁜 면만 빼고선 솔직하게 말했다. 황천화가 원하는 대로.


“어떻긴…. 자네가 아주 사랑스러워 죽을 지경이지.”

“에이. 좀 더 표현해주라. 애인인데.”


애정에 관한 흥정이 이루어졌다. 이 흥정에 관한 한 태공망은 지는 사람이었다. 황천화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일으켜주었다. 왕천군이 도망간 반쪽에 반쪽짜리라도 시조는 시조다. 영혼 잡는 정도야 손쉽다. 사랑스러워 죽겠는 자기는 얌전히 딸려 올라왔다. 도망갔던 황천화 잡아오던 것만큼이나 우악스런 손놀림이었지만 황천화는 아무 불평을 않았다. 그걸로 됐다. 귀밑머리를 넘겨주고 볼을 쓸었다. 엄지로 가볍게 문질러댔다. 귀를 잡아당겨 얼굴을 끌어오더니 입을 맞췄다. 톡 닿고 떨어졌다. 연인보다는 아이 어르는 듯 수더분하게 어루만졌다. 그 정도도 황천화는 마냥 좋았다. 깔깔깔 웃더니 태공망 허리를 붙잡고 좀 더 밀착해 끌어안았다. 체온을 느끼는 건 오랜만이다. 따끈했다.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온몸으로 봄을 안으면 아마 이런 기분이리라. 조금 더 깊이 닿고 싶었다. 손가락이 뿌리까지 맞물렸다. 


찬탄을 거듭했다. 이 맛에 연애질한다. 잘했다 잘했어. 과거의 나는 수작 거느라고 지금 죽을 맛이겠지만. 그는 현재에 취하기에도 바빴기에 과거의 자신을 모른 체 하기로 했다. 그 고생은 나의 것이 아니다. 한창 예뻐하다가 태공망이 황천화 뒷 머리채를 쭉 잡아당겼다. 컥. 턱이 들렸다. 태공망은 황천화 들린 목 바싹 아래 정수리를 대고 중얼거렸다. 여전히 얼굴에선 애정이 넘쳐흘렀다. 벙긋벙긋 웃었다.   


“어이구. 방심하지, 방심하지. 내가 정말 이거 뜯어 고치고 만다.”

“왜 사랑스러워 죽겠으면 고치지 말고 좀 놔둬보쇼.” 


머리채 잡힌 와중에도 황천화가 제법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말한다. 사랑을 하면 애가 된다더니. 황천화도 조르기만 늘었다. 


“예끼, 이놈아 안 넘어가.” 


그럼에도 말마따나 사랑스러워 죽겠긴 했다. 애인이라서. 아니, 아마 애인이 아니었더라도. 황천화는 그걸 모른다. 죽어서도 모른다. 모르니까 이런 일을 벌이는 거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누어진다. 좋은 일을 훗날의 황천화가 독식하고 있다면, 과거의 황천화는 나쁜 일들만 독식중이다. 때려치울까 하다가도 부정적인 기색만 느껴지면 귀신같이 편지가 떨어져 재촉하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편지 보내는 범인은 아직도 잡지 못했다. 오기만 남아 황천화는 답 없을 고백을 계속했다. 어디에 대한 오기인지는 그도 잘 몰랐다. 편지가 언제까지 오나 하는 오기인건지, 태공망이 언제나 받아주나 한 번 보자 하는 오기인건지. 무언가 한 가지는 끝이 나겠지. 그럼에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편지는 끝이 없이 왔고 고백할 때마다 마주하는 태공망은 그가 겪어 보지도 못한 차가운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숫제 운조차 띄우지 못하게 했다. 입이라도 달싹일라하니 허리에 황천상이 매달려 있었다. 태공망이 황천화가 아닌 황천상에게 말했다. 


“나타더러 상대해 달라고 하면 잘 놀아 줄 게야. 그 녀석 보패 고쳤더라고.” 


황천상에겐 세상 다정하게 말해 놓고선 곁눈으로 황천화를 흘끗 흘기기만 했다. 입꼬리 비스듬히 올려 씩 웃더니 그대로 지나갔다. 혓바닥이라도 날름 내민 줄 알았다. 어찌나 약 오르던지. 벌컥 화내기도 전에 황천화는 그대로 끌려갔다. 허리에는 황천상을 매단 채. 황천상이 형 가자, 하니 저의 의지가 아닌 다른 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이후로도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되자 황천화는 약간의 비속어를 섞어 생각했다. 사숙 이 새끼 밀당 개오진다고. 굳이 밀당이라고 생각한 것은 또 평상시엔 태공망이 다를 것 없이 황천화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꼭 심심하니 고백이나 해볼까, 하면 그랬다. 사람 떼어내는 솜씨가 장난 아니다. 아예 엮일 일 조차도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생판 다른 사람 마냥(우습게도 황천화가 느낀 게 틀리진 않았다.). 기가 막혔다. 


“프로네….”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감탄도 했다. 황천화는 간만에 태공망이 일흔을 훌쩍 넘긴 어른이자 동시에 모사임을 체감했다. 와, 나이 먹은 영감은 뭐가 달라도 달라.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연애 한두 번 해본 건 아닌 게 틀림없었다. 거 영감이라 봤자 백년도 차이 안 나는데 언제 그렇게 빨빨거리고 살았대. 여전히 생각에는 비속어가 섞였다. 그 큰일 다 겪어 놓고 다른 것도 아닌 꼴랑 연애에서 체감하는 것도 문제지만 뭐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감탄은 순전히 그의 자유였다. 이래서야 앞길이 깜깜했다. 더욱더 깜깜하게 할 요량인지 하늘에서는 편지가 떨어져 그의 시야를 가렸다. 집어 던질까.


황천화 눈에는 태공망이 참 쉽게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태공망 상황이 그렇지만도 않다. 태공망은 부지불식간에 2인 1역의 역할을 소화하게 된 셈인데 하나가 동의하지 않은 역할을 수행하려니 또 이게 나름 곤욕이었다. 과거의 자기 자신과 제대로 엇갈리면서 위화감은 없어야 했다. 한 술 더 떠 황천화는 심심할 때마다 수작질이었다. 하도 시시때때라 이미 태공망은 다시 한 번 금광좌로 오가며 은밀하게 행군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미래의 황천화 사후인생 연애질을 위한 초석인지도 모르고! 넌 그냥 미래의 너 자신한테 눈뜨고 당한거야. 태공망은 한 백 번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꿀떡꿀떡 역류하려했다.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 참는 거다. 




이번에는 태공망이 조금 일렀다. 이르게 온 김에 편지를 미리 가로채기까지 했다. 시점을 알았어도 종잇장 나는 것이 여간 종잡을 수가 없는 터라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태공망은 황천화가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나비처럼 날았다. 사불상이 말했다. 


“주인님 도둑놈 같아요. 하긴 늘 도둑놈 같았죠.” 


맞는 말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 안에 내려앉았다. 펼쳤다. 태공망이 읽으려니 영 모를 내용이었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화끈한 문장이라. 이런 걸 보고도 잘도 움직였구나 싶어 웃음이 다 나왔다. 그에게는 아직 연애의 관성이 남아 황천화의 별 것 아닌 행동도 귀여워하는 습관이 남아 있었다. 태공망은 이내 그걸 구겨버렸다. 

미래에서의 연애질을 떠올렸다. 알콩달콩 했었더랬다. 손잡을 때마다 황천화가 웃던 것을 기억한다. 태공망이 빼는 일 없이 순순히 내어주는 것 자체를 좋아했었다. 좀 더 오래오래 기억해야지. 앞으로는 없을 일이니. 그래서 열심히 잘게 찢었다. 최대한 잘게. 혹여 조각이라도 누구에게 보일 새라. 속이 다 시원했다.


태공망이 사전에 가로챈 탓에 황천화는 편지를 받지 못했고, 그럼에도 황천화는 고백했다. 기어이. 그리고 이제껏 그래왔듯이 대차게 까였다. 편지가 없었음에도 황천화는 그렇게 했다. 스팸은 결국 방향을 결정지었고 분기가 되었다. 역사의 도표가 아닌 종이와 먹으로 만들어진 손가락이 태공망을 가리켰다. 황천화는 그대로 했다. 

태공망이 어째서냐고 물었다. 황천화가 고백해온지 삼십 번 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정면으로 되받아친 질문이었다. 뭐라 말할까. 오기라고 하는 대신 황천화는 그저 그러고 싶었다고 했다. 

아냐, 바보야. 

여전히 입이 썼다. 어찌나 쓴지 목구멍 안쪽이 시큼하기까지 했다. 




태공망이 자리 비우자마자 은근슬쩍 중계석이 다시 설치되었다.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자리에 앉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상황을 알려왔다.


“그래서, 복희가 잘 하고 있는가 보네.”


여기는 상황실. 화면 옆으로 보낸 편지들의 리스트가 있었다. 절반이 넘는 편지들에 빗금이 그려졌다. 편지들이 잡히고 뜯겨지고 차이고 무시당하고 역사가 바로잡힌다. 아주 작은 고백 또한 역사의 일부다. 황천화는 영화 보듯 보았다. 이 감정교환들을 지워버리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를 고민하면서. 연애했던 과거는 점점 사라져 가는데 기억은 이상하게 남아있어서. 아직은 살아있는 편지가 있어서, 어설프게나마 연애하던 사이라. 그것마저 하나 둘 사라지는 중이라. 돌아온 태공망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정작 태공망은 태평하게 등장했다. 오자마자 손을 들었다.


“여.”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한 황천화 손을 끌어당기고 빙그르르 돌았다. 어디서 배우기라도 했는지 꽤 그럴듯한 스텝이었다. 앞으로 세 발짝 뒤로 세 발짝. 그리고 턴. 황천화는 당황했으니 금방 스텝에 따라붙었다. 함께 빙글빙글 돌아주었다.  


“술 먹었수?”

“편지가 얼마나 남았더라. 그 전까지는 잘 해보자고.”

“이거 완전 매정한 사람이네.”


황천화는 투덜거렸다. 놀랍게도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이것이 태공망이 부리는 마법 중 가장 놀라운 것이다.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07.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사이에도 숨 고를 시간은 늘 있었다. 태공망은 그 시간을 몽땅 작정이라도 한 듯 한낱 연애질에 쏟아 부었다. 황천화로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으나 방향이 아주 생뚱맞았다. 나이가 들면 거꾸로 애가 된다더니 그 말 그대로 유치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금광좌 위치야 고정되어 있으니 원래의 장소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굳이 빙 돌아서 산중턱을 기어 올라왔는데, 그 때마다 산 아래에서 꽃이나 장난감, 날짜 지난 신문 따위의 세상 쓸데없는 선물들을 가져왔다. 아니면 신문지에 싼 꽃을 가져오거나. 품에서 잡동사니를 꼬물꼬물 꺼내 툭 건네는 모습은 유아의 애정행위에나 비견할 만했다. 하도 애 같아서 황천화는 습관적으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다가 손을 거두고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너무 깜찍해서 자꾸만 황천상 대하듯 손이 나갔다. 그 옛날에는 한없이 연애 고수 같더니 지금 이 숙맥은 대체 누구람. 자네가 세상 구경할 만한 게 별로 없지 않은가. 쪼가리들 내어 놓고도 태공망은 뺀질뺀질하게 말했다. 하도 당당하여 황천화는 그러마, 하고 말았다. 황천화도 무언가 주고 싶기는 했다.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양 손은 비어있었다. 꽃은 향기만 남기고 손가락 사이로 떨어졌다. 활자는 고요한 웅변만을 반복했다. 대신 그는 그가 잡을 수 있는 것을 잡고 붙들고 끌어내려 품에 안았다. 태공망은 가만히 있어주었다. 우리 사숙, 착하기도 해라. 어화둥둥 흔들어댔다. 그것이야말로 애 취급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공망은 황천화가 원한다면 기꺼이 동생뻘의 어린애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얌전히 품에서 복숭아나 씹어 먹었다. 신농은 드라마 시청자라도 된 양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됐군, 잘됐어. 사불상도 말했다. 눈꼴 시리게 잘 됐어요.




정말로 잘 해본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마냥 좋을 수만은 있어야지 말이다. 좋을 때는 잠깐이다. 따뜻한 온기가 닿는 것은 찰나다. 다정하게 웃어주는 것 또한 한순간이다. 달콤할수록 그렇다. 손길은 거두어지고 만개한 미소는 아물어든다. 혓바닥 위에 올린 키스는 순식간에 녹아 사라진다. 입을 다물면 입천장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뚝뚝 쓴 맛을 가득 품고선 떨어진다. 그리하여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건 죄 쓴 맛으로써, 달콤함이란 자취도 없다. 하도 써서 입 안이 온통 저릴 지경이지만 마다할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는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되었다. 현실감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현실은 입 안에 있고 신기루는 저 산 위 까마득한 중턱에 있다. 춤추고 실없는 장난을 하고 대단한 밀어인 척 사사로운 귓속말을 하는 얼굴에 있다. 손깍지 끼고 살랑살랑 흔들고 즐기다가도 태공망은 과거로 가거든 얼굴색 잘만 바꿨다. 아주 싹 바꿔 버렸다. 아까전만 해도 달콤하게 황천화랑 연애질 잘 하고선 과거에선 황천화 고백 차기에 동분서주했다. 그새 편지는 몇 통이 더 버려졌다. 감쪽같이. 혹여 가로채는데 실패해서 고백을 듣더라도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래도 그대는 안 돼. 그대는 절대 안 돼. 그대만은 안 돼. 그대는 될 것 같으니까 안 돼. 대놓고 차버렸다. 아주 야멸차게. 일말의 여지도 없이. 괜히 대사가 걱정되어 속에 없는 말을 하는가 짐작조차 못하게. 도리어 황천화랑 소꿉장난 하고 있는 지금이 더 장난같았다. 꿈이 저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이때의 황천화가 과연 알았을까.


오만가지 방법들이 다 동원되었다. 심지어 창의적이기까지 했다. 태공망이 떠난 새 보고 있는 황천화가 속이 탈 지경이었다. 저가 게임 캐릭터라면 라이프 게이지는 이미 바닥일 테다. 실시간으로 닳아가는 게 느껴졌다. 이미 중계석에서 보는 과거는 황천화가 차이는 장면 모음집이었다. 이렇게 수치스러울 데가. 매 장면마다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아파. 


“뭘 그렇게 이입하고 그래.”


신농이 황천화에게 조금 거리를 둘 것을 당부했다. 과몰입하는 그거, 안 좋은 거야. 이 같은 일로 상담을 많이 해 본 듯, 공익광고같은 어투였다. 역효과였지만. 황천화는 모니터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저거 나거든? 지금 이입이 안 되게 생겼어?”

“어차피 먼 옛날의 일이잖아. 남처럼 생각해.”

“나한테는 지금 갱신됐다고. 지금!”


그러다가 또 풀쩍 풀이 죽고 만다. 열심히 삿대질하던 손가락은 힘없이 툭 내려간다. 신농 말이 맞다. 여기서 성을 내봤자 뭐에 쓸까. 기분은 오락가락한다. 보고 있자면 절로 동정이 일기도 한다. 용쓴다. 자신도 참 안됐지만 동시에 저 용쓰는 태공망도 정말 안됐다. 울걱하는 와중에도 동정 또한 함께 발맞춰 가니 빌어먹게도 이게 사랑이란 거였다. 과거의 황천화는 분명 조금은 상처받았다. 그 씁쓸함은 모두 미래의 황천화에게 기억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기억을 가지고 과거를 동정한다. 상처가 죄 남아 있음에도 상처를 준 태공망에게도 마음 쓰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당신이 왜 그렇게 매정하게 차내야 했는지를 여기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되게 좋았었는데. 황천화는 한숨 쉬었다. 푸르륵 입술을 불며 떨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곧 돌아올 태공망은 저에게는 다정할 것을 안다. 한 무더기 꽃다발이며 플라스틱 반지와 칼과 잡지 쪼가리를 바리바리 들고 올 것이다. 양 손 위에 올려봤자 다 떨어질 것들을 와르르 쏟아낼 것임을. 비록 과거의 자신에게는 그렇게 매정했었어도. 이 소소한 행위들 모두 의미 없어질 것이라 해도. 문득 생각나서 신농에게 물었다. 


“저기. 지금 내가 다시 과거를 바꾸고 싶다고 하면 어쩔 거야?”

“알잖아? 슈퍼보패라고 해서 그렇게까지 만능은 아니야. 사용자에 따라서도 좌우되는데 이미 지구와 융합한 이상 내 존재에도 한계가 있고…. 그리고 그대가 다시 되돌려봤자 복희도 똑같은 일을 할 텐데, 그대도 복희고 언제까지 하려고?”


오늘의 신농은 작정이라도 했는지 공익광고로서의 계몽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조근조근 말을 골라가며 천천히 가르쳤다. 그래서 답변은 초면의 as시 보다는 냉정해졌다. 처음과는 꽤 달라져서 황천화는 괜스레 사기당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아니 처음에는 안 그랬잖아요.


“그냥 한번 말해본거요. 거 되게 매정하네.”

“그간 해준 것만 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서비스였지 않았나?”

“맞지. 맞는데….”


중계 상으론 점점 연애와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었다. 황천화가 흐릿해져가는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랬다.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전부 색이 바랐고, 더 이상 어떠한 사실조차 아니었다. 잠시 꾸었던 백일몽에 불과했다. 실컷 꾸었으니 이제 이자를 더해 돌려줘야 할 차례였다. 좋았던 날들은 점점 사라지고, 황천화의 기억은 차였던 기억으로만 새하얗게 덧칠해졌다. 기억 속 태공망과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가, 조금만 좋았다가, 이내 나빠졌다. 상황이 나쁘게만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고백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다가도 황천화는 금방 눈앞에 둔 현실들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태공망과는 자주 충돌했고 그럭저럭 좋았던 관계는 수없이 차였던 경험이 더해지면서 아주 무너져 버렸다. 동료로서의 정만 끈적했다. 그래도 태공망이 다 황천화 걱정해서 하는 일이었으니 아직 남보다는 나았다. 상황을 관조하며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자조뿐이다.


“아직 남보다는 조금 더 낫네.”

“자네는 언제나 나한테 남보다는 조금 더 나았어.” 


어느 샌가 돌아온 태공망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볼을 바싹 갖다 대고 속삭였다. 넉살도 좋아라. 말하는 대신 황천화는 태공망 불을 잡고 꼬집고 문질러댔다. 따끈했다. 그래 액체괴물 슬라임 유행할 때도 있었지. 태공망은 모를 말을 하며 이 스킨십을 감내했다.  


“그럼 결국 시작으로 돌아왔다는 소리잖아.” 


여기서 욕을 할 만한 대상은 하나밖에 없다. 그 자신에게다.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 노력을 해서 바꿔보겠다고 난리를 쳤음에도 제자리다.


“멕여줘도 그거밖에 못해. 연애랑은 담쌓은 병신같은 황천화.”   

“그래도 그때보단 지금이 나으니 괜찮지 않은가?”


태공망이 긍정적 의견을 제시했다. 실제로 황천화는 적어도 지금은 맘껏 주무를 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이것도 앞으로 얼마나 갈지 간당간당하지만. 그래도.


“전혀 안 괜찮아.”

“그대는 지금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구만.”

“지금이라…. 뭐 굳이?”  


원래 망령이란 그런 법이다. 몸이 살았던 과거에만 집착하는 것이 일이다. 혼만 남은 황천화가 그랬다. 양 팔을 뻗었다. 역시나 잡동사니들이 쏟아졌다. 그대로 떨어졌을 때 조금 더 기분이 좋은 것들이었다. 색종이나, 동전이나, 뭐 그런 것들. 그렇게 되도록 골랐을 것을 생각하니 기뻤다. 받고도 빈손이라 다행이다. 바로 안으면 되니까. 품에 들어오면 한 가득이다. 




황천화의 품에서 태공망은 푸념을 한다. 황천화가 황천화의 욕을 하는 것처럼 태공망도 황천화의 욕을 한다. 서로 시선은 다르지만 결국 욕받이는 황천화다. 욕을 하다가 가끔 들이박았다. 이 자식이고 저 자식이고. 지은 죄가 있어 가만 맞아주었다. 최근의 추세라면 그럴 만도 했다. 

무너진 관계와 화풀이를 발판삼아 황천화가 막 던지고 있었다. 원래도 막 던지긴 했지만 아예 수위가 달라졌다. 안 사귈 거면 그럼 한 번 해보기라도 하자. 해보면 또 좋을지 누가 알아. 궁지에 몰리니 사람이 말초적이 된다. 태공망은 기겁했다. 황천화 입에서 나올 거란 생각을 안 해봤었다.


“내가? 그대랑? 왜?”

“왜라니. 떡치는데 왜가 왜 필요해. 사숙은 무슨 사명과 정의가 있어서 섹스해?”

“아.”


그간 황천화가 거는 수작 중에선 제일 설득력 있었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절의 의미가 아니라 정신 차리려고 젓는 거였다.


“안 할래.”

“왜. 닳는 것도 아닌데 한번 해. 내가 잘 해볼게.”

“닳아! 닳아!”

“그럼 안 닳게 잘 해볼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태공망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꿩 대신 닭이고 마음이 안된다면 몸이라도 한 번 맞아보겠다는 야심이 노골적이었다. 막 던지는 걸 넘어 숫제 자포자기다.    


“와…. 아주 완전히 저질이야.”


돌아와서는 고개부터 저었다. 적잖이 귀찮아 보였다. 손가는 잔업이라도 늘어난 것처럼. 가만 들어주다가도 성가셔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부아가 치밀었다. 그거 나름 진심이었는데. 잔업거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렇게 나랑 연애했던 게 싫은 거? 어차피 그거 빼곤 결과가 다르지도 않은데. 정말 기를 쓰고 막는다. 서운하게.”


서운하다. 서운해. 정수리에 턱을 얹고 칭얼거렸다. 이 머리로 무얼 생각하나 하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달라, 이놈아. 그럼 내가 연인마저 사지로 몬 쓰레기가 되잖아.”


그렇게나 기를 쓰고 막으려 했던 이유를 들었다. 사소했다. 대사와 미래 시간의 흐름과도 관계없이 이유는 아주 지독하게 인간적이었다. 순간적으로 황천화가 다 연민할 정도로. 사랑은 언제나 동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가 불쌍하고 내가 불쌍하고. 


“지독하게 이기적이네. 내 생각은 안하고?”

“어차피 자네는 이런 식으로 누가 등을 밀어주지 않는 이상 고백하지 않았을 테니까. 고작 그 정도의 마음이라는 거지.”


오래도록 준비되어 온 듯한 말이었다. 드디어 내뱉게 된 것이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과거의 황천화를 내치듯 냉랭했다. 기억에만 남은 편린이 날카롭게 되살아났다. 내뱉는 사이사이로 찬바람이 싸늘하게 일었다. 그럼에도 맞는 말이라서 황천화는 또 할 말이 없었다. 








08.



숨을 돌려본다. 가능한 가늘고 길게 내뱉는다. 입술 새로 빠져나가는 숨은 종잇장처럼 편평하다. 퍼지는 건 금방이라 곧 아무것도 아닌 바람이 된다. 이를 반복한다. 태공망이 쉬는 방법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푹 퍼져서 사지를 늘어뜨린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푝푝 숨만 쉬는 것이다. 뭐라도 입에 물고 있으면 더 좋다. 이쯤 되면 수면과 휴식과 식사의 경계가 불확실할 지경이다. 원래 곤륜 시절부터 수행하는 척, 낚시하는 척, 생각하는 척, 자는 척, 미꾸라지처럼 경계를 흐려가며 농땡이 치는 데에는 능했다. 위로부터 한심해하는 눈빛이 대놓고 떨어지고 있지만 무시한다. 따끔따끔해도 무시한다. 눈빛에 이어 손바닥이 얼굴을 덮고 주물럭거리고 비벼대는 것마저 무시한다. 손길이 예전만큼 우악스럽질 않아서 견딜만했다. 예전 같았음 얼굴을 아주 짜부라뜨렸을 텐데.

이게 대체 얼마의 농땡이인지 모른다. 실없는 고백 몇 십번을 주워 담고 나서야 사태는 겨우 안정권에 들어섰다. 신농이 보기에도 그러한 듯했다. 혼자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이윽고 박수를 쳤다. 잘 하고 있잖아, 의외인 듯, 마치 잘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안 해본 듯한 말투였다. 기대를 가볍고 산뜻하게 덮어버려서 도리어 얄미울 지경이었다.

그렇다. 벌어졌던 일은 순조롭게 수거되고 있다. 상황파악을 하느라 지지부진하게만 보였던 구간을 지나자마자 태공망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수정작업을 몰아쳤다. 지난 일을 낱낱이 복기라도 하듯 과거에 눌러 붙었다. 스며들었다. 황천화 입에서 나오는 모든 고백을 낚아채 담았다. 향수에 젖을 겨를도 없었다. 사불상이 과거의 사소한 실수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듯 탄식을 내뱉었지만 그게 다였다. 수정작업은 한창 바삐 돌아가는 당시 정세와 맞물려 정신없이 지나갔다. 

미래로 돌아갈 때마다 황천화와는 부쩍 서먹해졌는데 급변하는 과거 탓에 황천화가 지금의 제 사숙을 어찌 대해야 할지 헷갈려했기 때문이었다. 갈팡질팡 고민하던 황천화는 태공망 말대로 딱 남보다는 조금 더 낫게 굴었다. 얼굴을 와락 우그러뜨리고 발을 구르며 생떼를 부렸다. 이 정도 없는 양반, 떼잉. 태공망이 들고 올라온 신문 쪼가리 따위가 발끝에 차였다. 거치적거려 발을 여러 번 털었다. 달래기 위해서라면 뽀뽀라도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황천화가 또 그걸 거절하지는 않았다. 잔뜩 어색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크게 벌려 함뿍 먹어 들어갔다. 고맙게도. 처음엔 좀 딱딱해도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과거와는 상관없이 괜찮은 연인으로 남을 수 있다. 다정함을 되찾는 것이 이리도 쉽다. 쉬우니 귀하게 여길 줄을 모른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남았을까. 몇 번의 거절을 거듭해야 하는가. 얼마나 거듭하고 겹쳐져야 그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무게가 되는가. 멀긴 해도 끝은 존재한다. 남아 봤자 쉬이 계산할 수 있을 정도의 수다. 태공망은 이것을 황천화의 곁에서 생각한다. 여전히 사지를 늘어뜨린 채. 손 하나만 겨우 닿아있다. 기왕 닿았으니 선심을 쓴다. 손가락을 깊이 찔러 넣고 깍지를 낀다. 스킨십이 깊어질 때마다 황천화 어깨가 잔뜩 굳는 게 느껴진다. 어찌나 굳었던지 이제 막 굳어 열을 뿜는 석고조각같다. 서먹해질수록 그는 태공망 보기에 퍽 귀여워졌다. 아주 마음에 든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깍지를 끼고 흔들며 정수리를 비비적대다가도 속으로는 그저 딴 꿍꿍이다. 눈이 마주쳤겠다, 웃어도 준다. 하하. 뭘 걱정해. 살가운 웃음, 눈꼬리에 티끌이 가득하다. 황천화로선 좋다가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찌나 좋던지 막 헛웃음이 난다. 쥔 손에도 힘이 꽉 들어갔다. 참 다정하다, 다정해. 이걸 연애라고. 널을 뛰고 오락가락하는 게 연애란다. 


“망할 노친네. 이럴 땐 정말 징글맞어….”

“괜찮아. 그댄 이런 나도 사랑하잖아.”

“그 자신감이 더 징그러운 거 알지.”

“그럼, 그럼.”


그래도 좋단다. 입술 끝에 버석하게 비늘 돋는 듯 웃는다. 도로 눕는다. 손은 여전히 닿아 있다. 산 위는 태공망이 들고 올라온 잡동사니들로 쓰레기장이 되어간다. 살가운 신문과 잡지, 꽃, 쓰레기들을 황천화는 모두 모아 쌓아놓았다. 그건 바람이 불면 파르락 거리며 흔들리고 햇빛에 노랗게 바래가는 구조물이 되었다. 사랑스러운 쓰레기 더미를 신농이 가끔 뒤적거린다. 퍽 조잡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 세 보니까 몇 번 남았어?”

“기껏해야 서른 번이겠지.”

“대충 셌구나?”

“서른이나 쉰이나 그게 그거거든.”


농담할 정도는 된다. 일을 이쯤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급해 덮어두고 있던 처음의 위화감이 되살아난다. 그러고 보면 예상 외로 변한 게 거의 없었더랬다. 나비는 태풍조차 불러오지 못하고 작은 유리병 안에서만 그 작은 날개를 팔랑거렸다. 연애의 정원이란 놀랄 만큼 자그마하다. 겨우 마주한 손바닥 사이에나 살아있는 한 폭짜리 영역. 고작 그만한 크기다. 작고 지리하고 짧은 연애는 긴 역사의 그 어느 것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연애라고 뭉뚱그렸지만, 사귀든 차이든간에 별 차이는 없었다. 지나치게 미시적이었고 단 일점에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태공망은 황천화의 솜씨에 적잖이 감탄했다. 


저 멀리 내려다보며 역사와 함께 걸었다. 어렵사리 관문들을 지났고, 알던 면면들은 별이 되어 날아갔다. 생각들은 첨예하게 부딪혔다. 모두가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서 옳고 그름은 단지 힘으로 결정지어졌다. 태공망은 팔을 날렸고, 또 반쯤은 죽을 뻔했다. 당연하지만 도울 마음은 안 들었다. 이런 일도 있었지. 기억과 겹쳐서 보는 풍경은 어딘가 남일 같았다. 심지어 지금의 태공망은 태공망이라고 하기에도 좀 뭐시기 해서. 장하다. 애쓴다. 태공망은 태공망을 보고도, 또 황천화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때쯤 황천화는 배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참 되었다. 걸을 때, 홀로 있을 때, 가끔씩 손을 펴서 배를 싸쥐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겠답시고 올리는 손길은 퍽 은밀했으나 빤한 일이라 저 위에서는 훤히 보였다. 쯧쯧. 혀 차는 소리가 황천화의 것인지, 보고 있는 태공망의 것인지조차 아리송했다. 황천화는 그렇게 미래의 혼백만 남은 황천화와 아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제 좋은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들도 대체로 그러할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 좋지는 않았어도 그나마 나았다고 생각할 만큼은. 의례적으로 하는 고백은 매번 차였고, 피는 줄줄 나고, 손가락 사이를 새어나가, 마디를 타넘고, 흘러내리고, 내를 이뤘다. 그만큼 심지는 타들어가고, 그럼에도 생명은 마르지 않고. 아직은 다할 때가 되지 않았으므로. 자포자기. 될 대로 되라. 그는 웃고 농담하다가도 눈썹을 찌그려 울컥 화를 내고는 했다. 

미래의 황천화는 그게 뭔지 아주 잘 안다. 그래그래, 너 그럴 때지. 반쯤 남 일처럼 고개를 주억거린다. 한참 차일 땐 지일처럼 가슴을 싸잡더니만. 앞으로 남은 일은 더 나쁜 일들뿐이라는 것 또한 잘 안다. 그렇다면 그 전에 좋은 기억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나? 사숙도 참 너무한다. 욕을 한다.


아마 당시의 황천화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나보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철딱서니 없는 흥정이 계속되었다. 배를 찢고 나니 아집만 강해져서 뭐라도 건져야 할 것 같았다. 하나도 못 해보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실리를 따지고 저울질하다 파격적 할인을 했다. 이거저거 다 던져보고선 뭐 하나 안 걸리나 눈치를 봤다. 눈을 갸르스름하게 뜨고선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천천히 굴리다가 왼쪽으로 데룩 굴려버렸다. 태공망이 기가 차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는지 아랫니를 타고선 힘겹게 넘어가는 웃음이었다. 이 실랑이조차 어떤 의미론 연애 같았다. 그래서 나쁘지마는 않았다.   


“그럼 뽀뽀한번만 할래?”

“…이게 뭔 세일인가. 그래도 안사요.”


태공망은 펄쩍 뛰었다. 바로 일갈했다. 황천화의 추근거림에 화낸다기보다는 제 처지에 화를 내는 것이 맞았다. 어쩌다 황천화에게까지 태클을 걸게 되었나. 이거 내 스타일 아닌데…. 정상적인 반응은 황천화나 할 법한 일인데…. 내 팔자야. 절로 피곤해졌다. 눈 사이를 꾹 눌렀다. 화는 황천화에게 냈지만 분노의 화살표는 처지를 넘어 종내 저 자체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은 혹했기 때문이었다. 미쳤지, 미쳤어.

그럼에도 황천화는 물고 늘어졌고 둘은 몇날 며칠 한참을 실랑이했다. 뽀뽀, 프리허그, 데이트, 썸에 필요한 온갖 스킨십을 양보하고 가장 기초적인 손에 이르러서야 극적 타결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강아지 앞발마냥 살포시 얹어주는 손이었다. 황천화 손 위로 아주 새침하게 올라갔다. 표정은 전혀 새침하지 않았지만 황천화는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입을 씰룩이다가 한참을 웃어댔다. 허리를 꺾어 웃어가면서도 손은 계속 잡고 있었다. 태공망은 잡힌 채로 샐쭉하게 입을 삐죽거렸다. 

“웃어? 그댄 웃음이 나와?” 

그랬다. 나왔다. 이 사이를 비집고 입술을 젖히며 튀어나왔다. 허공에 올라 팡팡 터졌다. 황천화가 치근덕거리기 시작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았던 순간이었다.




“웬일로. 그땐 무슨 바람이었대?”


아주 먼 훗날의, 영혼만 남은 황천화가 산 위에서 물었다. 모든 것이 그리했듯이 그날의 촉감이며 온도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먼 옛날 사라진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텅 비어 있다. 이번에는 태공망이 흔쾌히 빈 손 위로 손을 올린다. 쥐고 가볍게 앞뒤로 흔든다.  


“글쎄다.”


태공망은 딴청 피웠다. 편지까지 다발로 속속들이 보낸 노력이 가상해서, 라고 대충 둘러댔다. 나도 조금은 혹했어서. 그래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서. 황천화가 원했을 만한 진짜 대답은 묻어 두었다.


“그렇다면 편지 보내길 잘했네.”

“그대는 참…, 소박하구만.”


사소한데서도 행복 찾기를 이리 잘하는 양반이 왜 그땐 그 모양이었을까. 왜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시조를 찾아야 했을까. 태공망은 절로 안쓰러워지고 만다. 안쓰러워서라도 얼른 끝내야 할 텐데.




쓰레기장에는 이제 편지가 더해졌다. 황천화가 보냈던 것을 태공망이 수거해서 돌아온 것이다. 편지부터가 미래에서 보낸 것이기에 가져옴으로 제자리에 돌아왔다 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쓰레기장같은 연애의 전당 맨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대체 나를 언제부터 좋아해서 이 사단이 난 걸까?”


질문은 자꾸만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짱을 꼈다. 황천화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원인 규명으로 가는 것이 과연 모사다웠다. 근데 이제 와서? 그나마 봉합의 기미가 보이니 궁금해졌나보다. 


“왜, 알면 그것도 막게?”

“그것도 나쁘지 않으이. 아예 근원을 틀어막아야지. 제일 쉽거든.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그러고 보면 편지는 상당히 오래전까지 보내졌었다. 황천화와 태공망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서기까지도 빠짐없이 찾아 날아들었다. 


“설마…설마…. 첫 눈에 반했다든가….”


팔짱 낀 그대로 팔뚝을 쓸었다. 소름이 오소소 쓸어내려졌다.


“아니, 아니, 아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아니거든?”


어째 황천화가 더 정색했다. 펄쩍 뛰었다. 무안할 정도였다. 


“그럼 편지 보낸 기준점이 뭔데. 반했던 순간이 아닌가?”

“아니지. 그랬음 안 보냈어.”


황천화는 얼버무렸다. 가르쳐 주기는 싫다. 손을 펼친다. 양손으로 잡기는 버거운 조막만한 머리통. 이 안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이제사 궁금한 건지. 잡아당기면 목을 쭉 뽑아 길게 늘린다. 살짝 위로 꺾는다. 코가 겹칠 거리까지 가까워져도 태공망은 별 표정 없었다. 그저 궁금해 보였다. 눈동자 저 밑이 너무나 깊다. 시퍼렇고 시커멓다. 황천화는 그걸 한참 바라보다가, 입술로만 벙긋벙긋한다. 안 가르쳐 주지. 




황천화가 기어이 반한 순간은 그가 죽고 나서다. 기어이라고 할 만 하다. 편지를 보낸 시점은 모두 반하기 전이다. 태공망의 말이 맞다. 억지로 등을 떠밀지 않는 이상 움직이질 않았을 마음이다. 그는 십 수 년의 시간동안 편지를 보고 고백하면서도 늘 설마, 라고 생각해왔고, 그 설마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속으로는 언제나 부정해왔다. 설마. 차여도 속은 상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마 기억을 새기던 미래의 황천화가 고통스러워도 더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부정에 부정이 얹히고 얹히다 이중 부정이 되고 긍정이 되었다. 후회까지 가는 길이 이리 멀다. 태공망은 편지를 수거하고, 고백을 뻥뻥 차내가며, 소위 황천화의 길고도 지루한 입덕부정기의 역사를 본 셈이다. 그리고 미래의 태공망은 그의 부정을 모두 긍정해왔다. 아니라고 말해왔다. 아니어야 한다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 그건 사랑이 아니야.

태공망이 아니라고 하면 황천화는 맞다고 말한다. 미래의 황천화는 말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힘겹게 긍정한 건데. 굳이 말한다. 여러 번 말할 수 있다. 

그건 사랑이었지. 









09.



각고의 노력 끝에 흐트러졌던 사건들은 잘 바로잡혀갔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 사건과 저 사건이 중첩되어 방향을 정하는 키를 부수기 위해 몰아쳤다. 큰 덩어리가 물 흐르듯 역사의 망망대해를 향했다. 이 먼 거리에서 거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려는 걸 보니 장관이었다. 하지만.

한 치의 변화 없는 과거는 그저 오래 읽어 너덜너덜해진 소설이나 낡아빠진 영화의 재방송에 불과했다. 리메이크에 실패해 구관이 명관이다 하며 틀어버린 재방송, 재방영. 아무리 명작이어도 조금은 지겨운 구간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이 그랬다. 로맨스는 빛을 영영 잃어버렸고, 로맨스의 단물이 쏙 빠진 과거의 장르는 담담한 전쟁 기술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결과가 빤한 영화를 황천화는 계속 지켜보았다. 그의 우울한 기억 위를 선명하게 덧씌우는 말발굽의 소리를 들었다. 귀가 멍멍했다. 현실감을 잊게 했다. 감각이 그를 지겹게도 과거의 한복판으로 되돌려 놓았다. 지평선 끝까지 천지를 가득 메운 함성과, 발굽소리가 피를 불렀다. 그들이 간절하게 무혈을 바라고 진군했음에도 그러했다. 초원의 골을 헤집어가며 내를 이뤘다. 피가 솟는 저의 뱃가죽처럼. 황천화는 저도 모르게 배를 쓸었다. 기원전의 상처는 이미 마른 지가 한참이다. 새 살이 돋은 것도 아닌 그저 상처 그대로의 모양으로.


“어휴, 어휴.” 


옆에선 신농이 손가락을 벌려 눈을 가렸다. 창검이 날카롭게 엮일 때에 그랬다. 단지 끔찍하다고 여겨야 할 의무감에서만 나온 손짓이었다. 어차피 벌린 손가락 사이로 눈동자는 들이밀고 있어 큰 의미는 없었다. 더한 짓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양반이 순 내숭이다. 연신 내뱉는 가짜 탄성이 깍쟁이 같아 가증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황천화가 옆구리를 쿡 찔러서야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아, 이런. 티 났어?”

“엄청.” 


하나도 충격받지 않은 말끔한 얼굴이었다. 참 얄밉기도 하다. 황천화는 옆구리 찌른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펄쩍 허리를 뒤틀며 물러선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청나게 난감한 척 하는데 이것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신농이 변명했다. 


“신물이 났거든.” 


여와가 쌓고 무너뜨린 것만 수 천 번, 번복된 역사가 수만 번. 이젠 이골이 났다. 그래서 정석보단 변주를 좋아한단다. 이번 일에서도  내심 기대하는 듯했다.


“전쟁 통에 피어나는 로맨스도 있는 법인데. 비장미 있어서 볼 만 하지.”

“쯥. 댁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황천화가 핀잔했다. 속 편한 소리. 박 터지는 말. 저들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내려주는 관심과 남의 일이기에 가능한 방관. 신농은 멋대로 로맨스라도 기대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아니다. 로맨스고 감동의 실화고 눈물 찍을 손수건조차 필요 없을 것이다. 한없이 코미디에 가까운 비극 그 언저리에 존재했으므로.


봐라. 전쟁이 중첩되면서 황천화가 고백하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황비호가 봉신된 이래론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중계석에선 요즘 실적이 부쩍 초라해졌네요. 그렇지요. 식의 농담을 심심찮게 주고받았다. 

그럴 만도 했다. 가족의, 인생의 지주가 사라진 마당에 누가 연애 나부랭이에 관심을 쏟겠는가. 집이 무너지는 마당에 잡초에 물을 주는 꼴이다. 본디 황천화는 감정을 칼같이 구분하지 못했고 공적 의무와 사적 감정, 사적 감정 중에서도 이런 저런 감정 사이의 둑을 죄  허물어 놓고 살았더랬다. 하나가 불어나서 터져버리니 나머지는 순식간에 매몰되었다. 하물며 받아주지도 않을, 나부랭이에 가까운 고백이라면 더 이상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제일 먼저 묻혀 감정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당시 황천화의 머릿속을 헤집어 보자면 온통 황비호와 문중, 주왕, 은, 한정된 몇 단어들로만 돌아가고 있었다. 협소한 단어들을 뱅뱅 돌며 은이 몰락해가는 광경을 따라갔다. 목적지까지 배에 커다란 칼을 차고 갔다. 무거웠다. 발걸음마다 비늘처럼 가시가 돋아났다. 질질 끌었다. 뾰족하게 길이 났다. 심상은 그런 모양이었다. 황량하고 처참했다. 한 발은 현실에 한 발은 환상에 걸쳤다. 디딘 한 발이 위태해졌다. 그리하여 기우뚱 무너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편지는 잃어버렸다. 아니면 잊어버렸던가. 


그렇게 황천화의 고백 러시가 싸그리 매몰되고 한낱 연애놀이는 매정하게 짓밟히며 사태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으면서 황천화와 태공망과의 사이는 영 까끌해지고 말았다. 감정을 쫓는 황천화와 대의를 쫓는 태공망 사이의 거리는 우주만치 벌어졌다. 이젠 한두 낱말 유치한 고백으로는 따라잡지도 못할 거리였다. 까마득했다. 겉으론 농치며 잘 웃다가도 뒤돌아서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대화는 적어졌다. 황천화 쪽에서 말 섞는 걸 피했다. 괜히 말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태공망이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전부 이해 못할 것이라. 그게 전부 옳은 말이라는 게 부아가 치밀어서. 아주 별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래, 별 같더라. 멀고 반짝이고 여기서 봐선 무언지 알 수조차 없지. 그럼에도 끝내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미칠 노릇이었다. 둑이 허물어져 감정은 풍랑처럼 자주 뒤집어졌다. 그래서 피했다. 원래 붙었다가도 떨어지는 게 그네들 사이였고, 서로 심경 자체는 이해하고 있어 티가 안 날 따름이었다

.   

이젠 미래의 태공망이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될 만했다. 저런! 구경꾼들이 탄식하며 무릎을 쳤다. 태공망은 탄식하던 저들과는 달랐다. 신이 났다. 소원해진 사이가 털끝만큼도 아쉽지 않았다. 남몰래 허공 위 구름에 숨어 사불상과 이른 축배를 들었다. 다 되었구먼, 다 되었어. 소리 없이 축포를 쏘고 어깨춤을 춘다. 고작 연애를 짓밟고선 즐거워했다. 그것이 퇴근 전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이 가벼웠다. 실제로 그 정도의 감각이었을 것이다. 고작.


“길었다….” 

“그래요. 그래도 개고생 한 보람이 있어요.”

“호오. 얼마나 보람있기에 파티씩이나.”


오붓한 악당 둘의 자리에 별안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착석하고 박수치는 척 하더니 잔을 빼앗아 마신다. 맛이 미묘한 듯, 눈썹이 찌푸려졌다. 알고 보니 내용물이 문제였다. 술이라니, 당신도 달기만큼 막장이네요. 이 판국에 술 마시는 게 문제지, 까마득한 아래 태공망이 하나 더 실재하는 것쯤은 신경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재미있어 보여서 구경 왔더니 대체 여긴 뭐 하러 있는 거예요?”

“뭐하긴…. 남의 연애 방해하려고지.”

“당신 정말로 할 일이 없나 보네요!”


감탄을 넘어 경이에 가까운 목소리. 순수한 비야냥.


“이래서 옛날부터 그대가 싫었던 거야.”


흥이 식었다. 저리 가라며 태공망이 손짓했다. 훠이 훠이. 손목이 대충 덜렁거렸다. 새 쫓는 손짓도 이것보단 성의 있을 것이다. 태공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건방진 손놀림이었지만 신공표는 눈 하나 깜짝 안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싫은 놈이다. 눈치가 빨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굴어서 더 싫었다.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 가타부타 물어보지도 않고 재밌는 거 하면 같이 하자고 말했다. 쫓아내서 될 것도 아니라 내버려 두었다. 그 신공표이니만큼 금방 흥미 떨어질 게 뻔했고, 실제로 그랬다. 태공망이 하는 일이 대체로 그러하듯, 신공표가 추구하는 쾌락이나 미학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래에 턱짓했다. 아주 싱거웠다. 


“그렇게 봐서 뭐 하나요. 저 치는 금방 죽을 겁니다.”

“그걸 기다리는 거지.”


부러 건드리는 소리였는데, 감정이 싹 지워진 무미하고 얄팍한 답이 되돌아 왔다. 아하. 그제야 신공표가 낮게 웃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굽니까? 뒤늦게야 솟아오르는 질문을 삼켰다. 과연 물어본다고 답을 얻기나 할까. 그래서 의문은 목구멍을 한껏 간지럽히며 데굴데굴 내려갔다. 재미있었다. 태공망으로 말하자면, 신공표의 그런 태도가 별로, 재미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 축배를 들고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황천화가 죽어야만 이 과제는 끝이 난다. 신공표의 말마따나 거의 다 왔다. 종막은 가까워져 온다. 조가에 다가갈수록 멸망해가는 나라 특유의 냄새가 난다. 재와 죽음의 냄새다. 저 창공의 현명한 노사들부터 땅의 아이들까지 시대에 드리운 멸망을 안다. 그들은 자주 엄숙해진다. 고개를 숙이지 않도록 가까스로 목에 힘을 준다. 소망은 늘 그렇듯 보잘것없다. 가능한 격정적이지 않기를. 깊은 새벽이 가고 동이 트듯 고요하기를. 다수의 바람은 머지않을 통틀 녘 새벽별이 날아가며 이루어진다. 그랬었고, 그럴 것이다.  

이것은 그런 이야기다. 황천화가 고치지 않은, 신농이 한참을 지겨워하던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 여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연애담을 끼워 넣으려고 하니 망하지.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황천화의 이해는 동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깊은 밤 선잠을 가르며 찾아오고는 했다. 감정의 파도가 밀려나고 밑바닥이 보일락 말락 하면 새 파도가 밀려왔다. 이해는 바로 그 틈바귀를 파고들었다. 퍼뜩 눈을 떴다. 사방이 깜깜했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서도 얼기설기 얽어 놓은 나무 기둥의 윤곽만이 흐릿하게 보였다. 길 어디에 멈춰서든 똑같은 나무를 대고 똑같은 잠자리를 폈으니 천장만 봐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노려보고 있다가 울컥 견딜 수가 없어져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천막을 걷어내었다. 반 한복판, 별이 쏟아지고 불침번이 피운 화톳불이 일렁거렸다. 같잖은 동정으로 그의 속도 울렁거렸다. 비틀거렸다. 화톳불을 둘러싼 군졸들이 자리를 터주었으나 황천화는 그대로 지나갔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천막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울고 싶었다. 모든 것이 가여웠다. 저도 딱하고 태공망도 딱했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딱했다. 심적 거리가 우주만큼 벌어졌다고 했지만 그네들은 태어나길 소우주로 태어났고 동시에 단어 사이의 삶을 빙빙 도는 천체였다. 아주 멀어졌다가, 반 바퀴 돌면 가까워졌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알 것도 같았다. 그와 동시에 서러웠다. 이유는 몰랐다. 충동이었다. 

태공망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갔다. 그 어떤 새벽이고 늘 같은 곳에 있었다. 황천화가 찾아올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헤진 천막을 걷어내면 반상이랍시고 만든 나무 받침 앞에 앉아 있었다. 불은 겨우 하나 올려놓았다. 받침 위에 지도가 펼쳐져 있어 자그마한 태양처럼 온 땅을 비추고 있었다. 지나온 궤적이 길다. 노란 불. 태공망의 얼굴도 노랬다. 걷은 천막에 바람 불어와 불이 흔들리고 얼굴에 진 그림자도 흔들렸다. 그러면 그제야 황천화는 걷어낸 것을 내리고 완전히 들어왔다. 무릎아래 매달리며 중얼거렸다. 잠꼬대처럼 이를 말했다. 실제 잠이 덜 깨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맨 정신으로 태공망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할 일은 죽어도 없었으므로. 겨우겨우 토해내었다. 맥락은 하나도 맞지 않았고 그가 생각이 어지럽게 뒤섞여 무너졌고 종내는 아무런 말이 되지 않았다. 어물어물했다. 그의 값싼 동정은 이런 식이다. 그런 밤의 태공망은 유달리 다정했다. 속 긁는 소리도 무엇도 없었다. 어깨에 얹은 손을 등으로 미끄러뜨리고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발작같은 격정을 가라앉혔다. 살내음보다는 흙냄새가 났다. 그리고 약간의 나무가 타는 냄새. 이 사람은 아이를 이렇게 달래는구나, 생각했다. 모은 무릎에 이마를 처박았다. 다정함이 거북살스러웠다. 손 하나도 겨우 내줬으면서. 대체 이 다정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느 시간대의 사람이었을까. 누구였어도 상관없다. 결과는 똑같았으므로.




훗날 황천화가 말했다. 누구였어도 상관없었다고. 말하며 애써 미련을 털어냈다. 장난도 애먼 시도도 여기까지다. 남은 것은 종막뿐이고 스팸은 완전히 멈췄다.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남은 편지는 신농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렸다. 잡동사니 더미 위로 떨어졌다.   


“죽고 나서 후회할 일만 남은 거지. 꼴좋다, 멍청이.”


자조적이었음에도 속 시원해 보였다. 그곳에서는 동이 트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땅거미는 공터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혼이 닳고 닳은 지구의 아이 또한 신기루 놀이를 뒤로 하고 집에 갈 시간이다. 신농은 직감했다. 직감 그대로 황천화가 일어섰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 안될 거라고 생각했어.”

“원래 모든 연애가 다 그렇잖아.”


그렇다. 이것 또한 하고 많은 연애 얘기들 중의 하나다. 상투적인 위로를 황천화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뭐라도 해봤으니까 됐어.”


그는 칭찬에 후해서 장난에 가까운 시도도 높게 쳐 준다. 그럼그럼, 고개를 끄덕이다. 사랑에 모든 걸 걸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구나, 싶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안 해봤던 일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눈 먼 미친놈도 참 재미있구나. 수습이야, 어차피 사숙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를. 황천화는 스스로를 설득하며 겉으론 해탈한 척 했다. 허허 웃었다. 말과는 달리 속은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허탈함에 바삭하게 말라비틀어졌다. 왜 처음에 말했잖은가. 요즈음의 황천화는 딱 겉으로만 신선 같다고. 세상살이 쉽지가 않았는데 참 연애는 더했다. 쉽지가 않다. 죽고 나서도 그랬다.








10.



나라고 마냥 마음이 편했겠나. 태공망이 말했다. 그가 수습 막바지에 이르러 성공을 자축하는 팡파르를 울리던 도중에 말했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 엄청난 괴리감이 있어 보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했다. 드물게도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기에 기억한다. 

태공망의 말 대부분은 들으니 만도 못한 잡설이었고 괜히 유념해서 들었다간 피곤한 일이 더 많아 대충 흘리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태공망이 저의 의사를 상대의 귓구멍에 제대로 박아 넣고자 할 땐 꼭 이런 식으로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고는 했다. 목소리도 한 톤 아래로 잡아끌어 내렸다. 나직했다. 말이란 놀랍다. 고작 그 정도로도 시답잖은 언어들은 날아가지 않고 귓속을 낮게 파고들어와 머릿속에서 속살거리니 말이다. 그때도 그랬다. 황천화와 눈이 마주치기만을 기다려 마주치자마자 안력으로 붙들었다. 황천화가 충분히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 템포 쉬고, 마치 혼잣말인 듯 뇌까렸다. 하지만 혓바닥은 분명 황천화를 향해 있었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나. 뜬구름을 잡아 끌어내려 머리와 꼬리를 뜯어낸 듯한 문장이었다. 그게 다였다. 짧게 던져두고선 태공망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사불상과 시시덕거렸다. 남은 건 황천화의 허탈한 한숨이다. 뭐야. 약이라도 올리는 줄 알았다. 


그것이 황천화의 약을 올리거나 태공망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었음을 황천화는 느지막이 깨닫는다. 천천히 깨달은 만큼 황천화는 오래 곱씹는다. 문장을 해체하고 단어를 조각내 자음과 모음을 앞니 뒤에 붙여 조금씩 녹여 먹는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어. 그건 다름 아닌 황천화를 위로하는 말이었다. 과연 위로가 되기는 했다. 그가 이 여정 내내 마음 불편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대한 불편하게 위장을 꼬아가며 황천화를 오래오래 생각하기를 바란다. 

금광좌를 찾아왔을 적, 처음의 거창했던 바람은 이로 베어 물 수 없을 것을 토해내고 나니 이렇게나 많이 쪼그라들었다. 슈퍼보패까지 사용해가며 얻는 결과치고는 보잘것없을 정도다. 잇자국만 잔뜩 난 그것은 크기만 소박해졌다 뿐이지 빈약해질수록 더욱 치졸해지고 이기적이 되어간다. 못났지만 그게 사랑이려니 하고 납득하니 쉬워졌다. 태어난 지 몇 천 년 만에 알게 된 사실이다. 황천화의 사랑과 연애는 많이도 유치하다. 그러니 형태야 상관없이 최대한 오래 생각하고 미련가지고 붙잡아 주길 바란다.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하나 정도는 그의 원대로 됐다. 하나라도 건졌으니 일 벌린 보람이 있었다. 그가 지독하게 바란 대로 태공망은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태공망 자신의 길이 아닌 황천화의 발자국을 쫓았다. 이미 한 번 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걸어가게 했고 오래 전 옛날 찍힌 발자국을 그대로 밟았다. 같은 판단과 같은 행동, 같은 과오 혹은 정해진 행동양식을 반복한 끝에 결국 역사가 정한 대로 황천화는 스러졌다. 바닥에 피가 줄줄 쏟아졌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이것이 그가 오래 전부터 흘리고 다니던 피 인지 지금 막 쏟아진 새 피 인지 알 수 없었다. 몸뚱이가 무너졌고 혼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빛줄기가 되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올랐다. 당시의 태공망은 육신을 보고 있었으나 작금의 태공망은 혼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눈썹이 찌그러졌다. 망할 놈이다. 기어이 이 꼴을 두 번 보게 만든다. 이로써 태공망은 황천화가 죽음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납득했다. 일종의 요리 채널에서 나오는 간편 레시피처럼. 이 상황을 모두 섞어 시간을 들여 구우면 황천화가 죽는구나. 납득은 했으나 그다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기왕이면 이런 거나 좀 바꾸기 그랬어.” 


혼잣말했다. 황천화가 금광좌를 써먹었다는 얘기를 들은 처음 순간부터 생각했던 일이이었으니만큼 그랬다. 혼잣말은 함성에 쓸려나갔다. 그래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함성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든 것을, 심지어는 핏자국마저 뒤덮고 저 너머로 퍼져나갔다. 새 시대를 맞는 소리다. 새 시대에 더 이상 그들이 할 일은 없다. 뒤돌아섰다. 

남은 건 돌아가서 황천화를 놀리며 샴페인을 마저 따는 것뿐이다. 생각하니 근질근질해졌다. 그는 가급적 좋은 일만은 생각하려 하는 쪽의 사람이다. 좋은 일만, 즐거운 일만. 복잡한 것도 최대한 간단하게 풀어서, 일단 쉬운 것부터. 놀려먹는 것과 시시한 장난과 쓰레기 더미 같은 것들을. 무거운 과거보다는 그것으로 이룩한 가벼운 미래를. 착잡함을 애써 덮으며.


“이렇게 끝이라니, 어쩐지 허무하네요.” 


일을 마무리한 사불상의 감상은 단순하고 뭉툭했다. 두둥실 떠올라서도 팔은 바닥을 향해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 말이야말로 제일 핵심에 가깝다 하겠다. 있던 그대로 돌리는 일에 무슨 보람이 있었겠는가. 




이로써 엔딩이다. 

연루된 모든 자들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신들이 할 수 있는 작은 유희는 끝났고 사고 친 놈은 얌전히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신농과 황천화 둘은 곧 돌아올 태공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랜만에 재미있었네. 공범이되 죄인은 아닌 신농은 별 다섯짜리 후기를 남기며 깔끔하게 손을 털었다. 여전히 무책임하고 가벼웠으며 관조적이었다. 터는 손끝에선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것이다. 옆에선 주범인 황천화가 뭐라도 해낸 듯이 줄담배를 피웠다. 그는 신농처럼 가볍진 못했다. 담배 피울 때 아주 깊이 들이마셨다. 내뿜는 연기보다 시름이 짙었다. 그리하여 연기가 아닌 시름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신농은 다른 것보다 황천화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자체를 신기해했다. 혼 밖에 없으면서 참 별일을 다 하는군. 새삼 감탄했다. 일이 끝났으니 관심사가 엉뚱한 곳으로 옮겨간 것이 명백했다. 황천화는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의지지.”

“와, 내가 이래서 인간을 좋아해.”

“뻥치시네.”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초조하면 으레 그런다. 마음 속 거스러미가 클수록 등은 굽고 자세는 더욱 궁상맞아진다.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지, 아니면 기다리는 이 순간이 영영 이어지기를 바라는지, 그조차도 모를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마음과는 반대로 타들어가는 시간은 짧아지기만 했다. 


꽁초가 쌓이다 못해 산을 이룰 즈음에 황천화 대하기에 남보다 아주 약간 더 나은 태공망이 돌아왔다. 마지막까지 바로 오지 않고 산 아래부터 올라왔다. 황천화의 초조함을 부추기기 위함이리라. 저 멀리서 한 점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도드라졌다. 두루뭉술하게 한 덩어리였던 것이 가까워질수록 분리되어 두 점이 되었다. 올라오던 도중 무슨 사단이 나 사불상이 주인을 패대기친 게 분명했다. 그간 사불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다. 태공망이 그럴 짓을 했겠지. 둘은 그렇게 느적느적 기어서 왔다. 주인이고 영수고 똑같은 사족보행이었다. 저런, 인류의 존엄성도 잃어버렸군. 신농이 보다 탄식했다. 굳이 따지자면 저 양반 인류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황천화는 저도 모르게 받아칠 뻔 했다. 생전 선인계는 순 괴짜 소굴이었고 황천화는 상대적인 상식인이었기에 아직도 종종 바른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담배 필터로 입을 틀어막았다. 닥치고 멀리 두 점을 응시했다. 거북이처럼 느렸지만 오랫동안 응시하자면 점에서 사람 형태까지는 드러날 정도로 다가왔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고를 쳤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모든 과거가 고정된 이상 미루고 미루던 정의를 해야 했다. 태공망이 완전히 올라오기 전에, 얼굴을 보고 건넬 인사말을 고르기 전에. 당신이 누구더라. 나와는 무슨 관계였더라. 헤아려 봤다. 황천화가 손댄 과거라고는 고작 둘 사이의 관계뿐이었으니 그 안에서만 뱅글뱅글 맴돌았다. 개찬된 과거와 박제된 과거가 걸쭉하게 섞여 벌집이 떨어진 흙탕물처럼 혼란했다. 황천화는 큰 칼을 들어 흙탕물을 헤집고 사실과 백일몽을 갈라내었다. 제일 먼저 달콤한 연애의 꿈부터 석둑 베어냈다. 어차피 사라져버린 과거다. 사귀었던 것도 같지만, 불과 몇 시간 전 이 언덕 언저리에서도 서로 얼굴 맞대고 시시덕거리기도 했던 것 같지만, 쓰레기에 가까운 선물이 아직도 가득 쌓여있지만, 모두가 꿈이요 허상이다. 이에는 태공망이 해준 말이 큰 도움이 됐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나. 황천화는 거기 기대 남은 것들을 그러모아 짜 맞추었다. 최대한 현재 사실에만 빗대 만들려 노력했다. 음, 음. 마지막까지 미뤄왔으니만큼 뜸을 오래 들였다.


저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관계로는 그의 사숙이었다. 그 다음을 말하려면 욕을 다소 섞어야 한다. 제기랄. 뭣도 모르고선 등 떠밀려 숱하게 고백해왔으나 전부 걷어차 온 그 사람이다. 매정하기 짝이 없다. 그러려면 끝까지 차갑기나 하던가, 마지막에 눈에 밟히지나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필 밟히게 해서 먼 미래를 기다려 스스로의 등을 떠밀게 됐다. 바꾼 과거를 거쳐 흔들리는 제 꼬리를 쫒고 똬리를 틀어 완벽한 원형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게 다였다. 그 이상의 관계는 상상 너머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사이 태공망은 다 기어왔다. 땅을 짚고 어깨로 숨을 한참이나 헐떡거렸다. 와, 이, 거, 정말, 못 할, 짓, 이다. 푸념조차 이어지지 못하고 낱알로 데굴데굴 흩어졌다. 그간 해온 일 보다도 고작 산 오르는 게 더 힘겨웠던 듯한 모양새였다. 지쳐 보였다. 등이 동그랗게 굽어 가뜩이나 작은 어깨가 더 작아졌다. 그 모습이 기가 차도록 사랑스러웠다. 손을 내밀어 주고 싶다가도 그대로 밀어 넘어뜨려버리고 싶기도 했다. 오래도록 품고 있던 감정인 것도 같았고, 이제야 막 깨달은 듯한 감정인 것도 같았다. 정수리 끝부터 자르르 저려왔다. 골백번을 더 차여도 정신 못 차릴 것이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나. 속으로 되뇌었다. 이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황천화가 적어도 하나는 해내긴 해냈노라고. 그사이 황천화의 도움 없이 태공망은 일어섰다. 역시 저가 보기에도 네 발은 영 꼴사나웠나보다.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폈다.


“아 진짜 죽겠다.”

“수고했어.”


신농이 털던 손 그대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네 발 보고 터트린 탄식이 무색하게 더없이 무성의한 태도로 하는 공치사였다. 


“저거저거…. 저는 놀았다고.” 


저 치는 옛날부터 저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 열 오르게 만들었더랬다. 태공망은 눈을 흘겼다. 하도 겪어서 이젠 지적하기도 지쳤다. 해 봤자 무위로 돌아가니 차라리 안 하는 쪽이 나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신농 또한 태공망에 대해 할 말 많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질세라 손가락질하고 끌끌거렸다. 둘 다 꼴사나워요. 간이 커진 사불상이 아무렇게나 말을 찔러 넣었다. 끝까지 훈훈한 장면하나 연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촌극이다. 

황천화는 그제야 줄담배피던 걸 멈췄다. 막 입에 댔던 장초를 그대로 꽁초 산꼭대기에 비벼 껐다. 힘을 주어 누르자 꽁초 산이 와르르 무너졌다. 아직도 제대로 된 인사말은 찾지 못했다. 혓바닥은 그의 편이 아니다. 그래서 인사를 태공망의 몫으로 떠넘겨 버리기로 했다. 황천화 치고는 새로운 시도다. 헛기침으로 점잔만 빼다가 슬쩍 떠봤다.


“사숙,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새로운 시도는 그저 새로운 것에서 그쳤다. 말을 내뱉자마자 이건 망했군,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어설펐다. 상대는 태공망이다. 수를 써봤자 그 눈에는 훤히 보이고도 남음이다. 태공망이 엉거주춤 선 채로 황천화를 올려다봤다. 딱 삼초 간 쳐다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얕은 수는 바닥까지 파헤쳐진다. 아마 어린애가 하는 눈 가리고 아웅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씰룩이다가 킁, 들이켰다.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황천화의 얼굴을 잰다. 슬그머니 웃었다. 태공망이 웃을 때 황천화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역사가 없었다. 경험이 척추로부터 목덜미까지를 주르륵 훑어 올라갔다. 입 열지 마. 막는 것보다 태공망이 빨랐다.


“그래, 오랜만일세. 자기야.”


어떤 말이 가장 큰 타격을 입힐 지 잘 알고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입 막으려던 손이 멱살을 잡을 뻔 했으니 참 잘도 찔러왔다. 황천화가 암만 떠본다고 했지만 고스란히 반대가 된 셈이다. 입도 멱살도 못 잡아 황천화는 제 미간을 잡았다. 꽉 죄었다. 쥐어짜니 조금은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다. 황천화는 우는데 태공망만 싱글벙글 웃는다. 턱 끝에 맺힌 땀방울마저 싱그럽기도 했다.


“이 늙은이가…. 적당히 하소. 다 끝나가지고.”


애써 멀쩡한 척 했다. 황천화가 손을 내저었다. 잡귀 쫓듯이 했다. 내친김에 잡념도 쫓았다. 그럼에도 내쫓아지지 않았다. 악령처럼 눌러 붙었다. 끔찍하게도 좋을 꿈을 꾸게 해줄 악령. 새파란 눈을 하고 그를 들여다본다.


“흐음. 벌써 끝났다고 하기엔 좀 이르지 않은가?”


나직한 목소리. 태공망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땐 눈을 제대로 마주쳐 온다. 나라고 마음이 편했겠나. 한낮의 태양을 가리고 기댔던 말들. 말했을 때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러하다. 황천화를 일깨운다. 


“왜 지금의 자네는 안 될 거라 생각해?” 


발돋움을 하고 코와 코가 닿을만한 거리에서 속삭인다. 그 고백은 전부 내가 들어왔는데. 황천화는 혼의 고백 따위 아무 소용없다 했으나, 태공망은 다른 것을 들었다 한다. 살아있을 적 이 숨으로 말해온 사랑스런 고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그렇게나 매정하게 차왔던 말들이 사실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어찌나 마음을 흔들어 대던지. 바람 같은 목소리, 숨이 간지럽다. 거기까지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가장 동할 말을 속삭이고선 태공망은 가만히 황천화가 움직이기까지 기다린다. 눈이 곱게 휘어져 가르스름하게 웃는다. 결정을 떠넘기는 건 바로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도대체가 살아있는 것들이란. 그래서 황천화는 냉큼 붙들었다. 이 정도야 한낱 혼백에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야말로 의지라고 하겠다.

까마득한 역사의 그 어떤 것도 바꾸지는 못했으나 분명히 변화는 있다. 모든 과거의 고백들을 지금의 태공망이 들었으니 그것들이 없던 일은 될지언정 사라지진 않았다. 미래의 황천화와 태공망이 될 것은 맞다. 

그는 과거를 바꾼 게 아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미래는 바뀐다.  그 작은 것들이 쌓여서 지금이 된 거니까.




마무리가 남았다. 산에서 조우해 시작하였으니 이제 산을 내려가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걸 하산이라 해야 할지 증발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평범한 등산객처럼 잘 닦인 등산로를 찾아 산길을 타박타박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간 벌려놓은 난장판을 정리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태공망이 산 위로 들고 올라왔던 잡동사니들은 의외로 문제가 안 됐다. 중계석도 손짓 하나로 안개 속에 사라졌다. 신농은 스스로 사라지는 데에도 그같이 했다. 짧게 인사하고 무엇에 대한 건지 무운을 비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흔드는 손끝부터 한 올 한 올 흩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신농이 사라지거나 어디론가 간 게 아니라 이 자리에 계속 존재하고는 있으나 단지 인식하게 못하게 된 것 뿐이라고 했다. 순조롭게 하나가 퇴장 아닌 퇴장하고 셋이 남았다. 가장 큰 문제는 황천화가 수북하게 쌓아놓은 담배꽁초였다. 담배꽁초인지 황천화인지 태공망이 잠시 노려보더니 곧바로 노성을 쏟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담배는 아니지. 꽁초 버리는 건 더 아니지. 철없는 것아. 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고 왔어야 했는데. 산에서의 흡연 위험성에 대한 장시간의 설교가 이어졌다. 사라진 중계석 자리에 산불조심 팻말을 다섯 개는 박아두었다. 억울한데 다 맞는 말이라 황천화는 고개 숙이고 가만히 들어주었다. 목이 퍽 아파왔지만 반성하는 척이 길길이 날뛰는 발길질을 막을 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대신 꽁초 산이 수난을 당했다. 채이고 밟히다가 정화되어 사라졌다. 재는 전부 증발하고 상쾌한 공기만 남았다. 답답하던 가슴 안쪽까지 시원해졌다. 들이마실 때마다 철썩철썩 파도 부딪히는 소리 같은 웃음이 났다. 슈퍼보패로 사고 친 것에 대한 문책보다는 흡연으로 혼나는 쪽이 아무렴 사정이 훨씬 나았다. 훈훈했던 분위기 무색하게 괜히 말 돌리는 것으로 보여 퍽 귀엽기도 했다. 


“영감도, 쑥스러워하기는.” 


이제 귀여워하는 것쯤이야 혼날 일이 아니다. 황천화가 고개 숙인 척만 하면서 한없이 흐뭇하게만 바라보고 있으니 태공망은 벌써 과거의 황천화가 그리워졌다. 걔가 좀 답답하긴 했어도 맹랑하니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말이야. 서로가 서로를 그저 귀여워만 하고 싶어 하는데 정작 귀여움 담당이 없으니 이 연애는 시작부터 글러먹었다. 사불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호언장담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이 아주 악담에 가까웠다. 꼴랑 연애 문제에 끼어 그간 고생했으므로 그 정도 악담은 해도 괜찮다.


“저 바보들. 아마 백일도 못 갈 거라고 봐요.”


고작 백일.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가깝다. 예상되는 파탄의 원인으로는 연예인 스캔들 중 제일 흔한 성격 차이를 들었다. 은근히 그럴싸했다.


“뭐 그럼 어때.”


의외로 시원하게 납득한 건 황천화였다. 호탕하게 웃더니 태공망 어깨를 감싸 안고는 뜀뛰듯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깨에 올라온 무게가 하나도 없었음에도 태공망은 끌려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영원을 살아 찰나의 연애에 집착하는 법이다. 황천화 아집이 멀쩡하게 살아있음을 봤다. 그게 아직 꽤 귀여워 보이니 다행이다, 생각했다. 원래 그런 것들을 찾아가는 게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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